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과 삶

October 18, 2019

로베르토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세 인물, 클라리세와 발터, 울리히는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울리히는 클라리세와 발터 부부의 집에 방문하는데, 울리히가 이들의 집을 찾았을 때 이들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피아노 앞에 함께 앉아 연탄하는 모습은 어쩌면 퍽 다정하고 우아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울리히에게 있어 피아노는 그저 그가 끔찍할 만큼 싫어하는 요소들의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는 한심한 작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울리히는 피아노 소리를 두고 ‘으르렁거리다’, ‘고함치다’, ‘울부짖다’, ‘포효하다’ 등의 표현을 사용는데, 그가 울부짖는 포효라는 표현을 그리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어느 독자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울리히의 눈에 비친 피아노의 모습은 커다랗고 흉측하게 입을 벌린 땅딸막한 우상이자 닥스훈트와 불도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 같은 기괴한 잡종이고, 피아노의 건반은 이 흉측한 짐승의 벌거벗은 이빨에 불과합니다. 말 그대로 꼴도 보기 싫다는 표현에 꼭 맞게, 울리히는 피아노가 보이는 곳이라면 옆에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피아노를 대단히 싫어합니다.

 

반면 클라리세는 남편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일 만큼 음악을 좋아합니다. 울리히가 음악을 의지의 패배이자, 정신의 혼란이요, 현실에 대한 무시라고 생각하는 것과 대조적으로요. 무질의 소설 속에서 클라리세는 사형을 언도받은 한 살인자를 구제하기 위한 소송에 뛰어드는데, ‘그 사람은 마치 음악과 같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클라리세는 살인자의 사면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데, 당연히 친구 울리히에게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울리히는 매번 냉담하게 거절하지요. 물론 울리히 역시 이 살인자의 사형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또한 살인자의 억울한 사정에는 얼마간 공감하고 있지만, 그저 변호인들의 서정적인 태도를 견딜 수 없었던 것 뿐이지요. 

 

이들 친구 사이의 의견 차이, 혹은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닌 극복할 수 없는 불화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갈등과 다른 어떤 지점을 환기합니다. 오랜 기간 가깝게 사귄 친구 사이임에도 이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냉담함과 적대감은, 근본적으로 자의적이며 설명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냥' 싫은 겁니다, 별 이유 없이. 피아노를 못 쳐서 싫은 것도 아니고 나는 피아노를 못 치는데 너만 잘 쳐서 싫은 것도 아니고 너가 피아노를 밤중에 쳐서 싫은 것도 아니고 이른 아침이라 싫은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곡들을 연주해서 싫은 것도 아니고 똑같은 곡만 자꾸 연주해서 싫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오늘만 듣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피아노가 싫은 것이지요, 울리히의 입장에서는. 아마 클라리세의 입장은 정확히 반대편에 성립할 겁니다. 피아노가 좋고 음악이 좋은 거예요, 그냥. 울리히가 피아노 소리를 ‘영혼에 직접 입을 대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과 같다고 느낄 때, 클라리세는 아마 영혼이 직접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피아노에서 받을 겁니다. 

 

이러한 불화는 어떤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차이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원인 없는 현상은 없으니, 그렇다면 불화의 원인이 단순한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차이와는 어딘가 다른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겠지요. 쿤데라는 미학적 태도에 따른 차이를 이러한 불화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미학은 단순히 어떤 예술 작품이나 예술의 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명칭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는 근본적인 정조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희극적인 것이나 비극적인 것, 저급한 것과 고귀한 것, 근엄한 것과 상스러운 것, 일상적인 것과 파격적인 것 따위의 경험과 수없이 마주치는데, 이러한 삶의 면모들이 일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로가 바로 미학이기 때문이지요.

