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October 31, 2019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들 가운데는 막상 곰곰이 따져보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분별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이런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런 표현들 가운데는 실제로 그 말의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 물으면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지요. 그럴 때면 대체로 두루뭉술히 비슷한 낱말들을 늘어놓거나, 그 말의 경험적 사례를 열거하는 식으로 엄밀한 개념 정의를 비켜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편으로는 원래 언어의 의미망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구체의 사물을 지시하는 표현의 경우라면 이런 모호성이 도드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과’, ‘우유’, ‘종이’ 등의 낱말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는 꽤나 가깝기 때문에, 생각보다 의미의 틈새가 넓게 벌어지지 않습니다. 사과의 경우라면 ‘풋사과’, ‘홍옥’, ‘국광’과 같이 그것의 세목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낱말을 통해 말과 사물의 관계를 더 좁힐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사과 한 알’, ‘풋사과 한 바구니’와 같이 그것의 특징이나 양을 한정하는 표현을 더한다면 말의 의미는 보다 분명하게 떠오르겠지요.

 

하지만 어떤 정서나 관념을 지시하는 언어의 영역으로 넘어온다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이를 테면 ‘책임’, ‘존중’, ‘학습’과 같은 낱말과 그 용례를 살펴보면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 그 말이 통용되는 상황과 경우, 맥락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책임’이라는 말을 예로 생각해볼까요? 살다 보면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 ‘책임’을 지는 의미와 방식을 두고 종종 오해와 다툼이 생기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책임을 지고’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두고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질타하기도 하지요. 때로 조치의 이행 여부로 책임의 이행 여부를 판가름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의 당사자들 각각이 ‘책임’에 대해 서로 상이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미를 규명하기 어려운 개념들 가운데 ‘사랑’은 어쩌면 가장 정의하기 까다로운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나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개념인 만큼 단순히 언어적 차이만으로 그것의 의미를 명백하게 규정할 수 없으면서도, 시대와 공간에 따라 미묘하게 내포하는 의미와 개념의 외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탐구의 무대를 같은 시대, 같은 공간, 같은 집단으로 한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적으로 사랑이라는 개념은 사랑의 가장 일반적인 양식으로 여겨지는 연인관계에서의 사랑(戀愛)을 비롯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母性愛, 父性愛), 형제나 친구 사이의 사랑(友愛)과 같은 직접적인 대인관계는 물론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에 대한 사랑이나 짝사랑, 헤어진 연인에 대한 사랑처럼 간접적인 대인관계, 그리고 취미나 기호의 대상에 대한 사랑이나 심지어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의 사랑이나 보편적 인류애까지, 사랑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관계의 거의 모든 양식에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나아가 같은 연인관계에서의 사랑이라고 해도 관계에서 서로가 사랑에 대해 가진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으며 나의 어머니가 내게 보이는 모성애와 너의 어머니가 너에게 보이는 모성애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이와 같은 경우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수식어나 보조 관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때그때 필요한 서술로 의미를 부연해야 하는 불완전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까요?

 

