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빈스키에게 바치는 즉흥곡

October 4, 2019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제까지 쓴 소설들의 제목을 죄다 ‘웃음과 망각의 책'으로 바꿔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밝힌 적이 있을 정도로, 쿤데라에게 웃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개념입니다. <농담>이나 <우스운 사랑들>처럼 웃음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단어들을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한 경우는 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무의미의 축제>처럼 작품의 주제가 아무래도 웃음 가까이에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경우도 빈번하지요.

 

웃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웃음이 있겠고 뛰어 놀고 있는 아이의 웃음이 있겠지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웃음이 있는가 하면 옆에 누가 있든 남들이 뭘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대는 한 무리 학생들의 웃음이 있을 겁니다. 이런 웃음과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하는 냉소나 비아냥도 어쨌든 웃음이긴 하겠지요. 웃으면 복이 온다는 식으로 묻지마 행복론을 전파하는 작자가 아닌 이상, 쿤데라가 말하는 웃음이 그저 행복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의 웃음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쉽게 알아차리실 수 있을 겁니다.

 

에코가 발표한 소설 <장미의 이름>은 웃음의 본질과 근거를 다루는 두 번째 <시학>을 둘러싼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도원의 서가에서 웃음에 대한 책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여기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눈 먼 신부 호르헤가 벌이는 연쇄살인극이 이야기의 골조를 이루고 있지요. 눈 먼 신부 호르헤라니, 거의 감동적인 오마주 아닙니까. 물론 두 번째 시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에코의 작중 설정에 불과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이 가진 효과의 본질을 공포와 연민의 감정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농담과 웃음의 근거에 대한 탐구 또한 그와 같은 수준의 통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놓였다면 퍽 흥미로운 내용이 담기지 않았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쯤은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애석하게도 수도원이 몽땅 잿더미가 된 바람에 이 책은 이제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군요.

 

그렇다면 쿤데라가 말하는 웃음은 무엇일까요? 그가 한 친구에게 들은 실화를 소개하는 장면을 살펴봅시다: 이야기에 따르면 프라하의 한 엔지니어가 런던의 학술 대회에 초청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런던으로 가서 학회에 참석한 다음 프라하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지 몇 시간이 지나 그는 사무실에서 신문을 펼쳐 읽었는데, 신문에는 런던의 학술대회에 참석했던 체코인 엔지니어가 서방 언론에 사회당을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고는 귀국하지 않고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당시 체코 사회에서 이러한 비방 성명과 망명 신청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어서, 수십 년의 옥살이쯤은 각오해야 하는 중범죄에 해당했습니다. 기사를 읽던 엔지니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신문에 나온 그 엔지니어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무실에 들어서던 엔지니어의 비서가 그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맙소사! 여기에 다시 돌아오시다니요!”

 

이런 상황에서 엔지니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서둘러 신문사 편집국으로 달려가 편집장을 찾았습니다. 그를 만난 편집장은 진심으로 미안해 하면서도, 자신도 이번 일로 인해 정말 골치 아프다, 자신이 편집장이긴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자신도 속수무책이다, 그 기사의 내용은 내무부에서 직접 보내온 것이라고 그에게 대답합니다. 그리하여 엔지니어는 이제 내무부를 찾아갑니다. 내무부 사람들은 뭔가 착오로 생긴 일이 분명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내무부에서 뭔가 직접 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고도 대답합니다. 런던 주재 대사관의 정보원으로부터 관련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받았다는 겁니다. 엔지니어는 여기저기를 통해 정정 기사를 요구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정정 기사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착오가 있었다 것은 분명하니까 아무 탈 없이 전처럼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요. 

 

그러나 엔지니어의 생활은 이제 조용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금세 자신이 은밀하게 감시당하고 있고, 전화를 도청당하고 길에서는 미행당한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지요. 이제 그는 잠도 편하게 잘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는군요. 결국 더 이상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자신의 조국을 떠나려는 시도를 몇 번이나 시도하기에 이릅니다. 이리하여 진짜 망명자가 되는 것이지요.

 

한국의 어떤 비평가 또한 이 장면을 각색해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남한의 정치학자 K는 북한에서 열린 남북 교류 학술대회에 참가하고 막 돌아온 참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펼쳐든 신문에서 자신에 관한 기사를 발견한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신문 기사는 정치학자 K가 북한에서 남한 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는, 북한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연구실에 들른 조교가 K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교수님, 어떻게 여기에!”

