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성의 의식

October 10, 2019

형식이나 화성, 선율 구성 등이 베토벤의 그것과 아주 비슷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한 현대 작곡가가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 대단히 빼어난 솜씨로 이 곡을 완성했습니다. 만약 진짜로 베토벤이 작곡한 곡이었다면 저 유명한 베토벤의 소나타들 사이에서도 걸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요. 그러나 그 곡이 베토벤의 작품과 꼭 닮았을 만큼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현대 작곡가가 쓴 작품인 이상 누구도 그것을 걸작이라고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베토벤을 닮은 곡을 만든 작곡가에게 돌아갈 찬사 또한 베토벤이 받는 그것과 달리, 기껏해야 모방의 달인이라는 찬사 정도겠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소나타에서 즐거움과 감동을, 미적 쾌락을 느끼고 있을 텐데요. 똑같은 작품인데 베토벤이 만든 곡은 걸작이고 현대 작곡가가 베토벤처럼 만든 곡은 걸작이 아니라면, 작품이 자아내는 미적 쾌락이 작품 내적인 원리, 이를테면 형식이나 화성, 선율 따위와는 별개로 그저 작곡가가 누구인지에 달려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미적 감각은 작품이 아닌 작가 개인이나 창작 시기를 대상으로 작동하는 감각일까요? 이런 태도는 어쩐지 위선적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래서야 어디 작품의 감동이나 아름다움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간과 역사성, 일련의 특징들이 이루는 연속성에 대한 감각은 인간 의식에 거의 내재적인 것만 같아서, 어떤 대상을 시대착오라고 판단하는 것 또한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니까요. 인간의 눈에는 모든 것이 역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일련의 사건과 태도 그리고 작품들의 논리적인 연쇄로 나타납니다. 예컨대 유행처럼 바뀌는 사람들의 옷 차림새를 떠올려 보십시오. (유행을 따르는) 모두가 다리에 딱 달라붙는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너나없이 나팔 주둥이처럼 밑단이 넓게 벌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지요. 방금 전까지 유행의 첨단이었던 것처럼 보였던 어떤 스타일은 바로 다음 시절로 넘어가자마자 가장 촌스러운 스타일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바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또 유행이 돌고 돌아 언젠가 과거의 차림새가 다시 유행할 때가 있겠지만, 단순히 옷장에서 옛날에 입었던 그 모양 그 바지를 그대로 다시 꺼내어 입으면서 유행에 부합하길 기대하는 것은 거의 요행이나 다름 없습니다. 유행은 돌아오지만, 언제나 조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요.  

 

예술 작품들이 이루는 일종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쿤데라는, 연속성을 이루는 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의 역사는 연대기를 갖지 못한 거대한 작품 창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개별 예술 작품의 미적 가치가 인간에게 지각되는 것은 오직 역사적 진화의 맥락에서라고 덧붙이면서요. ‘한국의 역사’와 ‘영국의 역사'라는 두 표현에서 ‘역사’의 개념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과학의 역사', ‘예술의 역사'와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다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역사는 그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건의 축적을 의미할 뿐입니까? 위대한 의사 A가 어떤 위장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발견했다고 해봅시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뒤 의사 B는 A의 발견을 바탕으로 마침내 그 위장병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치료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다음 의사 C는 의사 B가 발명한 치료법보다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만들어냈고, 그리하여 의사 B가 만들었던 치료법은 이제 폐기되고 망각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볼 수 있지요. 과학의 역사는 이처럼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 아닌, 진보라는 특징을 분명하게 갖습니다. 

 

반면 예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술의 역사도 과학처럼 진보를 매개로 이루어질까요? 예술에서 역사의 개념은 진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설령 예술에 사용되는 기술이라는 문제는 과학에서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흐르며 진보했을 수 있겠지만, 예술 자체는 진보와 무관합니다. 톨스토이의 발견이 발자크의 작업을 폄훼하지 않으며,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다고 해서 <안나 카레리나>의 의미와 중요성이 사라지는 일 또한 생기지 않습니다. 예술의 역사는 완성이나 개선, 향상, 발전을 함축하지 않으며, 소설가의 목표는 자신에 앞서는 다른 작가들을 뛰어 넘어 단순히 그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글을 잘 쓰는 것, 혹은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보이는 측면이 있다손 치더라고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의미에서에 불과하지요. 소설가의 야심은 어디까지나 다른 작가들이 보지 않았던 것을 보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 말하는 것에 있습니다. 발자크가 인간 군상의 사실적 생활상을 고스란히 소설이라는 무대 위로 옮겨 놓으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톨스토이가 인간사의 틈새를 이루는 행위의 비합리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프루스트가 현재에 침투해 현재의 의미를 구성하는 과거라는 시간을 포착한 것처럼요. 

