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

August 24, 2019

롤링 스쿨의 이번 주제는 멜랑콜리입니다. 서양의 고대 의학에서 사람의 특정한 체질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멜랑콜리라는 개념은, 시간이 지나며 슬픔과 우울의 정서, 그리고 특정한 문화적 성향을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점차 의미가 넓어졌습니다. 고대 의학에서 체질에 따라 사람의 성격을 구분했을 때, 멜랑콜리라는 체질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슬픔과 우울에 젖어 있는 성향이었기 때문이지요.

 

멜랑콜리의 의미가 인간과 문화의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확장된 까닭은 슬픔과 우울이라는 독특한 정념이 서구 문화의 전개 과정에 미친 영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환희와 영광의 기록뿐 아니라 상처와 슬픔의 기억 또한 함께 존재하니까요. 그리고 이런 상처와 슬픔의 정념에 유독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울한 인간들, 멜랑콜리한 인간들이지요. 

 

서구 문화의 전통에서 멜랑콜리는 꽤나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멜랑콜리가 가진 모종의 사회문화적 특징에 처음 주목한 이래 일찍부터 이븐 시나, 아퀴나스, 피치노, 칸트, 헤겔과 같은 거장들 또한 같은 주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룬 바 있으며, 니체, 하이데거, 프로이트, 벤야민을 거쳐 최근의 데리다, 파노프스키, 버틀러, 지젝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논의가 이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어느 것 하나 흥미롭지 않은 구석이 없지요. 우리는 일단 프로이트를 출발점으로 삼아, 멜랑콜리 담론의 다양한 지층을 탐사해 나갈 예정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멜랑콜리라는 주제를 다루는 첫 시간으로서 프로이트의 텍스트 ‘슬픔과 우울증’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경험을 중심으로 멜랑콜리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에 따르면 멜랑콜리의 본질은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 상실로 인한 슬픔, 슬픔을 수습하는 애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멜랑콜리의 본질로 규정했던 과거의 통념과 달리, 프로이트는 슬픔, 특히 해소되지 않는 슬픔이라는 문제의 기원과 원리를 밝히기 위해 탐구를 개진합니다. 프로이트의 사유를 추적하며 우리도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해볼 수 있겠지요. 이번 세미나를 통해 삶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멜랑콜리의 흔적을 발견하고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럼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선 멜랑콜리의 기원부터 간단히 살펴볼까요? 방금 멜랑콜리가 서양의 고대 의학에서 사람의 특정한 체질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고 언급했었지요. 고대 그리스 의학은 사람을 네 가지 체질로 구분했는데, 멜랑콜리는 바로 그 네 가지 체질 중 하나였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이 정액으로부터, 즉 일종의 체액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에 액체가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피, 점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네 가지 액체가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건강과 질병을 이 액체들의 특징과 작용을 통해 설명했지요. 각각의 체액은 상이한 기관에서 만들어지는데,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체액과 기관이 있습니다. 일종의 체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체액과 기관의 관계에 대한 이들의 생각이 오늘날의 해부학적 지식과 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들 액체는 저마다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냉과 건습, 즉 뜨거움과 차가움, 건조함과 축축함이라는 두 범주의 속성이 결합하여 각각의 액체가 가진 성질을 이룹니다. 이런 식이지요. 피와 노란 담즙은 모두 따뜻한 속성을 가진 체액입니다. 하지만 피가 따뜻하고 축축한 성질을 가진 반면 노란 담즙은 따뜻하고 건조한 성질을 가진 체액이지요. 검은 담즙과 점액은 차가운 속성에 해당하지만, 검은 답즘은 건조한 성질을, 점액은 축축한 성질을 가졌다고 그리스인들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불, 물, 흙, 공기라는 네 가지 원소와 그것의 성질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그리스 자연철학의 4원소설에 상응하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흔히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감정 변화의 폭이 큰 사람을 두고 다혈질이라고 하지요. 아마 이쯤이면 직감적으로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다혈질이라는 성격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다혈, 그러니까 피가 많은 체질의 특징인 것이지요. 4액체설에서 피는 자연의 원소 가운데 공기에 상응하는데, 어떤 고정된 형태의 요소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빠르고 유연하게 바뀌는 공기의 특징과 다혈질의 성격을 함께 연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검은 담즙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그럼 그리스인들은 멜랑콜리를 어떤 체질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멜랑콜리는 검은 담즙의 작용이 두드러지는 체질을 가리킵니다. 실은 멜랑콜리라는 말 자체가 직접적으로 검은 담즙이라는 뜻입니다. ‘검다’라는 뜻의 ‘멜라스’와 담즙을 뜻하는 ‘콜레’가 합쳐진 말이니까요. (피부나 머리카락의 검은 색소를 가리키는 ‘멜라닌'이나 빛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 같은 현대어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지요. 모두 같은 어원을 가진 말들입니다.) 멜랑콜리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히포크라테스가 보기에, 차갑고 건조한 체질, 즉 멜랑콜리커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우울과 슬픔에 젖는 기질입니다. 다혈질은 쾌활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담즙질은 진취적이고 정열적인 기질을, 점액질이 냉정하고 인내심이 강한 기질을 가리킨다면 검은 담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우울과 슬픔인 것이지요. 이런 체질을 가진 사람들은 쓸개에서 검은 담즙이 과도하게 많이 분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과도하게 분비된 쓸개즙이 굳어질 때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우울증인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울과 슬픔이라는 기질을 철학과 정치, 시와 예술의 비범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로 제시한 이래, 멜랑콜리 담론은 주로 예술과 관련한 분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예술 방면의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모두 멜랑콜리커였다고 주장하면서, 천재적인 창조를 위한 핵심 조건으로 멜랑콜리를 제시합니다. 일종의 과학 용어였던 멜랑콜리를 인문 담론 안으로 가져온 셈이랄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따르면 멜랑콜리는 무엇보다 사랑의 열정입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과도한 열정이 대상의 이미지에 대한 확장을 불러일으키고, 범상한 눈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연쇄와 결합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시를 만드는, 은유를 창조하는 원천인 셈이지요. 그는 시의 창작은 천재적인 능력에 속하는 일이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이렇게 타고난 천재적인 능력의 비밀로 ‘검은 담즙'을 지목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문화에 얼마나 오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지는 익히 알려져 있지요, 멜랑콜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생각 또한 꽤나 오래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시간을 껑충 건너뛰어 칸트를 살펴볼까요, 칸트는 이성에 대한 비판, 즉 이상의 능력과 한계에 대해 누구보다 숙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 측면에서 감성의 작용에 대해 논의를 개진하는데, 저 유명한 미와 숭고에 대한 논의가 바로 칸트의 멜랑콜리론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칸트가 보기에 멜랑콜리는 숭고와 닿아 있는 개념인데, 본격적인 논의는 멜랑콜리를 살펴보는 동안 언젠가 다시 다룰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일단 다른 밤을 위해 남겨두지요.

