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December 18, 2019

마지막 농담은 시입니다. 어쩌면 말장난이라는 ‘농담’의 기원에 가장 가까운 농담이 바로 시일지도 모르겠군요. 이제까지 살펴본 농담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다시 읽음으로써 무심코 지나쳤던 이런저런 장면들이 실은 꼭 말장난처럼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면, 시라는 농담은 기본적으로 현실을 비틀어 읽음으로써 성립합니다. 물론 시가 무엇인지 밝히는 일, 혹은 시와 현실의 관계를 따져 가리는 일은 시와 농담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을 한참 초과하는 일이 될 테니 우선 오늘 다룰 몇 편의 시에 집중해 봅시다. 소설적인 농담을 다루기 위해 논의를 소설론 일반이 아닌 카프카와 쿤데라에 한정했던 것처럼요. 시와 시적인 것을 먼저 다루지 않은 상태에서 시를 이루고 있거나 시에 관련한 다른 어떤 것들을 다루는 일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나눠 볼 수는 있겠지요.

일단 시라는 통념에서 먼저 벗어나봅시다. 말법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규격을 제외하면 시에서 무엇이 남을까요? 뭐 이것저것 추릴 수 있겠지만 우선 시의 효과에 초점을 맞춰 봅시다. 시는 자신을 읽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남깁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 효과를 갖지 못했다면 글자를 읽었지만 시를 읽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는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시 창작 교실에 다니는 66세 할머니 양미자 씨가 등장합니다. 영화는 ‘시 창작 교실에 다니는 할머니’에 대한 전형적인 통념에 기대어 작중 인물을 소개합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서 어쩐지 소녀 같은 말투를 쓰며 자신의 ‘시인 기질’에 종종 가볍게 혼자 도취하는 모습으로 양미자 씨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시 창작 교실의 강사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인은 잘 보는 사람이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말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시에 대해 잘 알든 모르든 시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만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또 새롭거나 중요한 통찰이 담긴 말 같지도 않으니까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시에 대해 내보이는 태도는 양가적입니다. 손자를 딸 대신 맡아 키우고 있는 할머니가 시를 배우겠다고 읍내까지 매번 오가는 정성이 대견하기도 하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낡고 고상한 척하는 취미 생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섞인 시선이 교차하지요. 작중 인물 또한 이러한 통념에 착실하게 부합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양미자 할머니에게 시를 배운다는 것은 거실에 예쁜 화분을 하나 들이거나 장식용 액자를 벽에 거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 쓰기를 숙제로 받고서는 사과를 만져보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꽃을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어쩐지 삶을 외면하는 듯한, 일상으로부터 유리된 시라는 순수하고 고상한 세계를 애써 만들어내려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니 이혼하면서 자식을 맡겨 놓고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딸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우리 모녀가 친구처럼 지내서 그렇다고 포장해 넘기고, 손자가 학교에서 집단 성폭행에 가담했고 피해 여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다른 학부형에게 들고는 자리를 피해 나와서 꽃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이겠지요. 

하지만 삶이 시 몇 줄 따위에 어디 그리 쉽게 정리되겠습니까. 양미자 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자리와 시의 자리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죽은 소녀의 추모 미사에 참석하고, 샤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학교를 오가는 손자를 붙들고 신음하고, 사건이 발생한 학교를 찾아가고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 강가를 찾아가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옷을 벗고 죽은 소녀의 어머니를 만나지요.

 

자, 시라는 것은 이렇게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어떤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다시 말해 아무 효과를 갖지 못했다면 시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시만이 읽는 사람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가 아닌 다른 글이나 글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모종의 효과를 발휘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시라는 문제를 다룰 때에는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의 구분이 중요합니다.) 이 효과는 효과가 미치는 대상과 과정에 따라 양과 질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효과의 발생에서 시차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이 효과라는의 문제는 꽤나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농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고요. 농담이 모종의 효과를 (예컨대 웃음이나 유쾌함 같은 효과를) 수반한다고 했을 때, 웃기지 않으면 농담이 아닌가, 혹은 유쾌하지 않으면 농담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당장에 가능하거니와, 또한 웃음이나 유쾌함을 느끼는 것은 궁극적으로 말의 화자가 아닌 청자에게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그 말의 위상과 의미를 결정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곧장 뒤따르기 때문이지요. 어떤 대상을 그것 자체로 정의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할 것인가, 만약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한다면 하나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합당한가, 또 그렇다면 결정 어떤 대상이 갖는 의미는 누가 그것의 의미를 결정하느냐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것인가, 하는 식으로 물음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칸트의 탁월한 논의를 통해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다음 기회로 미뤄 둘 수밖에 없겠군요. 우선은 시라는 농담을 마저 다뤄 봅시다.