사랑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에 앞서 예비 작업으로 어떤 대상을 ‘정의(定義)’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살펴봅시다. 한자어 정의를 그대로 풀어 옮기면 ‘뜻을 정한다’가 되겠지요.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이 말의 의미 역시 동일합니다만,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면 그것의 보다 명확한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정하다(定)’는 ‘집(宀)’과 ‘바름(正)’의 의미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형성문자입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곧 ‘집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의 바른 자리를 정한다’ 혹은 ‘집 안에 사물을 바른 자리에 놓는다’가 되겠지요. 이렇게 보면 ‘뜻(義)’이라는 낱말은 여기에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정 (定)’이라는 의미소만 홀로 쓰여, 무언가를 ‘정’한다는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대상의 알맞은 자리를 어떻게 정하느냐, 바른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한자어 ‘바르다(正)’는 하나를 의미하는 일(一)과 ‘그치다, 멈추다(止)’의 의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곧 ‘하나의 길 앞에서 멈추고 살핀다’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고 무심코 넘어갈 수 있지만, 사실 꽤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무엇을 살펴야 할까요? 갈림길을 앞에 두고 있다면 길목에 멈춰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살펴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길이 하나라면 사실 고민할 것도 없는 게 아닐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바르다’는 하나뿐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나아갈지 돌아갈지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견주는 판단이 아닌 반드시 확실한 것,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내린 결정만이, 대상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위치가 바로 올바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서구의 경우와 비교해볼까요? ‘정의하다’를 의미하는 영어의 낱말은 ‘define’, 불어에서는 ‘définir’, 스페인어는 ‘definir’입니다. 이 낱말들이 유사한 까닭은 모두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단어는 라틴어 ‘defini-’를 기원으로 갖습니다. ‘defini-’는 강조, 완료,  종결을 의미하는 ‘de’와 경계, 영토의 끝을 의미하는 ‘finis’의 합성어입니다. 즉 ‘defini-’는 ‘경계를 확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단어의 원형인 ‘dēfínĭo’에는 지리적 경계를 정한다는 뜻을 물론 시간, 판단 등을 지정하다, 결정하다, 정의하다, 제한하다, 끝내다 등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원 상 영토의 구획과 밀접하게 관련된 표현이지요. 이는 곧 경계를 확정하는 일, 제국의 땅과 그 너머를 구분하는 일, 제국의 규칙이 통용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확인하는 일을 뜻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현대어에도 잘 남아 있습니다. 영어에서 확실한 것, 분명한 것을 의미하는 형용사 ‘definite’은 곧 의미의 경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무한을 의미하는 ‘infinite’는 한계를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것은 본래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에 적용한다면 사랑의 영토와 경계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곧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랑이고 사랑이 아닌지, 무엇이 사랑에 속하는 일이고 어떤 것이 사랑 바깥에 있는 일인지, 사랑의 규칙을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적용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 일이지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이라는 문제 앞에 멈춰 서서 살피고 나아감과 물러섬을 고민하는 일이 될 테고, 유럽의 전통에 비춘다면 사랑의 경계를 확인하고 그것의 영토와 경계를 확정하며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 첫 장에서 사랑을 둘러싼 몇 가지 난점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지적처럼 많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해들이지요. 그에 따르면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을 혼동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프롬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을 받는 것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프롬은 사랑을 마치 숨을 쉬거나 눈을 깜빡이는 것 같이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 여기고, 그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 역시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그저 적절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치부하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놓치고 맙니다. 이를 테면 자신이 왜 번번이 사랑에 실패하는지, 왜 자신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나타나지 않는지와 같은 문제들을요.

 

한편 프롬은 사랑의 시작과 지속을 구분합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것과 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 역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뿐, 정작 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다 어렵사리 만났지만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하는 연인들이나, 연애 초반 불꽃처럼 타오르다 이내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마는 경우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프롬은 이러한 오해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사랑에도 지식과 이론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에 관련한 지식은 오로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과 이론이 필요하지요. 이처럼 프롬은 사랑의 행위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인간의 유적 특성과 그 안에서의 사랑이 무엇인지 탐구를 시작합니다.

 

프롬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로 인간의 자기 의식, 즉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을 갖는 것을 꼽습니다. 인간이 자기자신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인식한다는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불안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자기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과 다른 대상을 구분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속한 세계 및 타자와 자신을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프롬은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결합에 대한 충동이 출발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orgiastic state)’에서 황홀경을 추구하기도 하고, 특정 집단이나 국가 같은 대상에 자신을 일치시키려 하거나 창조적 활동에 매진하기도 합니다. 프롬은 이러한 합일에 대한 추구 가운데 인간적인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을 달성하는 것을 바로 사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프롬은 이러한 융합의 종류를 ‘공서적 융합(symbiosis union)’과 ‘성숙한 사랑’으로 구분합니다. 공서적 합일이란 말 그대로 생명(biosis)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명이 결합되어 있다면 분리는 곧 어느 한 쪽이나 양쪽 모두의 죽음으로 이어지겠지요. 프롬은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 수동적 복종의 관계나 가학, 또는 피학 음란증 등이 이런 관계의 사례로 보고 있습니다.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들은 상호 기생적인 관계이거나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 의존적인 상태로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서로에게 의존적인 방식의 융합이 아닌, 개체성을 온전히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기 때문이지요. 