 

니체는 멜랑콜리와 문화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니체가 다른 주제들 다루는 방법과 그가 이룬 성취가 그러하듯 이 논의 또한 짧게 단정지어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부득이 거칠게나마 니체의 사상을 간추려보면 우선 고통을 해석하는 의미체계로서의 문화와,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힘으로서의 멜랑콜리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 문제 또한 다시 다룰 시간이 있을 겁니다.

 

멜랑콜리에 대한 논의가 대강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사이, 실은 깜빡 잊혀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도 꽤나 중요한 의미가요. 바로 멜랑콜리의 기원에 있는 슬픔과 우울이라는 감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우울과 슬픔은 어떤 능력의 바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 앞서 인간의 어떤 감정이라는 사실을 이 문제에서 빼놓을 수는 없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다루는 의사였습니다. 신경증과 신경증자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흔히 병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증상이 실은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양적인 문제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물론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프로이트의 사상은 단일한 발전 과정이 아닌 복수의 담론과 몇 가지 중요한 불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복잡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증상에 있어 양과 질의 차원을 구분하는 문제 또한 그리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프로이트의 초기 사상에서는 증상을 일으키는 속성은 질적으로 동일하고 그것의 양적 차이가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지만, 후기 사상에서는 속성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기도 하니까요.)  슬픔이 인간의 정상적인 감정 작용이라는 사실에는 별로 이견이 없을 겁니다. 오히려 어떠한 일에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어색하지요. 사이코패스 같은 개념에 익숙한 요즘이라면 그런 사람의 경우를 쉽게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슬픔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역시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극단적인 감정의 결핍이 이상한 것처럼, 극단적인 감정의 과잉 또한 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어느 구석 하나 슬플 일이 아닌데도 마냥 슬프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한걸음 더 나아가면 슬플 일이 아닌데 슬퍼하는 것조차 아닌, 아무 일도 없는데 슬퍼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냥 마음이 곧 슬픔 자체라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슬픔과 병리적인 우울을 구분합니다. 그가 말하는 ‘슬픔(trauer)’이 인간의 정상적인 정서 작용 가운데 하나로서의 슬픔을 가리킨다면, ‘우울(melancholie)’은 어떤 특정한 작용의 산물로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슬픔을 가리킵니다. 신경증을 다루는 의사답게 프로이트는 멜랑콜리의 문제를 감정론의 차원에서 해명하고자 시도한 것이지요.

