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철학과 사건>

November 21, 2019

오늘날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뭐 꼭 우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지금 묻는 것은 왜 우리인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왜 철학인가, 하는 물음이니까요. 그러니 철학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누구여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을 이렇게 다시 물을 수 있겠지요. 철학은 오늘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시대의 문제를 인문정신의 위기로 진단하고 철학에서 모종의 해답을 구하려는 시도는 철이 지나 어색해진 유행처럼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하고 상투적인 느낌을 자아냅니다. 게다가 해답이랍시고 이런 진단에 이어 인문학 내지는 철학으로 포장한 상술이 은근슬쩍 고개를 내민다면 그런가, 싶어 갸우뚱하던 고개가 도리질로 이어지기 십상이지요. 전설에나 나오는 요순의 때가 아니라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고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돌이켜보면 사람 목숨 여럿이 우습게 날아가던 시대도 실은 예사였고 허구한 날 먹는 걱정 굶는 걱정 어디 인간사에서 끊인 적이나 있었습니까. 물론 인간사 본래 그렇다, 라는 식으로 당대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시각은 퍽 미심쩍지만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운운하는 것도 썩 미덥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시대가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문제니 위기니 운운하면서 시끌벅적 철학을 호명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무관심과 무시, 약탈만이 횡행합니다. 철학이라니, 요즘 시대에 그런 생각들이 가당키나 한가요, 원자보다 작은 물질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시대, 빛의 속도로 수억 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먼 우주의 끝자락까지 엿보는 시대, 돈만 있으면 계절과 장소를 떠나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소비가 가능한 시대에 당최 철학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나랑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약간의 취미, 지친 일상의 위안 내지는 마음의 안정을 제공하는 잠언 취급 정도가 보통이지요. 자, 보통의 상황이 이런 사이, 신시대의 학문들은 철학의 유산을 부지런히 제 주머니로 옮겨 담습니다. 사유 능력과 인식에 관련한 탐구의 자격은 뇌 과학과 인지과학이 가져갑니다. 생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호르몬의 작용과 뉴런의 활동으로 설명하지요. 인간 사회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이제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의 몫입니다. 뭐 철학이 자연과 물리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요. 문자 그대로 찬밥 신세입니다. 철학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시대는 잘만 흘러갑니다. 어쨌거나 흘러가지요.

 

사실 되짚어보면 어느 시대에나 철학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의 일화를 떠올려볼까요? 잘 알려진 것처럼 탈레스는 기원전 7세기 밀레토스에서 만물의 근원과 원리를 탐구했던 사람입니다. 흔히 그리스 철학이라고 하면 많은 경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먼저 떠올리지만, 플라톤에 앞서 세계의 근원과 원리를 묻고 탐구했던 자연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탈레스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요. 탈레스는 천체의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밤마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에 몰두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탈레스의 주변 사람들은 이런 그의 모습을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를 쌓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늘 혼자 뭔가 생각에 잠겨 있거나 엉뚱한 별이나 쳐다보며 살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탈레스는 여느 날처럼 밤하늘을 보면서 걷다가 미처 발 앞에 우물을 보지 못하고 그만 빠지고 맙니다. 그 모습을 본 지나가던 하녀가 그를 보고 웃으면서 말하지요,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겠다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정작 자기 코앞조차 보지 못해 웅덩이에 빠지다니.

 

오늘날 들었을 때는 그저 우스운 일화 정도의 느낌이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탈레스가 주위에서 받은 대접은 지금 우리가 체감하는 것 이상이었을 겁니다. 노예가 주인을 공공연히 비웃다니요, 그것도 여자 노예가 말입니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여기저기 전해져서 오늘날에 이를 정도라면 탈레스가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탈레스가 우물에 빠진 뒤의 이야기는 약간의 반전을 통해 탈레스의 명예를 회복시켜줍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받던 탈레스는 천체 운동의 관찰을 통해 기상 변화를 예측하고, 이듬해 작황을 예상하여 큰 이문을 남깁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탈레스가 대단하다, 마냥 허투루 노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그를 다시 봤다고 하지요. 성격 급한 사람들은 여기서 ‘봐라,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철학도 얼마든지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 남들보다 더 잘할 수도 있다’고 쉽게 교훈을 읽어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어딘지 조금 이상합니다. 아무리 ‘자연철학’이라고 하지만 굳이 기상과 작황을 예측해서 이문을 남긴 것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농경 사회에서 작물의 재배와 거래에 관련한 기술은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과학기술이나 차라리 금융 거래에 관련한 지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철학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조금 경우가 다르지요. 탈레스가 철학자라고 해서 그가 가진 모든 생각을 다 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과학자가 하는 모든 활동은 다 실험입니까? 예술가는 밥만 지어도 밥이 다 예술입니까?