 

K는 신문사 편집국장을 찾아가 항의합니다. 편집국장은 진심으로 미안해하지만 이번 경우만은 정정 보도를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국정원에 가보길 권합니다. 국정원은 뭔가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했지만, 당장은 어떠한 조처도 취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별일 없을 테니 그저 조용히 지내고 있으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K는 조용히 지낼 수가 없습니다. 도청과 미행이 끊이지 않는 악몽 속에 시달리다가, K는 마침내 정치적 망명을 시도합니다. 오보가 결국 사실이 되고 만 것이지요. 

 

‘카프카에스크(Kafkaesque)’라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뜻을 그대로 옮기면 ‘카프카적인’, ‘카프카스러운' 정도가 되겠지요. 위의 두 이야기가 바로 전형적인 카프카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더 떠올릴 수 있어요. 엔지니어는 교수나 외교관으로 바뀔 수 있고 내무부는 국정원이나 공산당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요. 이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어떤 뼈대가 바뀌지 않는 한 나머지 역할들은 얼마든 다른 이름으로 교체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카프카가 남긴 글을 비교적 풍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까닭은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부탁과 달리 카프카에게서 전달 받은 원고를 죄다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는 요양원에서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줄 것을 부탁했는데, 브로트가 이를 들어주지 않은 사실을 잘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그가 카프카의 소설을 발표한 뒤에 차례로 보인 행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브로트는 <소송>과 <성>을, <아메리카>로 이름을 바꾼 다음 <실종자>를 출판했고, 카프카의 단편들을 따로 모아서 출판했고,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들을 출판했고, 야누흐의 글에 서문을 붙였고, <성>과 <아메리카>를 극으로 만들었고, <프란츠 카프카 전기>, <프란츠 카프카의 신앙과 교시>, <길을 가리키는 자, 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작품에서의 절망과 구원>이라는 네 권의 해설서를 출간했고, 자신과 카프카를 차명의 등장 인물로 내세운 <사랑의 마법 왕국>이라는 소설을 집필했지요.

 

브로트의 견해에 따르면 카프카는 무엇보다 종교 사상가입니다. 물론 카프카가 자신의 철학이나 종교적 관념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카프카의 철학을 그의 작품과 그가 남긴 잠언들, 일기와 편지들은 물론 그의 생활 방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브로트는 말합니다. 브로트에 따르면 카프카의 잠언들은 개인의 신앙과 생활을 바꾸려는 엄격한 호소를 개진하고 있으며, 그의 소설들은 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겪게 될 끔찍한 형벌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쿤데라에 따르면 (애석하게도) 이것은 터무니없는 해석일 뿐더러 부당하고 형편 없는 관점입니다. 브로트가 카프카의 부탁을 무시하고 (물론 브로트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만) 카프카의 원고를 출판했다는 사실처럼 카프카가 자신의 <소송>의 첫 장을 친구들에게 읽어주었을 때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웃음이야말로 쿤데라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적인 웃음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갖습니다. 소설에 있어 ‘카프카스러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소설의 안팎으로 지극히 소설적인 웃음을 만들어냅니다. 한편으로 이 웃음은 전혀 얼토당토하지 않은 상황 전개에 따른 실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 와중에 실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요소들이 놀랍도록 현실과 유사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소설 바깥의 현실에서 정작 이 웃음은 소리 없이 증발한 나머지 카프카의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는 괴이한 우화 작가로 각인되고 말았으니까요. (호랑이를 그린 사람이 자신이 그린 호랑이에 물려 죽었다, 귀신을 그리던 자가 자신이 그린 귀신 그림에 홀렸다, 먼 길을 돌고돌던 여행자가 마침내 목적지에 이른 줄 알았더니 출발했던 고향이었다… 이런 종류의 상징 형식과 이 장면 사이에 성립하는 흥미로운 유비를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엉터리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 친구의 작품을 출간하려 드는 순간 그는 시인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피카소의 소개자가 입체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화가라고 상상해보세요. 그가 피카소의 작품에 대해 뭐라고 소개할까요? 아마도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요? “피카소의 작품들은 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겪게 될 끔찍한 형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습니다만, 그것이 피카소를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혹은 그런 피카소에 대한 그런 해석도 얼마든지 온당하다고 주장한다면 실소를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전혀 무의미한 어떤 것이 우리 운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맥빠지게 만들지요. 하지만 예기치 않았던 어떤 무의미의 발견은 희극성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배신당한 유언들> 또한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유언이라니,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자 최후의 의사 표현이며, 자신의 목숨으로 효력을 발생시키는 선언이자 법적인 강제력까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의사표현이 바로 유언 아닙니까. 그런데 배신당한 유언이라니, 사실 제목에서 이미 소설적인 웃음이 삐져나오고 있는 셈이지요.

 

 

… (후략)

 

 

 

2019. 10. 4.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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