 

프롬은 사랑을 수동적인 감정이 아닌 능동적인 활동으로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역량의 문제가 중요하겠지요.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받고자 하는 욕구보다는 주고자 하는, 줄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한 활동입니다. 프롬은 성숙한 사랑은 반드시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의 네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역설하며, 사랑에 있어 이 요소들이 연결고리를 이루는 지점을 제시하지요. 이에 따르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보호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상을 아끼고 보호하기 위한 자발적인 책임이 보호와 관심에 뒤따릅니다. 한편 보호와 책임은 자칫 대상의 개체성을 파괴하고 그것을 지배와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 우려가 있는데, 대상에 대한 존중은 사랑이 지배와 소유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치와 같은 기능을 수행합니다. 대상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을 잘 알아야겠지요? 그래서 프롬은 사랑에는 존중을 위한 지식, 알고자 하는 노력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프롬은 사랑의 대상을 기준으로 사랑을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이들 각각은 동등한  관계에서의 사랑, 불평등한 관계에서의 사랑, 배타적 관계에서의 사랑,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근간으로서의 사랑, 종교적 사랑을 의미하지요. 흔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프롬 역시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제시합니다.  프롬은 사랑을 어떤 사람이나 대상과의 관계가 아닌 한 인간이 세계 전체를 대하는 태도이자 성격의 방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기 의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하나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결국 자기 의식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대상인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사랑이라는 형식을 취하지 못한다면 다른 대상에 대한 태도 역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지요.

 

프롬은 어린아이의 사랑이 따르는 원칙과 성숙한 사랑이 따르는 원칙을 구분하여 제시합니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을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므로 사랑받는다’는 원칙을 따르지요. 또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는 원칙을 따르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따른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대조로군요.

 

사랑에도 지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프롬은, 이제 현대 사회에서 왜 진정한 사랑이 찾아보기 어려운, 드문 현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탐구로 넘어갑니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희귀한 현상이 되었고, 사이비 사랑이 진정한 사랑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일종의 능력이라면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특성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영향 아래에 있을 것이다’라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서양 현대 문명의 주요 특성에 대해 간단하게 고찰해볼 것을 제안하지요.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현대 서양 사회’라는 개념은 너무 덩치가 큰 개념입니다. ‘현대 서양 사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몇 가지 대표적인 시도들이 있긴 합니다. 19세기 중반 학문이 총체적 탐구의 대상으로 사회에 눈을 돌린 이후, 시대와 사회를 규명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요. 저 유명한 마르크스의 <자본>이나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가 현대 사회의 핵심으로서 자본주의를 탐구했다면, 슈미트는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를 통해 제목 그대로 자유주의와 의회민주주의라는 근대 정치의 핵심 개념이 당대에 어떤 상황에 이르렀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19세기 크게 유행한 이래 근본적인 비판에 직면합니다. 탐구의 대상 자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임의적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대상에 대해 ‘객관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식을 생산하기 어렵고, 그나마 탐구의 결과물 역시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격의 내용이 아닌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또 대상의 역사적 맥락이나 특정한 상황에 기댄 설명은 그것에 대한 유일한, 특수한 설명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지식의 효용에 대한 물음, 즉 ‘그 지식을 통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있어 가치를 갖기 어렵다는 비판 역시 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칫 독단주의로 흐르거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거나, 하나의 기술(descriptive) 체계에 불과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지요. 때문에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사회학 연구 역시 과학의 일반적인 방법론을 따르는 것이 보다 보편적인 접근 방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물론 몇 가지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탐구를 모두 무용한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을 자본주의로 보고,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고찰에 집중했던 연구들은 무시하기 어려운 성과들을 간직하고 있지요. 당시의 연구들은 오늘날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고향이자, 지금도 여전히 일종의 출발점으로 기능하고 있으니까요. 프롬 역시 이러한 탐구에 기대고 있습니다. 프롬이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은 희귀한 현상이 되었다고 주장할 때, 그가 생각하는 ‘현대 서양 사회’란 바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프롬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이비 사랑이 진정한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이비 사랑이 범람하는 이유를 인간의 ‘소외’에서 찾고 있지요. 이 소외는 바로 자본주의의 결과물입니다.

 

소외(Entfremdung, Alienation)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은 물론 마르크스입니다. 1844년 파리에 체류하던 마르크스는 경제학과 철학에 대한 저술을 작성합니다. 흔히 ‘파리 수고’, 내지는 ‘1844년 수고’로 불리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가 바로 그 저술입니다. 초기 마르크스 저술 가운데 사상적, 문헌학적으로 가장 많은 논란과 관심을 일으킨 저술이기도 합니다.

 

총 3개의 원고로 이루어진 전체 저작의 1부 마지막에서,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이라는 접근을 통해 소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분석합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소외는 무엇보다 노동과 관련 있는 개념입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 봉건사회에서의 노동과 달리 소외된 노동을 이룬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노동은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요. 