 

일상에서 마주치는, 동시에 일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자극들은 모두 인간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합니다. 행위의 정도나 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요청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을 포함해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볼 것, 목덜미를 움츠리는 것, 미간이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피식 실소를 흘리는 것 또한 일종의 행위라고 볼 수 있지요. 복잡한 사고와 판단을 요구하는 행위가 있는가 하면 외부 자극을 지각한 순간 거의 무의식적, 비의지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반응이 행동으로 이행하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서사 예술은 기본적으로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행위 없이는 사건도 없고, 행위 없는 삶도 없으니까요. 헤겔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가 갖는 의미가 가장 도드라졌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입니다. 행위의 면면이 기록에 남은 도시 국가의 영웅들은 물론, 도시 국가의 백성들까지도 상황에 따라 본인의 의지를 행위로 옮길 수 있었으니까요. (고대 도시 국가에서의 정치 권력과 일반 시민의 자유, 혹은 고대 정치에서 권력과 통치의 문제는 흥미로운 논점들을 잔뜩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자세히 다룰 자리가 다시 있을 겁니다.) 고대 도시 국가에서 행위는 행위자 개인의 특성을 지키는 장치이자 그것이 드러나는 계기였고, 인간사를 이루는 행위들이 최대로 드러난 결과 서사시라는 장르가 만개할 수 있었습니다.

 

헤겔은 서사시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이 시절은, 자신의 당대와 비교합니다. 이제 개개인의 행위가 아닌 조직과 법률, 재판, 행정, 관청, 경찰 등이 국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대 도시 국가에서 개인은 자신이 따를 규범으로서의 도덕과 윤리를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위했던 반면, 이제 도덕은 외부에서 개인에게 부과되는 규범으로서의 성격을 훨씬 더 강하게 갖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그것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제 개인의 행위는 자신의 개성보다 외부 세계에 기인하는 익명의 의지들에 의해 훨씬 더 많은 제약을 받는 상황에 놓입니다.

 

소설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전까지의 서사 예술과 마찬가지로 소설 또한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서사시에서 행위가 인물의 개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자 사건을 끌고 가는 동력이고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나는 장면을 구성하는 반면, 소설에서 행위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행위의 근간에 있는 규범이 더 이상 행위자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때, 행위자는 단지 외부 규범에 복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때, 심지어 그 자신은 자신이 외부 규범을 따르고 있다는 의식조차 갖지 않고 있을 때, 그러니까 아무런 반성이나 자각 없이 관습적이고 기계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때, 즉 어떤 것을 행위로 옮기고 있는 것에 불과할 때, 그리고 그의 일상이 이런 수준에서 행위라고 할 수 없는 ‘동작’으로 이루어질 때,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 (중략) … 

 

 

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지난 18세기 이래 거의 전방위적인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일찍이 헤겔은 ‘미학(aesthetics)’이라는 용어의 한계에 대해 불만을 표하면서도, 이전까지의 논의들이 이 용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만큼 자신 또한 여기에 관련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 부득이 미학이라는 범주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투덜대면서 미학 강의를 시작하기도 했지요.

 

가장 기본적인 사실부터 확인합시다. 주변에서 흔히 예술의 기원을 태고의 동굴 벽화나 원시인의 춤사위에서 찾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예술, 즉 순수한 예술을 가리키는 개념인 ‘fine art’나 ‘beuax-arts’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부터입니다. 즉 많은 경우 ‘미술’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활동은 그야말로 근대의 산물인 셈이지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순수 예술, 즉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발생한 것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독특한 현상으로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 지극히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입니다. 잘 알고 계신 것처럼 예술, 즉 ‘art’나 ‘kunst’의 개념은 라틴어 ‘ars’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ars’는 그리스어 ‘τέχνη’의 번역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것은 자연의 내부에서, 때로 자연을 거스르며 살아남을 수 있는 기예나 궁리를 가리키는 개념이었지요. 많은 경우 이러한 활동은 오락이 장식의 형태를 띠었지만, 결코 오락이나 장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연 안에서, 자연에 거슬러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기예란 곧 특정한 방식의 삶의 양식이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지요.   

 

시간 관계상 부득이, 아주 간략하게 뼈대만 추릴 수밖에 없어 아쉽지만, 이 예술로서의 기예의 의미가 인류 역사에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간단히 살펴봅시다. 알랭 바디우와 같은 특수한 경우라면 기예 담론의 기원을 플라톤까지 거슬러 책정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기예 담론의 시원으로 보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접근일 겁니다. 그에 따르면 이 기예는 무엇보다 자연의 모방입니다. 자연 안에서, 자연에 거슬러 살아남기 위해 자연의 어떤 지점들을 흉내내는 것이지요. 동물로서 인간의 삶은, 인간이 수행하는 특정한 행위에 있어 다른 동물들의 탁월한 능력들을 흉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인간 세계에서는 오락이나 장식적 의미에서의 기예 또한 얼마나 자연을 잘 모방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고요. 기예는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는 이러한 관점은 대체로 큰 변화 없이 17세기까지 기예론의 핵심에 자리합니다.