 

시가 발휘하는 효과의 차원 역시 여럿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논의를 위해 거칠게나마 인지적 효과와 정서적 효과로 구분해볼까요. 당장에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서적 효과입니다. 애당초 시라는 말법이 감동, 즉 감정의 움직임을 겨냥하고 있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시에서 가장 먼저 기대하는 것 역시 종류가 무엇이든 일종의 감동이기 마련입니다. 남의 글을 빌려 연명하는 일부 직업 평론가가 아니라면야 실용적인 정보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겠지요. 또 역시 이들 평론가나 학생 정도가 아니라면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기 위해 시를 읽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감동, 그러니까 감정의 움직임은 개인적인 것, 그것도 개인의 가장 내밀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사회 규범이나 관습, 통념과 분리할 수 없는 몹시 공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만약 누군가의 어떤 행동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결례에 해당한다면, 예의와 결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 의해, 즉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종합적인 경험과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모종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가 속한 사회가 허용하는 행위와 감정의 결합 규칙으로부터 크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감정이라는 기준으로 시에 접근하는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적어도 이미 알고 있고 이미 허용되어 있는 그 감정의 규칙을 고수하는 한. 

서정시가 그래서 어렵습니다. 꼭 아우슈비츠 때문만이 아니라요. 시가 시로서 읽는 사람의 감정에 닿거나 효과를 발휘하는 방식은 기존의 감정이 움직이던 방식과 달라야 하니까요. 기왕에 움직이던 방향에 기왕에 움직이던 방법으로 다시 움직이는 것은 쉽게 말해 시와 가장 거리가 먼 어떤 것입니다. 이런 일에는 굳이 시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내버려두면 그냥 움직이던 대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사실 이건 효과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정해진 것이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데 무슨 효과씩이나 운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시가 부리는 효과는 어떤 식으로든 이 정해진 규칙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있는데, 이건 서정시가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고, 현대 시가 어려운 까닭이기도 합니다. 대체로 생활인의 일상은 사고, 감정, 행위 모든 면에 있어서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지 않기 마련이고 또 이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생활과 일상을 거꾸로 규정하기도 하지요. 그러니 일상의 시선으로 이런 시들의 세계를 뒤적여도 그저 이상하게만 보일 수밖에요. 음 하지만 그래도 일단 이 정도면 출발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대개 새로운 것은 이상한 것 근처에 있기 마련이니까요.

바퀴 달린 것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까, 방향이라는 것을. 회전의 힘을. 뒤집힌 자동차 속에서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의 운세를 믿습니다. 오늘은 동쪽에서 귀인을 만나고, 버스정류장에는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지고, 이제 곧 파도가,

파도가 밀려들겠지만

 

우리가 오늘 본 것은 무엇일까? 인생이란,

적절한 거리에 은행이 있다는 것. 누군가 인출기의 버튼을 누른다는 것. 모자를 눌러쓰고 있다는 것.

시체안치실의 위치는 알고 있나? 유령의 집은? 당신이 그라면,

어떤 수염을 붙이고 걸어가겠는가? 카이제르와 채플린 사이에서 당신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했을 뿐입니다만.

 

정류장이란 묵비권을 행사하기 좋은 장소. 범인의 은신처는 그늘이 그늘과 겹쳐지는 곳. 잠재적 범죄자들이 두 손을 내밀어 복권을 구입하는,

바로 그곳.

 

우리 중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모든 것이 자명해지는 순간,

그때 이 남자는 거기에 있었고 저 여자는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나는 어디에?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등 뒤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있다.