 

 

… (중략) …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후대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모습의 인물들을 묘사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돈키호테는 누구입니까? 돈키호테와 산초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들 또한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아킬레우스와 아이네아스의 노래를 그렸던 것처럼, 이들의 대화 또한 정확하게 작품안에서, 작품의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들의 모습 또한 아킬레우스와 아이네아스의 모습처럼 ‘후대를 위한 모범'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요? 과장된 풍자극의 성격을 가진 <돈키호테>가 소설의 역사에서 시원을 이루는 까닭이 바로 이 대화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돈키호테 자신은 따라야 할 모범에서 제외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새로운 글쓰기 방식’은 모범을 위해, 전범적 장면을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기록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애초부터 아닌 것이지요. 

 

낭만주의 시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생트 뵈브는 ‘지나칠 만큼 선이 너무나도 없다'는 이유로 <마담 보바리>를 비판합니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독자가 쉬어갈 수 있을 만한 훌륭한 장면이, 독자를 위로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혹평하지요. 조르주 상드 또한 거의 같은 비난과 훈계를 플로베르에게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독자에게 위안을 주려는 반면, 플로베르의 작품은 독자에게 고뇌를 안겨준다고요. 왜 독자에게 고뇌를 안겨주는지, 예술은 단지 비평이나 풍자가 아니지 않냐는 상드의 훈계에 대해 플로베르는 말합니다. 자신은 독자에게 자신의 판단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비판과 풍자를 의도한 적도 없고, 다만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글을 쓸 뿐이라고요. 그러니까 이들의 비난이 성립한 까닭은 이들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고작해야 소설의 역사에서 곁갈래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플로베르의 작품을 오해한 까닭은 플로베르라는 개인의 성격이나 특징이 아닌,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수세기 동안 회화와 음악은 교회에 봉사했지만 그 사실이 교회에 바쳐진 회화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령 아무리 고귀한 권위라고 하더라도, 부국강병이나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소설이 소설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릴기 어렵습니다. (굳이 억지로라도 찾아 붙인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끔찍한 참고 사례로서 갖는 가치 정도겠지요.)

 

소설의 인물들은 그들의 미덕 때문에 찬양받기를 요구하지도, 후세에 남을 모범으로서 존경받기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소설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해받기를 원할 뿐이지요. 고리오 영감의 우스운 신세도, 프레데릭의 한심한 작태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보바리의 허영도, 카레리나의 투신과 지하생활자의 번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는 그들 삶의 핵심에 빛을 비추며 ‘이것도 삶이다, 이것 또한 삶이지 않은가’라고 독자의 이해를 요구하는 셈이지요.

 

아킬레우스는 위험천만한 전투를 영웅적으로 마친 다음 자신이 다친 곳은 없는지, 혹시나 이가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돈키호테는 어쭙잖은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다음 이가 빠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며 산초에게 말하지요: “산초, 다이아몬드 하나보다 이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해.” 서사시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혹은 패배했다 해도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대함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패배에는 그 어떤 위대함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이지요. 쿤데라에 따르면 삶이라고 불리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그는 말하지요. 

 

쿤데라는 한 개인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태도를 가리켜 서정적 태도라고 말합니다. 소설가로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이행하는 것은 바로 이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고요. 그런데 쿤데라가 말하는 서정적 태도는 비단 소설가의 사정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어서, 인간은 누구나 얼마간 서정적 태도를 가지고 자신 앞에 놓인 세계를 바라봅니다. ...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앞에서 그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 까닭에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올바른 인식과 판단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능한지, 또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인식론의 지난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고서, 서정적 태도를 지닌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밖에 현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 태도로부터 이탈한 소설가라면 현실과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 사이의 괴리를 알아차릴 수 있지요. 현실의 주의 깊게, 그리고 집요하게 들여다볼수록 실제 현실과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인에 앞서 존재하는 세상에는 이를테면 일종의 커튼이 드리워진 셈이라서, 개인에 선행하는 모든 종류의 해석들이 현실의 부분부분, 요소요소를 가리고 있으니까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에 드리운 커튼을 보고 있는 것과 같지요. 다분히 플라톤의 고전적인 비유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관점은,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이 소설임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선행하는 해석의 커튼은 모든 사람 앞에 드리워 있지만,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제시하는 것, 또 그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요구하며 가능성을 현행하도록 이행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선행하는 해석의 커튼을 찢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10. 11.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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