 

17세기쯤 도착하면 변화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종교개혁을 거치며 근대 정신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조금씩 태동하기 시작했고, 베이컨과 데카르트 같은 선구자들은 본격적으로 세계관의 변화를 모색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기예와 자연은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들은 ‘자연 내에서, 자연에 대해서’라는 고대의 관점에 대체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계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도 자연의 물리 법칙을 따르는 일종의 동물-기계이며, 따라서 이들의 활동 또한 자연이 허용한 법칙 아래에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입니다. 기예 활동에 따라붙는 인격이나 정서적 작용들은 오히려 기예의 탁월함을 방해할 뿐이므로, 기술적 요소들이 활동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들에 뒤이어 등장한 라이프니츠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예를 신적 자연에 대비시킵니다. 단적으로 신적인 자연은 무한하고, 그 가운데 인간의 기예는 유한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와 같은 관점으로 기예 담론에 접근할 경우,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기예 그 자체보다는 무한한 자연의 신적 본질을 해명하고, 유한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무한한 세계를 다룰 것인가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단순히 인간이 제작한 사물은 물론 관념과 사고, 법이나 제도 등에 대한 고찰도 이 수준에서 다루어지고요.

 

칸트, 그리고 실러나 셸링에 이르면 자연과 기예의 관계가 다시 변화합니다. 이들의 관점을 단적으로 요약하면, (신적) 자연은 무한하고 기예는 유한하지만, 예술가나 예술 작품은 유한하면서도 그 안에 무한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도가 되겠군요. 그러니까 유한하고 개별적인 것이, 무한하고 보편적인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칸트의 중요성이야 뭐 어느 방면에서 접근해서 얼마나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기예 담론, 즉 우리가 다루고 있는 미학의 기원과 변천사를 살펴볼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과 함께 비로소 오늘날의 근대 예술이라는 개념이 태어났으니까요. 

 

이전까지 자연의 모방물 내지는 자연의 열등한 모방물, 혹은 신적 자연의 무한성에 대비되는 유한하고 제한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았던 이 기예라는 활동과 그 산물이, 비로소 자연에 준하거나 자연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활동으로 격상된 겁니다. 이러한 관점이 먼저 성립한 이후에야 포도 한 송이에 대한 빼어난 묘사는 단순한 하나의 포도를 넘어 보편적인 미의 경험을 창출하는 활동이 될 수 있고, 구체적인 고유명을 가진 특정한 개인에 대한 묘사는 단순히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기예의 산물, 예술 작품이 갖는 보편적 의미의 차원을 확보한 것이 왜 그토록 인류에게 중요한가 하면, 이 발상이 등장한 이후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결정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예의 경험이 단순한 수준에서 생존술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생존술의 차원은 기본적으로 무한한 자연 앞에서 상대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면, 그나마 이 생존술의 경험 또한 사적 개인의 차원에 국한된다면 기예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질문을 바꿔 봅시다. 기예라는 것이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생존술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이제까지 신과 자연 앞에서 유한한 존재였던 인간이 이 기예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사적 개인의 차원에, 어느 특별한 한 사람의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가능하다면 어떨까요?

 

이 활동을 통해 개인적이고 특수한 경험을 보편적인 의미의 차원에 정초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이 활동으로 무한을 획득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에, 즉 이제까지 인간 앞에 놓여 있던 조건 속에 근본적으로 속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로 이 기예를 통해, 예술을 통해!