 

(이장욱, '목격자들')

예컨대 바퀴가 아닌 팔다리를 가진 내가 갑자기 바퀴 달린 것들로부터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일상은 정지합니다. 정해진 축을 따라 바퀴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일상의 관성도 회전을 따라 함께 작동하지만,  뒤집힌 자동차처럼 바퀴의 회전이 멈춘 다음에는, 그러니까 이동 수단으로서 자동차라는 의미가 정지한 다음에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눠 앉은 역할이 차와 함께 뒤집힌 다음에는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상 또한 함께 뒤집히고 마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통념과 규칙에서 이탈한 순간에 성립하는지도 모릅니다. 일종의 사고(accident)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장면에서요. 그러니 바퀴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방향이나 회전이 아니라 뒤집힌 자동차에서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읽어볼까요, 오늘의 운세를 믿는 사람은 운세가 예고한 동쪽의 귀인을 만나기 위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했을 뿐이지만 실은 한심한 오늘의 운세나 일상의 규칙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제멋대로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일상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나, 오늘의 운세를 충실하게 믿고선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는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 소크라테스가 알려준 농담이나 세르반테스가 보여준 유비를 이 장면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신문의 운세란 추종자를 한심하다고 조롱하는 사람의 모습에서요. 어리석은 사람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 더 우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채플린 수염처럼 코밑에만 난 수염이든 카이제르 수염처럼 끝이 말려 올려간 수염이든 아무렴 어떻습니까, 어차피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요. 마치 사고처럼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야 이 모든 상황이 간신히 자명해지지만, 자명해 보이던 일상이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하게 밝혀진 순간 사라지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 이제까지의 자명함에 기대 있던 나, 여기에 있는 이 남자도 저기에 있는 저 여자도 아닌 바로 나의 위치지요. 자,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가 엉뚱한 곳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당신은 뚜껑으로 닫을 수 없다.

모자라든가 자동문

오늘의 뉴스로도.

마치 물로 만든 의자처럼

누군가 거기 앉으면 풍덩,

빠져버릴 것처럼.

 

햇빛이 당신을 넘치고 그녀의 말이 당신을 넘치고

가정의 평화와 일기예보 역시.

당신은 또 

당신에게서 벗어난다.

 

메뉴판의 메뉴들을 꼼꼼히 읽어가듯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듯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이

당신의 정오를 닫을 수도 있겠지만

 

잠자는 사람이 터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악수하는 손

불판 위에서 타오르는 돼지의 살

혼자 밥 먹는 사람의 일요일 역시.

 

조용히 모자를 쓴 뒤에 

행인이나 군중이 될 수 있다.

빙하처럼 거대하게 녹아가는 것은 북극에도 

청량리에도 있으니까.

창밖의 풍경이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니까.

 

어디에나 뚜껑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북극곰의 밤이 닫히지 않는다.

아무리 신중하게 앉아 있어도

내부는 이미 내부가 아니다.

 

지금 당신 앞에 흘러넘치는 찻잔이 있다.

잔은 기울어지지도 않았다.

 

(이장욱, '흘러넘치다')

이제 나는 하다 못해 그 흔한 병뚜껑조차 쉽게 열고 닫을 수 없습니다. 책상 앞에서 내 엉덩이와 허리를 받치고 있던 의자는 마치 물로 만든 것처럼, 앉으면 풍덩 빠질 것만 같습니다. 햇볕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녀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나는 지금 없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나 또한 나에게서 벗어나 어디론가 계속 미끄러지듯 이탈하는 것만 같습니다. 처음 간 유명 맛집의 메뉴판을 꼼꼼하게 살피듯이, 네 번 틀린 비밀번호를 다섯 번째 입력하듯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이 신중하게 나를 찾아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신중하게 앉아 있어도 이미 속이 속도 아니니까요. 나는 증식하듯 계속 흘러넘칩니다. 일상의 통념이 알맞게 지탱해주던 나의 의미 세계는 통념의 관성이 정지한 순간 맹렬하게 물음표를 쏟아냅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해도 되나? 하면 안 되나? 할 수 있나? 할 수 없나? 맞나? 틀렸나? 내가 곧 물음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흘러넘치는 물음표들은 뚜껑으로 닫을 수 없고 모자로 눌러지지 않고 뉴스를 아무리 봐도 해소되지 않습니다. 뭐가 달라졌을까요? 겉보기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꼭 기울어지지도 않은 찻잔에서 찻물이 쉴 새 없이 넘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두 손이 나를 사육한다. 두 발이 나를 길들인다. 나는 정확하게.

보폭을 유지한다. 건너편의 건너편의 건너편을 향하여.