 

결국 철학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이렇게 난관에 부딪힙니다. 세상으로부터 조롱받던 최초의 철학이 멋지게 복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의 이면에는 철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문제가 자리하고 있지요.

 

이제 맨 처음 우리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면 일단 철학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철학이 도대체 뭘까요? 우리는 철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철학의 의미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누구는 철학이 위기라고도 하고, 아무도 철학을 하지 않는 시대라고도 합니다. 철학 어쩌고 하는 것들은 죄다 배부른 소리라는 야단스런 비난과 철학에서 답을 찾겠다는 이상한 법석이 함께 소란합니다. 소란한 가운데 세상은 철학 없이도 잘만 돌아갑니다. 우리 일상은? 뭐 마찬가지로 별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기 다반사고요.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을 배워놓느라 여기저기 죄송한 상황이 예사로 펼쳐지지요.

 

이 와중에 결국 철학은 언어와 논리의 사용에 관련한 전문적 지식 체계로 한정당하거나, 또는 애먼 허영심만 기웃거리는 철 지난 잡화점 신세로 전락한 것이 당대의 형국인 것 같습니다. 필요와 경우에 따라 철학의 영토는 필요한 사람의 입맛대로 이리저리 잘리고 붙여지기 일쑤이지요. 퍽 초라한 몰골입니다. 명목상으로나마 자연과 인간에 대한 모든 탐구 영역에서 주인 행세를 하던 옛 시절에 비한다면 망해도 이렇게까지 망했을까 싶을 정도지요. 앞으로도 당분간 사정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철학의 몰락은 등속으로 꾸준하거나 때때로 가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기 운운하며 철학이 자신을 반성할수록 철학이 지닌 한계와 문제만 점점 드러나고,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수록 언어와 논리의 전문성에 자신을 가두는 꼴입니다. 세상과의 거리를 좁히겠다고 대중을 향할 때면 그저 옳은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뻔하게 맞는 말로 전락하거나, 상술 뒤범벅에 엉망으로 재단 당한 이상한 꼴로 나타나기 십상이고요. 한사코 철학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나 철학에 어떤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은 어쩐지 과거의 영광에서 억지로 자긍심을 길어 올리려 애쓰는 몰락한 민족의 비가를 듣는 것 같습니다.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멋지면 멋질수록, 웅장하고 화려할수록 어딘지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것처럼요.

 

철학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사실 이미 오래된 질문입니다.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해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탐구를 개진한 바 있으며, 그 질문만을 정확하게 콕 집어서 다룬 접근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아예 제목으로 달고 있는 책도 꽤나 있을 정도지요. 들뢰즈나 러셀처럼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친구들도 꽤 진지하게 고민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철학사의 탁월한 철학(자)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철학을 다시 묻고 정의합니다. 논변으로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으로 철학의 대상과 경로를 한정한 파르메니데스, 기하학처럼 연역적인 진리의 체계를 구축했던 스피노자, 사유와 경험으로 분단된 철학의 영토를 통합하는 칸트, 철학의 무대를 역사로 확장한 헤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주장하는 니체, 기존의 철학이 망각한 존재물음을 시원에서부터 다시 던지는 하이데거, 철학을 개념으로 쌓아올린 건축에 빗댄 들뢰즈, 언어, 진리, 세계의 관계를 통해 철학의 영토를 새롭게 구획하는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생각들과 다양한 접근들이 있었지요.