 

시간을 건너뛰어 20세기로 돌아올까요, 바디우는 이 활동의 산물들을 작품들, 그러니까 단수로서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동일한 근본 속성을 공유하는 체계로서 복수의 작품들이라고 지칭합니다. 작품들이 중요한 까닭은 이들이 일종의 주체성을 이루기 때문인데, 바디우는 이러한 맥락을 가리켜 주체성의 구성(configuration)이라고 일컫습니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작품을 듣거나, 듣고자 시도하는 사람은 이를 위해 먼저 자신의 특수한 청취법을 작품에 맞춰 바꿔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듣고자 하는 작품이 존재하기 이전까지 ‘자신의 듣는 방법’이 어딘가로부터 유래한 특수하고 고유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지각하기 못했지만, 새로운 작품들은 언제나 그에게 새로운 방법의 취득을 요구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작품이 작품으로서 새롭다는 징표이기도 하고요. 이 경험 앞에서 듣는 사람은 이전까지 그가 가졌던 것과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해서만 새로운 작품을 들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작품들이 창조하는 새로운 주체성 안으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즉 이전까지 자신의 주체성을 이루고 있던 자신의 개별성을 작품의 요구에 맞춰, 작품이 요구하는 그것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술 작품들이 주체성을 구성한다고 할 때, 주체는 새로운 청중을 창조하는 것이지 단지 작품 자체나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작가를 가리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예술일지도 모르겠네요?”라는 질문을 받자, 주저하지 않고 “결단코 맞다"고 즉시 대답합니다. 물론 푸코의 대답은 바디우의 주장보다 앞서지만, 우리에게 시간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이 간격을 뛰어넘어 오갈 수 있습니다. 예술이 인간을 만든다니 어쩐지 낭만적으로까지 들리는 표현입니다만, 푸코의 무시무시한 통찰에 따르면 이 예술은 다름 아닌 ‘규율 권력’입니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작동하는 권력의 작동 원리가 곧 예술이라는 것이지요. 푸코에 따르면 사회는 규율 권력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표적인 규율 장치인 학교, 군대, 감옥, 대중 매체를 포함해 모든 규율 권력은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훈련’ 시킵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는 신체적으로 숫자와 계산에 길들여집니다. 단순히 산수를 못하면 벌을 서거나 매를 맞는 의미에서의 신체가 아닌,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사고하고 분류하는 모든 행위의 바탕이라는 의미에서의 신체입니다. 숫자와 계산을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경험을 숫자로 범주화하는 방식과, 연산의 습득을 훈련받고 있는 겁니다. 이 과정은 반복을 통해 시행될 수밖에 없겠지요. ‘3이라고 쓰시오’라는 규율 앞에서 ‘3’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반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3’이라는 숫자가 왜 셋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셈하듯 헤아려야 하는지에는 사실 근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기표와 기의의 괴리,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근거가 없는 최초의 전제를 가르치는 일은 감성적인 반복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미학이 새겨지고 작동하는 차원이 개인의 가장 내밀한 내면일 수밖에 없고, 규율 권력이 특정한 유형의 주체를 생산하는 차원 또한 내면의 최심층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에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근거 없어 보이는 이 지점이 바로 미학이 자리하는 차원이자 작동하는 지점, 울리히가 피아노에 타오르는 적개심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클라리세가 연쇄 살인범에게 뜨거운 연민을 느끼는 접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울리히와 클라리세뿐 아니라 우리 또한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바로 이 기예, 교육과 정치라는 예술을 통해 형성된 특정한 주체로서요. 미학 담론의 전환은 이렇게 18세기 근대 혁명과 중요한 근친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던 시절부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지점까지 실은 깊숙히 과거의 자식들인 셈인데, 이 과거의 이름이 바로 기예, 즉 예술인 것이지요. 

 

기예의 이러한 측면, 미학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해명하는 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닌 관계로 다음 자리를 위해 남겨 두지요. 다만 우리는 예술에 의해 만들어졌고, 우리는 예술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정도를 강조해서 덧붙여 두겠습니다. 우리는 만들어낸 것이 특정한 훈련의 형식이라면, 그리고 그 훈련이 기왕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면’ 이 형식은 또한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질 수 있을 겁니다. 돌고 돌아 예술을 변혁해서 인간을 변혁한다고 소리치고 있는 랭보 무리들 사이에 도달한 것 같군요. 우리가 획득한 이 기예가 본래 이런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미래에 대한 예술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앞 세대가, 혹은 그들 가운데 일부가 엉망인 꼴을 보였다고 해도, 기왕에 이 기예의 실천의 본바탕이 달라지지 않은 이상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내어 우리 자신을 만들 것인지 경쾌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10. 18.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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