 

이러한 시도의 내용과 의미는 우선 프로이트의 논문 ‘슬픔과 우울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 연구자들이 밝힌 것처럼 그는 비교적 초기부터 신경증으로서의 우울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0년대에 남긴 기록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들을 찾을 수 있지요. 하지만 프로이트가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슬픔과 우울증'을 집필한 1910년대 후반의 일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관심은 있었지만 생각을 정리해서 따로 원고를 집필할 만큼 단순히 여유가 없었거나 상대적으로 다른 주제들에 비해 우선순위가 떨어졌기 때문일까요? 사실 의외로 중요한 지점입니다, 여기는. 우울증이야 무려 현대인의 고질병이기도 하거니와, 얼마간의 우울감에 잠겨 있었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요즘 표현으로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도 하지요.) 흔한 일인 만큼, 그래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범주로서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요? 왜 프로이트는 우울이라는 증상에 처음 주목한 뒤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었을까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 사상의 전개 과정 속에 존재하는 도약의 지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도약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큰 차이가 앞걸음과 뒷걸음 사이에 존재한다면, 즉 이전까지의 보폭과 다른 일종의 단절이 존재한다면, 전체 경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절을 이해하는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이 단절을 경유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면, 슬픔과 우울증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거꾸로 슬픔과 우울증의 문제 가운데 프로이트의 도약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의사로서 출발한 프로이트의 초기 사상은 주로 히스테리, 신경증에 대한 논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의사의 일이라면, 증상의 원인을 알아야 치료도 가능하겠지요. 따라서 프로이트의 초기 관심은 신경증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는가, 즉 무엇이 증상을 유발하는가, 라는 문제에 놓여 있습니다. 신경증의 원인을 알아야 그것을 고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가 발견한 것이 바로 무의식입니다. 그야말로 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첫 걸음이라는 표현에 딱 맞는 발견이었지요. 증상의 배후에는 무의식이 있다! 의식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실은 의식화되지 않는 어떤 영역이 있고, 단순한 부주의나 착오가 아닌 의식이 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이 회귀하는 방식이 곧 증상이다, 라는 정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의식을 발견합니다, 프로이트는.

 

다음은 뭘까요? 마르크스를 떠올려봅시다: 개별 인간의 특징은 사회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회의 특징은 경제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경제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경제를 지배하는가? 시장입니다. 그럼 시장의 원리는 무엇인가? 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무엇이 시장을 지배하는가? 바로, 자본! 그러니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논리를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자, 프로이트도 비슷합니다. 인간의 무의식이 인간의 정신 작용을 지배한다면 무의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무의식의 원리는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프로이트의 발견에 따르면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충동과 쾌락입니다. 자연히 프로이트의 관심 또한 충동과 쾌락의 원리를 해명하는 것을 향하지요. 프로이트가 리비도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문제입니다.

 

자, 우리는 이미 앞선 세미나에서 프로이트 사상의 후반부까지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한참 충동과 쾌락의 논리를, 리비도의 문제를 추적하던 프로이트는,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그것만으로 인간의 정신 과정을 해명할 수 없다는 한계와 맞닥뜨립니다. 나르시시즘의 문제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 문제는 프로이트가 가진 기존의 접근 방식의 한계가 드러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의 효과는 자명합니다. 좌절 또는 도약이지요. 압력을 견디지 못하면 부서지는 것이고, 압력을 견뎌 이겨내기 위해서는 질적인 변화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광석의 경우와 사정이 비슷합니다. 그럼 프로이트는? 도약합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기존의 관점을 대거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수정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신분석의 문제들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지요.

 

나르시시즘이 병리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배경에는 정신병, 그러니까 일반적인 신경증의 사례와 달리, 정신분열증처럼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정신병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병자들은 외부 세계의 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정신분석적 치료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지요.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리비도는 외부 대상을 향하는데, 모든 사람이 리비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환자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이상 리비도가 없을 수는 없으므로, 바깥을 향해야 하는 리비도를 환자의 외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 리비도가 있을 곳은 어떻게 보면 뻔하지요. 자기 자신의 안쪽으로 쏟고 있는 겁니다. 프로이트는 이들 환자의 경우 대상을 향했어야 하는 리비도가 자아에 몽땅 투자되어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면서, 그 결과 필연적으로 과대망상이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비도가 일종의 망상으로서의 자기자신에 전부 투자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일절 반응하지 않는 병리적인 자폐 상태가 성립하는 겁니다.