붉은 등이 켜지면 외로운 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행이란,

 

횡단보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나의 왼발이 그의 오른발에 섞여들고 그녀의 표정에 그의 시선이 뒤섞이는 지금을,

세계의 끝이라고 부르자. 신발의 종류와 헤어스타일, 그리고 교우관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는 세계. 나는 이윽고,

 

남녀노소가 되었다. 그녀는 혼자 외우기 좋은 주문을 알게 되었고, 그는 개들의 침묵을 이해했으며, 나는 십년 전 어느날의 중얼거림을 똑같이 반복했다. 여기는 어제의 힘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신호등은 빨강 초록 주황 빨강,

외로운가?

 

누군가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거칠게 누르고 누군가는 갑자기 차도로 뛰쳐나갔지만 모두가 거리의 문장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욕설에 익숙한 소년소녀들의 몫. 이런 개새끼가,

 

이곳은 신호등이 지배하는 장소, 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 자동차들은 세계의 끝을 향해 질주하고

나는 험상궂은 표정으로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푸른 등이 켜졌다. 횡단보도는 건너편의 건너편의 건너편으로,

 

이어졌다. 건너간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횡단보도의 한가운데에 이르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듯 모두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몇구의 시신이 이곳에서 발생했다. 신호등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빛깔로 바뀌었다.

(이장욱, '세계의 끝)

이제 믿을 것은 나의 두 손과 두 발이 전부입니다. 내 손이 나를 사육하고, 내 발이 나를 길들이도록 합시다. 정확하게 보폭을 유지하면서, 건너편이 아닌 그 건너편의 건너편의 건너편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횡단보도를 건널 때 들키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빨간불이 켜지고 서로 반대편에서, 멀찍이 바라볼 때에야 누군가 간신히 나를 알아봐줄지 모르겠군요. 신호가 바뀌면 누군가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거칠게 누르며 걸음을 뗄 테고 누군가는 기다렸다는듯이 차도로 뛰쳐나가겠지만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든 사람이 거리의 문장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이곳은 신호등이 지배하는 장소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일상의 규칙을 다시 읊는 것처럼,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해야 합니다, 하지 않아야 합니다, 꼬박꼬박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이게 아니겠지요. 

 

그러니 이제 다시 써봅시다. 이번엔 조금 더 재밌게 쓸 수 있을 겁니다. 기왕에 이탈하기로 작정한 이상 과장된 자의식이나 과잉 신파, 거추장스런 경건성이나 고발 의식은 얼마간 모른 척해도 좋겠습니다. 나중에 가서 밝혀지겠지만 역설적으로 자의식이든 신파든 경건성이든 고발이든 결국엔 재미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성립하기 어려울 겁니다.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지병이라 할까 지병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권혁웅,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

술 취한 아버지가 밥상머리에 던지는 접시는 그야말로 비행 접시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커브는 박철순보다도 훌륭합니다. 아무도 쳐낼 수 없었으니까요. 나는 아버지의 접시처럼 멋지게 담을 넘어 달아나고 싶었지만 먼저 나갔던 형의 비행은 뺨 석대로 끝나고 말았군요.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구리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지요. 물론 그 시절에는 접시와 형만 날아다닌 게 아닙니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 돌멩이들이 허공을 가르며 거리를 날아다녔고 서울은 매일매일이 ‘선데이’였습니다.

 

평론가 유종호는 시가 주는 즐거움에 있어 소홀치 않은 부분이 말놀이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시라는 작품 전체가 일종의 글자넣기놀음이라고 덧붙이면서요. 이렇게 본다면 권혁웅의 시는 ‘글자 넣기’라는 놀이의 규칙을 퍽 훌륭하게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이미 선행하는 은유의 구조에 다른 글자를 집어 넣고서는, 이를 바탕으로 은유와 현실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방식으로요.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기운 센 천하장사는 우리 옆집에 삽니다. 그는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더군요. 그의 아내는 밤이면 우리 집으로 도망 와서는 새벽에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밖으로 던졌고, 우리집 계란은 금방 동이 났지요.

 

어느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습니다. 아내와 가재를 매일 같이 두드려대는 통에 참다 못한 옆집 남자가 나선 것이지요. 그는 오방떡 만드는 남자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틀로 계란빵을 굽기도 했답니다. 그러니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으로 생각했던 걸까요?

 

이 남자의 이야기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들어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들어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달아나고 말았군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 그 일이 사내의 일이고 먼 산 너머에서 생긴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요.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 나섰지만 계란으로 바위, 아니 먼 산 치기였겠지요.