 

천천히 살펴봅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전까지 인간의 노동은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이었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활동이자, 자연을 가공해 인간 세계로 포섭하는 활동이었지요. 당연히 더 많이 노동할수록, 더 많은 가치가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는 이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상품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로 대체됨에 따라, 노동자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수록 상품의 가격은 하락하고, 따라서 상품의 가치 역시 하락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러한 조건 속에서 결과적으로 노동의 가치 역시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의 결과물로서 상품의 가치가 곧 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 하락은 노동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면 노동하는 인간, 즉 노동자의 가치 역시 함께 떨어지게 되지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단순히 어떤 상품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를 상품으로 생산하고 노동자 자기 자신 역시 상품으로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소비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상품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이 원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못하고 자본가가 원하는 방식의 노동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이 과정에서 인간적 삶의 조건인 자연과 세계에 자신의 역량을 투사하여 능동적으로 삶의 영역을 구축하는 활동인 노동의 본래 의미가 변질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며, 결과적으로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에 처하게 됩니다. 즉 자본주의적 노동 속에서 상품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의 유적 특징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라는 사중의 소외가 연쇄하는 것이지요.

 

프롬이 기대고 있는 소외는 바로 이러한 개념입니다. 앞서 프롬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으로 분리와 고독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자기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간은 고독을 자신의 근본 조건으로 갖습니다. 프롬은 이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욕구라고 보고 있지요. 고독이라는 인간의 조건, 그리고 소외라는 현대의 조건을 결합해서 생각해보면, 인간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현대의 특성 속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롬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타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면서도 아주 고독한 상태에 처해 있고,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하지 못해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결과에 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대 서양 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진단한 뒤, 프롬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태를 통제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인간의 눈을 가리는 기제들이지요. 

 

프롬은 먼저 기계적으로 엄밀하게 조직화된 노동을 제시합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거대한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결합과 합일에 대한 욕구를 기만적으로 상쇄하고, 다른 한편 끊임 없이 강요된 노동을 통해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 자신이 지닌 상황이나 욕구들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프롬이 지적하는 두 번째 사회적 장치는 규격화된 오락입니다. 바로 수많은 즐길 거리들이지요. 프롬은 오늘날 인간의 행복이 ‘무언가를 즐기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즐기는 것은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소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요.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현대 사회의 특징은, 인간적인 관계 역시 즐길 대상, 교환하고 소비할 대상으로 만들고 맙니다. 프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사랑은 사라지고 두 사람만의 친밀함과 이기심으로 구성된 휴식처로서의 사랑, 일종의 ‘팀’을 이루는 것처럼 필요와 규칙에 의해 맺는 관계만이 남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현대 서양 사회의 특징에 대해 개괄한 뒤 프롬은, 진정한 사랑의 자리를 대체한 사이비 사랑의 유형을 분류하고 각각의 특성에 대한 고찰을 시도합니다. 앞서 살펴볼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랑의 기술>에서 프롬은 주로 상황에 대한 전제적(前提的) 진단을 내린 뒤, 진단 속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범례를 제시하고 다시 범례의 정의와 내용을 해명하는 방식의 설명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범주를 제시하고 분류하는 방식은 물론 사례를 일반화하는 오류의 가능성과 대상을 범주로 재단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가 잘려나갈 수 있다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나 현상을 범주를 따라 쉽고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지요.

 

프롬은 사이비 사랑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성애적 사랑, 제휴적(collaboration) 사랑, 신경증적 사랑으로요. 그리고 신경증적 사랑은 다시 병리적 사랑, 우상숭배적 사랑, 감상적 사랑, 투사적(projective)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하나씩 살펴볼까요? 먼저 성애적 사랑은 사랑을 전적으로 성적 욕망에서 유래하는 관계로 보거나, 사랑의 의미를 성적 쾌락에서 찾는 관계입니다. (프롬은 성애적 사랑을 다루며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성적 욕망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을 길게 언급하는데, 이 비판이 얼마나 타당한지,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성애의 개념을 프롬이 과연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사실 꼼꼼히 한번 따져볼 노릇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남녀 두 사람만의 친밀함과 이기주의에서 비롯하는 배타적 관계’나 결혼이라는 결합 방식에 대한 과장된 강조를 낳기 쉽지요. 무엇보다 이러한 사랑은 자신의 쾌락에 사랑의 근원을 두는 만큼 근본적으로 자아도취적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휴적 사랑은 무엇보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이 사라진 빈 자리를 잠식한 대표적인 사이비 사랑의 유형입니다. 프롬에 따르면 제휴적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공통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두 사람의 결합, 또는 협동의 산물로 대체합니다. 각자가 욕구를 어느 정도 배제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것이지요. 제휴적 사랑은 성애적 사랑과 함께 현대 사회의 표준적 형태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신경증적 사랑이 있습니다. 프롬이 정의하는 신경증적 사랑은 다분히 정신분석학적 연구들에 기대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 심리의 병리적 특징과 그 근원을 주로 그 개인적 경험, 특히 부모에 관련한 유년기의 경험에서 찾습니다. 특히 이 시기의 경험이 개인의 성품이나 심리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지요. 프롬에 따르면 신경증적 사랑은 이 시기의 경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인에게서, 아내나 남편에게서 자신의 결핍이나 왜곡된 욕구를 충족하려 드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경증적 사랑의 유형에는 이러한 병리적 사랑 외에도 우상숭배적 사랑, 감상적 사랑, 투사적 사랑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적 사랑은 주로 미성숙한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경험입니다. 사랑하는 대상과 실제로 사랑이라는 능동적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 대상을 우상화, 즉 대상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여 자신의 생각 속에서 점점 위대한 존재로 만들고 그 ‘대단한 존재’에 대한 사랑에서 만족을 찾는 유형이지요. 감상적 사랑은 상상이나 환상 속에서 감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이를 테면 드라마나 영화, 유행가 가사 속에서 사랑을 찾고 경험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투사적 사랑은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외면하고 끊임 없이 상대방이나 다른 대상에게 자신의 문제를 투사하는(project)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겠지요.