 

자,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는 바디우가 있습니다. 바디우는 오늘날까지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을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바디우는 진리, 사건, 주체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정치, 사랑, 예술, 과학이라는 네 가지 서로 다른 진리의 영역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방법이자 영역으로서의 철학이 가진 의미를 강변하지요. <철학과 사건>은 바디우가 젊은 철학자 타르비와 나눈 대담의 기록입니다. 전문적인 저술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대화의 기록이기 때문에 까다로울 수 있는 바디우 철학의 윤곽과 쟁점을 살펴볼 수 있는 적당한 진입로인 셈이지요. 

 

자 그럼 대담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대담자인 타르비는 바디우에게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그의 철학에 접근할 것을 먼저 제안합니다. 한편으로 바디우의 삶과 저작에서 정치가 갖는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치는 바디우가 제시하는 철학의 네 가지 조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바디우 철학이 난해하게 여겨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바디우의 철학에서 그가 속한 전통이나 다른 철학들과의 관계가 언뜻 쉽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었지요? 정치에 대한 바디우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두 가지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즐겨 참조하듯 그리스 전통에 기댄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의 관점이지요. 바디우 자신이 답하는 내용에 더불어, 우리는 이 두 관점을 실마리 삼아 그가 말하는 정치에 접근해 봅시다.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타르비의 질문에 바디우는 우선 오늘날 우리가 상속받은 정치적 전통의 중요성을 상기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 가운데 ‘적들이(ennemis)’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요. 바디우가 말하는 적이란 단지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집단, 단순한 반대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디우에게 적이란 우리가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정치란 무엇보다 이러한 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한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입장들이 존재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다른 한편의 입장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디우가 언급하는 정치의 출발점으로서의 적은 특정한 집단이나 입장이 아닌 무엇보다 적이라는 절대적 이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적이라는 이념을 본격적으로 정치의 복판으로 끌어온 사람, 정치에 있어서의 적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가장 진지하게 사유한 사람은 아마 칼 슈미트일 것입니다. 사실 정치의 문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언제나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디우가 철학의 네 가지 조건을 꼽으면서도 비대칭적으로 보일 만큼 정치에 많은 사유를 할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흔히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서 유명 정치인이나 정당, 선거와 제도들, 각종 뉴스와 선전을 떠올리지만,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이 층위에서 정치의 문제를 사유하지만) 정치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요? 쉽게 말하자면 결국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살아간다는 당면 조건이 바로 정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이지요.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나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 나의 생각과 어떠한 접점도 갖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즉시 정치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강제합니다. 결국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진리를 구축하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과, 또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의 고도로 관료화된 대중 사회는 이런 직접적인 조우와 마찰을 (마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폐하지만, 바디우에 따르면 사태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철학이 묻듯 정치라는 영역에서 진리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지요. 단순히 경험적인 수준에서 내 눈앞에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과 기준의 문제가 되니까요.

 

자, 바디우가 정치의 출발점으로 제시하는 적의 이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슈미트를 경유합시다. 슈미트는 1922년 <정치신학>이라는 짧지만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 논문의 서문에서 그는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정치적 결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정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기준이 바로 정치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정치적이라면 결국 모든 것이 다 정치적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모든 사유, 모든 판단, 모든 실천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입니다.

 

"너희가 비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어느 하나 빠짐없이 정치적"이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해서, 슈미트는 뒤이어 주권과 예외상태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슈미트 역시 이전까지의 많은 정치철학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권력, 법과 질서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지만 사유의 진행과 결과는 전혀 상이합니다. 각각 무제한적인 자유와 권리를 지닌 근대의 주체들이 갈등하거나 협력하고  투쟁하고 타협하면서 국가와 법, 질서를 구성한다는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과 달리, 슈미트는 이러한 권력의 작동 이면에 존재하는 예외상태와, 그것을 구분하는 힘으로서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내지요. 슈미트는 최상위 규범과 질서, 법의 규칙을 규정하는 궁극의 법으로서의 헌법에서조차 어떠한 귀속적 출발점을 도출할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단순히 법이 준수되는 상황을 정상으로, 법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예외로 보는 것이 아닌 ‘어떤 법이 지켜지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의 상황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요. 그가 말하는 주권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이름입니다.