 

리비도가 자아에 투사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가령 사랑에 빠진 상태를 떠올려 봅시다. 사랑에 빠져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고 있을 때 그가 가진 매력은 과장되어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랑이 이루는 유쾌한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한심할 만큼 엉뚱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니까요.) 사람과 그의 특징 자체는 동일하지만, 그를 향한 리비도가 그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러니 리비도가 자아를 대상으로 삼는다면 자아에 대한 이런저런 망상들이 덩달아 생겨나는 법입니다. 망상의 정도와 사례는 다양할 수 있겠으나, 어쨌거나 프로이트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퍼뜩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자아가 리비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이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입니다. 자아 또한 리비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은 정신 분석의 문제들에 대한 이전까지의 접근 방식을 완전히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제 ‘나르시시즘 서론'을 다시 읽어 봅시다.)

 

자아가 리비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리비도의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를 요구합니다. 이전까지 생각했던 리비도의 성격은 동일하게 유지되는 가운데, 대상의 차원에서 외부 세계의 대상과 자아 자신이 성립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외부 대상을 향해 작용하는 리비도와 자아 자신을 향해 작용하는 리비도가 별개의 성격을 지녔다고 봐야 할까요? 충동은 동일하지만 대상의 범위가 넓어진 것인가, 혹은 대상에 따른 상이한 충동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지요. (중간 과정을 조금 생략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비로소 리비도의 분배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프로이트를 읽으며 이 문제로 얼마나 프로이트가 골머리를 앓았는지 살펴본 바 있지요. 

 

어쨌거나 프로이트가 가설적으로 제시한 해답은 일단 리비도의 성격을 동일하게 유지하되, 대상을 구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설정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또 있습니다. 바로 리비도의 방향이지요. 농구를 좋아하고 딸기를 좋아하고 연인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리비도는 기본적으로 나에서 대상 방향으로 성립합니다. 농구든 딸기든 연인이든 나로부터 바깥이라는 리비도의 방향성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리비도가 자아를 향할 수도 있다는 관점이 성립한다면 리비도는 이제 나를 향하기도, 내가 아닌 내 바깥의 대상을 향하기도 하는 겁니다.

 

아직 이 문제의 중요성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프로이트가 가진 기존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대상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충동이지요, 심지어 대상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빤다’는 구강 충동이 존재합니다. 몇 가지 이유와 조건들과 결합해 아이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빨지요. 가슴이 없을 때에는 손가락을 빱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발가락이든 젖병이든 장난감이든 뭐든 빱니다. ‘빤다’는 충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특히 외부 대상을 향한 투자와 이로부터의 쾌락이라는 충동의 목적 차원에서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지요, 쾌락을 회수할 수만 있다면. 대상들 사이에는 일종의 등식이 성립합니다. 젖가슴, 손가락, 장난감, 젖병은 쾌락의 등가물입니다. 물론 젖가슴에서 젖병으로, 젖병에서 손가락으로 대체이행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대상은 얼마간 다른 의미를 갖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리비도의 외부 투사라는 구조 속에서 같은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대체물로서의 성격을 공유합니다.

  

이제 나르시시즘과 함께 변화한 리비도의 분배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살펴봅시다. 리비도가 무조건 외부 대상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쪽과 바깥쪽 양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리비도의 투자에 따라 관심의 투자와 회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대상에 대한 리비도의 투사는 전혀 다르게 설명해야 합니다. 즉 리비도가 젖가슴을 향해 있고, 젖가슴만 젖병으로,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젖가슴이 젖병으로 대체되기 위해서는 젖가슴을 향해 있던 리비도를 우선 회수한 뒤, 즉 젖가슴에 대한 관심을 회수한 뒤 새로운 대상인 젖병에 리비도를 재투자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젖병을 손가락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도 (우선은!) 젖병에 대한 기존의 리비도와 관심을 철회한 뒤, 다시 새로운 대상인 손가락에 리비도를 투자하는 방식으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일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대상의 대체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느냐, 혹은 리비도의 분배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느냐 하는 차이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집니다. 자아가 리비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리비도의 투자 방식도 함께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이제 외부 대상을 향한 리비도의 관심은 자아를 향한 리비도의 양만큼 줄어듭니다. 한쪽 주머니에 몽땅 담으면 다른 한쪽 주머니는 텅 비기 마련이지요. 이전까지 프로이트는 정신적인 것을 주로 양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특히 증상에 있어 병리성과 정상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차이라는 관점을 고수했지요. 가령 신경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유년기의 성적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경험과 억압의 강도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성인이 된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신경증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의 문제 이후 리비도의 분배라는 문제를 이해하게 되면서, 프로이트는 차츰 질적인 차원을 정신분석에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예컨대 기존까지의 정신분석에서 충동의 크기만이 문제시되었다면, 이제부터는 동일한 크기의 충동이라도 그것이 대상을 향해 있느냐, 자아를 향해 있느냐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의 변화에서 프로이트는 비로소 우울증의 문제를 심층까지 파고들 수 있는 한 가지 열쇠를 획득합니다. ‘슬픔과 우울증'에서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우울의 병리학은 사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요.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애도 작업의 실패를 병리적 우울증, 즉 멜랑콜리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퍽 흥미로운 논의를 담고 있으면서도, 프로이트의 까다로운 다른 논의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당장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는 까닭 때문인지 이 논문은 꽤나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울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점 이면에 이러한 중요한 변화가 있다는 사실은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지점입니다. 사실 이러한 도식은 리비도의 분배라는 문제를 먼저 떠올린 다음에야 비로소 뒤따라 나올 수 있는 관점인데요. 