 

프롬에 따르면 사이비 사랑을 부추기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궁극적으로 사이비 사랑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랑에 대한 무지가 되겠지요. 책의 서두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에 대한 혼동이나 사랑의 능력이 아닌 사랑의 대상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착각, 또 이번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 사회의 특징에서 유래하는 원인도 있겠습니다. 사이비 사랑을 다루며 프롬은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한 가지를 더 언급합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갈등이 전혀 없는, 전적으로 만족스럽고 완벽하게 편안한 상태로 오해한다는 것이지요. 프롬이 보기에 사랑은 단순히 기쁨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 경험을 통해 타자와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일체가 됨으로써 함께 성장하는 능동적 활동입니다. 무슨 주례사 같군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두 사람이 함께 …’ 하는 상투적인 주례사 구절처럼, 프롬에 따르면 ‘함께’가 중요한 것이지, 기쁨이나 안락함, 만족, 행복 등은 모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프롬은 이러한 사이비 사랑,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는 거짓 사랑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이론적 측면을 다뤘으니 이제 더 힘든 문제, ‘사랑의 기술을 실제로 활용하는 것’을 다루겠다고 선언하며 논의의 마지막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이지요.

 

 

... (중략) ... 

 

 

프롬이 자신의 제목에서 사용하고 있는 ‘art’라는 단어는 흔히 ‘기술’보다는 ‘예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실 이 낱말에는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옥스포드 사전은 ‘art’를 ‘인간의 창의적 활동이나 상상의 표현 또는 응용으로, 회화나 조각 같이 어떤 근본적인 아름다움이나 감성적 효과를 산출하는 작품 활동’으로 정의하는 한편, ‘수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는 특정한 일을 수행하는 기술’이라고도 정의하고 있지요. 이 낱말은 라틴어 ‘ars’에서 유래합니다. 라틴어 ‘ars’ 또한 굉장히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술, 예술, 솜씨, 재주와 같은 의미는 물론 재능이나 소질을 가리키기도 하고, 전문적인 지식이나 직업,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라틴어 ‘ars’는 고대 그리스의 ‘τέχνη(tekhnē)’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낯이 익은 단어지요? 이 단어는 현대어에서 기술을 의미하는 ‘technic’이라는 단어 속에 살아 있습니다. 현대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기술’이라는 개념이 별개의 단어로 분화했지만, ‘art’라는 본래의 낱말은 이처럼 원래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τέχνη(tekhnē)’라는 개념의 가장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기예(技藝)’일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은 이 단어를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 닦은 기술이나 재주’라고 정의하고 있지요.

 

‘art’라는 단어의 의미 역시 이와 같습니다. 단어 속에 기술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일반적인 기술, 이를 테면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거나 ‘교육원에서 봉제 기술을 배우다’, ‘기술이 부족하다’와 같은 표현에는 ‘art’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요. ‘art’가 기술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오로지 그 기술이 고도로 숙련되어 세련되고 완숙한, 아름다울 정도로 탁월할 때입니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 역시 이와 같겠지요. 그의 말처럼 인간은 세련되고 완숙하게, 아름다울 정도로 탁월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10. 31. / 교보북살롱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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