 

열차의 운행을 예로 들어볼까요? 개개의 시간표가 열차의 출발 시각이나 도착 시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일반적인 법과 질서에 해당한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규칙으로 만드는 열차의 운행 자체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주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흔히 사람들은 열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하는 것을 정상으로,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거나 출발하지 못하는 것을 예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슈미트는 단순히 시간표와 열차 운행의 일치 여부가 아닌 열차 운행 그 자체, 열차와 철도의 운영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주권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야말로 상호불가침하며 배타적이고 단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자는 협상이나 협력의 대상으로서의 옹호자나 반대자를 갖지 않습니다. 권력 작용도 없지요. 주권자에게는 오로지 적과 친구가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단순히 열차를 오 분에 한 대씩 운행하는 것이 좋은지, 십 분에 한 대씩 운행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반대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열차는 오 분에 한 대씩 운행하게 될 수도, 십 분에 한 대씩 운행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결정하는 권력 역시 진정한 의미의,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권력이라고 볼 수 있는 주권이 아닌 일상적인 의사결정에 불과하고요. 진정한 의미의 반대자, 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차이는 열차의 운행 자체에 반대하는 것, 나아가 열차라는 실체나 개념을 전혀 공유하지 않고 공유할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슈미트는 이러한 차이에 비하면 시각표의 존재나 열차 운영과 시각표의 일치 여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요. 바디우가 언급하는 오늘날의 정치적 전통, 우리가 가진 유산은 바로 이러한 적에 대한 사유를 의미합니다.

 

바디우에게 있어 정치라는 계기가 중요한 까닭은 정치가 주체적이고 강한 활동, 새로운 진리들을 생산할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에서 이러한 역량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지속하는 익명들의 타협이 고작이지요. 뭐 낙관적인 성향이라면 느릿하게 더딘 진보를 떠올리거나, 비관적인 관점의 소유자라면 분주한 제자리걸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서 정치인, 정당, 선거, 제도, 뉴스와 선전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바디우에게 이것은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상태의 지속에 불과합니다. 슈미트적 관점에서 정상과 예외를 구분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거나 정당이나 선전 같은 것들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가 이것들에 국한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지요.

 

바디우가 오늘날 좌파의 난관을 언급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바디우는 오늘날의 권력은 우리에게 그 권력이 모든 것을 매우 잘하고 있다고,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고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라고 믿도록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반대의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권력이 모든 것을 매우 잘 처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환상에 불과한 것처럼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권력 역시 착각에 불과합니다. 완벽하게 기능하는 권력이 불가능한 것처럼 완벽하게 정지한 권력 역시 가능하지 않지요. 이러한 관점은 몹시 타당한 것으로 보이고 또 현실적이지만, 권력과 정치에 대한 비판적 지평을 심각하게 축소하거나 폐기합니다. 바디우를 포함하는 유럽의 비판적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 외에는 어떠한 비판의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 최근의 경향 자체가 권력 작용의 결과이고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랄까요?

 

바디우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어의 초라한 반복과 정보의 빈곤을 용인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날 정치적 합의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합의의 결과에 따라 (세기말 유행처럼 등장했던 역사의 끝을 알리는 선언처럼) 주어진 가능성, 당장 손에 쥔 가능성 외에 어떠한 가능성도 남지 않는 것이지요. 바디우는 공포와 무기력의 혼합물보다 현존하는 권력에게 더 이로운 것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정치에 대한 비판은 고작해야 세금을 조금 더 낼 것인가 덜 낼 것인가, 장애인에게 지원금을 줄 것인가 도로를 확충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고요. 다른 가능성은 없다, 민주주의(와 지금의 제도)가 유일한 가능성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사적 소유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로 이루어진 오늘의 국가가 국가와 사회의 유일한 형식이다, 라는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역사의 진보나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비판 역시 지엽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 좌파가 빠진 난관이자 한계입니다. 당대가  안은 무수한 문제들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개량이나 (심지어 예상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일시적인 처방에 몰두하는 것! 