 

기운 센 천하장사이자 고철 장수인 미장가Z는 오방떡 장사를 이기지 못했고, 그레이트 마징가 오방떡 장사는 먼 산 너머의 짱가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4대 명산 너머에 있는 역마와 도화, 즉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이기지 못했지요. 패러디는 농담의 오랜 기원 가운데 하나인데, 함께 읽은 시에서 작중 내내 시인이 활용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소년 시절의 기억이 선행하는 의미 체계와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지요. 

 

할머니 천식이 또 시작되었다 지겨워,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한쪽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자지러지는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였다 그러게, 담배 좀 고만 태우시지…… 투덜대가가 놀랐다 할머니는 십사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는 어디서나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쇳물을 쿨럭이며 뱉거나

비 듣는 시멘트 기왓장 아래 누워

낙숫물을 흘려대기도 했다

 

우리는 할머니는 화장했다 선산 이곳저곳에 뼛가루를 뿌렷다 실개천이 할머니를 받아안고는 멀리 모시고 갔다 그리고 우리는 문을 닫고 잠들었던 것인데,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그 먼 본적지에서 할머니가 돌아왔다

 

하수구에 물을 버리면 꾸르륵,

소리를 내며 할머니가 빠져나갔다

머리 감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빙빙 돌리며, 데려가려고 했다

 

내가 어머니, 하고 부를 때마다

할머니가 돌아보신다

 

(권혁웅, '투명인간')

 

일상과 통념을 멈추게 만드는 이 이상한 감각은 정교하게 설계된 이미지들 속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패러디와 같은 수사적 장치를 통해 짜임새 있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난데없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천식을 앓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에 투덜거리다가 문득 깨닫는 것이지요, 할머니는 십사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돌아가신 할머니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수도꼭지에 쇳물이 쿨럭이듯 쏟아질 때에도, 시멘트 기왓장 아래 누워 빗소리를 들을 때에도 하수구에 버린 물이 꾸루룩 빠져나갈 때에도 어김없이 할머니는 등장합니다. 시신을 화장하고 선산에 뼛가루를 뿌리고 실개천에 떠내려가는 뼛가루를 확인하고 집에 돌아와 문을 잠그고 잠들었는데, 그 멀리서 할머니가 돌아오신 것이지요. 자 이제 이쯤이면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그냥 돌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오늘의 운세에 실린 행운이 실은 편집자가 아무렇게나 잘라 붙인 글귀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마냥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며 하루를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내 가슴엔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

살고 있어

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 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

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

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진은영, '대학 시절')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가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진은영, '고흐')

그러니 가슴에 꼭 염소라도 한 마리 살고 있는 것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채우기 위해 종일토록 종이를 먹어 삼키곤 합니다.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가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별 수 없지요. 마치 왼쪽 귀에 대고 온 세상의 개들이 짖는 것만 같으니까, 꼭 누가 귀를 물어뜯는 것만 같으니까 귀를 잘라버릴 수밖에요. 

 

그제야 간신히 들립니다. 한 개의 귀를 자른 다음에야 밤 하늘에 별이 얼마나 빛나는지,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이 얼마나 메아리 치는지 비로소 들리는군요. 왼쪽 귀가 세상이 지르는 비명으로 가득한 통에 오른쪽 귀에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가 없으니까, 커다란 귀는 그만 잘라서 바람부는 밀밭에 던져둡시다. 까마귀들이 반겨 달려들겠지요. 아, 밀밭에 뿌린 귀에서는 어떠한 수확도 기대하지 않도록 합시다. 한 알의 밀알이 거대한 밀밭으로 거듭나는 환상은 역시나 진부하니까요. 여기에는 아무런 후일담도 없어도 괜찮겠습니다. 그저 그대로 썩어 세상 모든 바람에 취기를 안길 수 있는 한 방울 향기, 아득한 밀주라면 충분합니다. 