 

바디우는 그가 속한 나라의 대혁명을 포함한 정치적 사건의 순간들을 종종 언급합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오늘로 돌아오지요. 그가 호명하는 사건의 역사에는 오늘날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순간들, 심지어 악하거나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지는 선택의 순간, 오늘 돌이켜보면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당대에는 그야말로 불가능 그 자체였던 순간들이 존재했습니다. 대혁명부터 시작해 파리코뮌, 가깝게는 68혁명에 이르기까지요. 궁궐에서 광장으로 끌어내 왕의 목을 친다는 것, 노예가 주인과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것, 여성이 집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들이 이와 같지요. 바디우가 여전히 당당하게 자신은 코뮤니스트라고 밝히는, 우리 모두는 코뮤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가 종종 거론하듯 오늘날 바디우가 겨냥하는 불가능성의 끝에는 사적 소유와 이익에 기반하지 않은 관계의 구축에 대한 전망이 있으니까요.

 

바디우는 이전 사건에 대한 충실성과, 그것에서 출발하는 비판을 강조합니다. 이전까지의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은 당대를 이루는 진리의 조건들을 직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현존하는 지배 질서가 사력을 다해 고수하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엉뚱하게 헛힘 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엉뚱한 적을 만들어 놓고서는 허상에다 열심히 총질하는 꼴이지요. 대체로 자욱한 포연 때문에 상황은 좀처럼 명확하게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당대의 질서가 고스란히 지속한다는 점에서 불발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래된 격언을 상기한다면 좋겠지요, 왜 실패했는가?)

 

현실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전망 모두 당대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릇된 현실 인식에서 나오는 비판은 결국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없고, 오판에 기댄 전망은 언제나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바디우가 충실성에 이어 강조하는 이전 사건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 주어진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주 고전적인 의미, 고전적인 방식에서의 작업이지요. 바디우는 무엇보다 정치적 비판은 당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들의 체계가 결국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인류에게, 인류가 가진 역량에 걸맞는 어떠한 살아있는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자, 어쨌거나 오늘 밤은 바디우가 철학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정치와 오늘날 우리가 정치에서 받은 유산인 적이라는 이념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정리합시다. 이 전통에 충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실하게 그 가능성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면서요.

 

 

... (중략) ... 

 

 

대담의 마지막 주제는 다시 철학입니다. 철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조차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 시간에 언급했던 것처럼 시대의 위기와 철학의 위기, 인문 정신의 위기를 슬쩍 묶어서 상품화하는 것도 해마다 돌아오는 봄꽃 노래 유행 같이 흔한 일이 되었고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판적 역량도, 역사를 읽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이나 통찰도 이제 더 이상 철학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전유물은 고사하고 낡은 간판 정도가 어울리겠군요, 배부른 고급 취미 내지는 허영에 눈 어두운 사람들만 붙들어 매는 불 꺼진 간판쯤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무 가혹한가요?

 

오늘날 철학은 세상 곳곳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다지는 것에 매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 생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문의 학문으로서 사유의 규칙 정도를 탐구하고 확증하는 것에 집중한다고 할까요, 이념의 척도로 세계를 재단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순순히, 그리고 조금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군요. 물론 이 옆에는 철학이라는 상품으로 영리를 꾀하는 똑똑한 상인들의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일까요, 이들이 광고하는 철학을 보면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어 보입니다. 

 

어쨌거나 바디우는 이 와중에 고집스럽게 철학의 자리를 고수하고, 그 고유성을 주장합니다. 단순히 사변적인 담론 체계나 학문의 규칙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세계와 관계하고 진리를 담지하는 철학을 말하면서요. 철학이라는 거대한 영역에 대한 자신의 기획을 밝히면서 바디우는, 철학의 중요한 기능으로 ‘동일화(incorporation) 작용’과 ‘공가능(compossibilité) 작용’이라는 두 기능을 먼저 지적합니다.