 

한 알의 밀알로 썩어

거대한 밀밭을 꿈꾸는 사람들

나는 하나의 밀알로 썩어

세상의 모든 바람이 취기로 몰려오는

한 방울 향기

아득한 밀주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진은영, '하나의 밀알이 썩어')

음 이쯤이면 이제 비로소 ‘서정’을 언급할 수 있겠군ㅇㅎ. 감정이 움직이고 오가는 기왕의 규칙에서 이쯤은 달아난 뒤에야 시는 간신히 서정(抒情), 즉 감정을 꺼내고 풀어놓고 드러내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시의 효과를 언급하면 정서적 차원과 인지적 차원을 구분했었지요. 사실 시에서 얻을 수 있는 인지적 효과가 뭐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굶주린 아프리카 난민을 새삼 상기하기 위해 시가 필요합니까? 고통 받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굳이 시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능란한 처세술이나 고장난 하수구를 고치는 요령을 시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기가 막힌 김치찌개 요리법을 꼭 시로 배워야 합니까? 뭐 때로 이런저런 시들이 이런저런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가 줄 수 있는 인지적 효과의 가장 중요한 차원은 바로 감각의 지각입니다. 시는 통념과 일상을 초과하는 감각의 지각과 정서의 이동을 보여줌으로써, 이렇게 느낄 수도 있다, 혹은 그것이 아닌 다른 기쁨이 있다, 다른 슬픔이 있다, 기쁨이나 슬픔처럼 흔한 이름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춤출 수도 있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노래할 수도, 무엇을 먹을 수도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걸을 수도 있고 양치질을 할 수도 있고

세수도, 얼굴 마사지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나는 거울을 볼 수 없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두렵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을 보게 되는 것.

 

어둠 속에서,

가령 어둠보다 더 캄캄한 얼굴을.

 

(황인숙, '어둠 속에서')

 

이렇게 보면 거울을 보는 일 하나도 예삿일이 아닙니다. 흔히 익숙한 일이나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을 두고 ‘눈 감고도 할 수 있다’는 표현을 쓰지요. 보이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기존의 경험과 감각만으로 처리해낼 수 있는 일들을 두고요. 말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걷고 뛰고 양치질하고 세수하는 일 따위가 그렇습니다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딱 하나 할 수 없는 일은 거울을 보는 일입니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어두워서 겁이 나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뭔가를 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어둠보다 더 캄캄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될까봐 두려우니까요.

사월은 차갑다

사월의 돌은 더 차갑다

사월의 돌을 손에 쥔 사람은 어째서 뜨거운가

그는 어째서 가까운가

 

마루 아래 요정이 산다고 믿은 적이 있다

잃어버린 세계는 거기서 잘 살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 뜨거워질 수 있다

 

하나의 문장으로도 세계는 금이 간다

이곳은 차가우므로 더 유리하겠지

 

뒤뚱거리는 아기처럼

닫힌 문이 뒤뚱거린다

문에게도 가능성이 있다

맥주가 목젖을 가시화한다

안주가 어금니를 가시화한다

우리의 대화를 대신한다

 

대화는 기억해둔 것들을 잃게 한다

사월은 유실물 보관소일지 모른다

 

솥에 뚜껑이 없었다면

쌀은 밥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뜨거운 밥에 차가운 숟가락을 넣는 건

어째서 기예에 가까운가

 

손이 시린 자가 장갑을 낀다

손목을 그어본 자가 시계를 찬다

 

문이 열린다

찬바람이 들이친다

 

바다는 사월의 날씨를 집결한다

해파리가 뜨겁다 가오리가 가깝다

열대어는 차갑다

심해어는 내 방을 엿본다

 

(김소연, '열대어는 차갑다')

 

 

시는 시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새로운 감각을 증언합니다. 시가 증언하는 감각과 일상의 감각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별 상관 없습니다. 일상의 관성이 근면하게 작동할 때면 시의 자리는 거의 오간 데 없이 사라질 것만, 이미 사라진 것만 같지만 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것 같은 그 세계는 사실 마루 밑에 잘 살고 있으니까요. 이 사실만으로도 얼마든지 다시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아닌, 거의 무력한 시의 뜨거운 감각은 어쩌면 통념의 세계에 균열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문장만으로도 세계에는 금이 가고 마니까요. 세계가 견고하고 차갑다면 균열에 더 유리할 겁니다. 닫혀 보이는 문 역시 문인 한 언제든 열릴 수 있습니다.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고정되고 있고 움직이지 않는 문이지만 사실은 보이지만 가능성이 뒤뚱거리고 있는 셈이지요. 보이지 않던 목젖을 맥주가 드러내듯, 안주가 어금니를 드러내듯 흔해 빠진 맥주와 안주 따위로도 가능성을 열어 젖히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후략) …

2019. 12. 18. / LG Social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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