 

역자가 ‘동일화’라는 역어를 선택한 ‘incorporate’라는 낱말은, 흔히 무언가를 설립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종종 어떤 대상을 포함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개체를 포함하는 상위 단위를 가리키기보다는, 그것을 포함해 어떤 조직을 이룬다거나, 합쳐진다는 의미를 지시합니다. ‘incorporate’의 어원은 라틴어 ‘incórpŏro’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 라틴어에서 이 낱말은 합체하다, 결합시키다, 가입시키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낱말이 포함하는 ‘córpŏro’라는 어근은 ‘합체’라는 역어에서 드러나듯, 대화의 후반부에서 바디우가 진리와 몸(corps)의 관계를 언급할 때 사용하는 ‘몸’, ‘corps’라는 낱말의 어원이기도 하지요. 바디우가 철학의 기능으로 ‘incorporation’을 꼽는 이유, 그리고 역자가 이 낱말의 역어로 ‘동일화’를 선택한 까닭은 철학이 자신의 시대의 진리들을 구축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를 발명하거나, 단순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개념을 포착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진리들을 통합한다는 차원에서요. 

 

바디우가 두 번째로 꼽는 철학의 기능은 공가능 작용입니다. 공가능성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디우의 표현을 직접 빌리자면 ‘진리의 상이하고 이질적인 영역들’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뜻이지요.

 

타르비와 바디우가 대담의 마지막으로 철학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두 사람 모두 철학에서 전달이라는 문제를 중요한 화두로 삼습니다. 타르비는 가장 일반적인 질문이라고 말하면서 철학자와 전달의 문제를 바디우에게 묻고, 바디우는 플라톤과 선의 이데아라는 관점에서 타르비의 질문에 답하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그리고 타르비의 질문처럼) 모든 철학자는 진리와의 주체적 접촉에서 출발합니다. 진리와의 만남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지점이지요. 물론 그 가능성 자체가 특정 개인에게만 한정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진리와 경험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진리와의 조우는 철학자의 개인적인 지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지만, 정작 그 지점은 절대로 전달하거나 공유할 수 없는 의미와 내용으로 이루어진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다루면서 바디우는 <국가>에서 드러나는 플라톤의 입장을 언급합니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진리와의 접촉이라는)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필연성을 경험과 무관하다고 말하면서요.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정치가나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자들이 선의 이데아에만 몰두할 때, 그들은 오로지 선에 이데아에 머무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관심을 갖지 않으리라고 말하면서요. 플라톤은 단순히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해서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그 경험을 사회 일반의 수준에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지배적인 의견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플라톤의 표현대로라면 추측과 ‘억견(doxa)’이 지배하는 세계만이 지속하는 것이지요.

 

사형을 선고받은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입니다. 정확하게 같은 맥락에서 바디우는 철학의 임무이자 역할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곳곳에서 강조합니다. 단순히 집단에서 다수를 이루는 생각, 필연적인 진리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우연한 현재의 지배 질서를 반영할 뿐인 사회적 기준에 단순하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는 방편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요.

 

결국 철학이 제시하는 불가능성은 지배 질서에 대한 불가능성입니다. 지배 질서는 언제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고, 오로지 자신이 행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질서를 고민하는 모든 시도는 곧 타락에 다름 아니지요. 바디우는 기존의 질서와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는 것을 바로 타락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철학은 권력이 불가능이라 선언한 그 경계 너머에 새로운 질서가 가능하다는 것은 사유하고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요. 그가 철학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정치, 사랑, 예술, 과학의 영역은 모두 당대의 진리에서 출발해, 당대의 진리가 불가능으로 선언한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진리를 확증했던 역사의 지층 위에 서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사건을 통해서요.

 

바디우의 마지막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도 잠시 숨을 고르면 좋겠군요. 대담의 마지막으로 바디우는 한 차례 더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이란 무엇인지 생각을 밝힙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무엇보다 자신의 시대를 진단하고, 동시대적 진리에서 출발하는 진리의 개념을 구축하는 것이자, 나아가 참된 삶에 대한 실존적 경험입니다. ‘이 시대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그것의 진리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물음, 그리고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답을 찾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찾고 있으신 중인가요? 바디우는 사실 이 세 가지 질문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말하는군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그렇듯, 생각은 다시 각자의 몫입니다. 언젠가 이 문제를 다시 자세히 다룰 자리가 있겠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11. 21. / 교보북살롱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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