 

논문의 내용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중요한 개념들을 먼저 살펴볼까요? 열린책들에서 간행한 프로이트 전집은 이 논문의 제목을 ‘슬픔과 우울증'으로 옮기고 있는데, 같은 논문을 ‘애도와 멜랑콜리’라는 제목으로 표기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 가운데 슬픔 또는 애도에 해당하는 독일어 개념은 ‘trauer’입니다. 프로이트가 직접 사용하는 개념이기도 하고요. 불어로는 ‘deuil’영어로는 ‘mourning’으로 옮기는데, 독일어와 영어 양쪽에서 모두 이 낱말은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의 장례와 상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슬픔 가운데에서도 특수한 감정을 특정하는 ‘애도’라는 개념으로 번역하기도 하지요. 

 

우울은 흔히 ‘depression’으로 표현합니다. 독어, 영어, 불어 모두 마찬가지로요. 이 낱말이 우울증을 가리키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낱말을 이루고 있는 의미소들이 드러내듯 본래 이 개념은 일종의 압력이 빠진 것과 같은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였습니다. 프로이트가 직접적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기도 한데, ‘depression’이 광범위한 차원에서 우울증 일반을 통칭하거나, 혹은 신경증적 차원에서의 우울증을 특정해서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프로이트가 다루는 정신병적인 차원에서의 우울증은 ‘melancholie’에 해당하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는 “슬픔(trauer)이라는 정상적인 감정과의 비교를 통해 우울증(melancholie)의 본질을 밝혀보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느 때처럼 자신의 논의의 의미와 범위를 매우 세심하게 한정하면서, 자신의 논증이 보편타당한 결론을 도출하기보다는 심리적 요인임이 분명한 몇 가지 사례에 국한되는 것임을 덧붙이면서요. 

 

프로이트의 진술을 따라가봅시다. 우선 논문의 목적은 멜랑콜리의 본질을 밝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슬픔과의 비교를 통해. 별 의미 없는 단순한 진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로 비범한 발상의 전환이 녹아 있는 선언입니다. 앞서 ‘trauer’라는 말 속에서 드러나듯이 슬픔은 죽음과 같은 상실과 닿아 있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지요?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 특히 아끼고 사랑하던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뒤따라오는 감정이 바로 슬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의 작용인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멜랑콜리의 본질을, 이 정상적인 감정과의 비교를 통해 밝히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즉 멜랑콜리를 하나의 독립적인 사태로서 그것의 고유한 차원에서 해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슬픔과 그것을 촉발하는 상실이라는 차원에서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것이지요. 프로이트 이전까지는 아무도 멜랑콜리를 상실감과 연결짓지 않았습니다. 때로 프로이트는 논문이 맞나 싶을 만큼 학술적인 저술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대가의 문장에는 이렇게 버릴 구석이 하나 없습니다. 벌써 첫 문장 속에 이렇게 많은 정보를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실은.

 

이어서 프로이트는 슬픔과 멜랑콜리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들이 놓인 전체적인 상황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환경의 영향에 따른 자극이 슬픔과 멜랑콜리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면서요. 슬픔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서 유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에 다른 대상이, 개나 고양이가, 혹은 조국이나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 또한 그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즉 소중한 대상을 상실했을 때 슬픔이 생겨납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은 우선 즉각적으로 고통스런 낙심에 젖어듭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도 상실하고요. 슬픔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의욕도 없고, 행위할 수 있는 능력도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급기야는 자존감마저 곤두박질칩니다. 자신을 비난하며 자기비하에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 자신을 처벌해주기를 바랄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멜랑콜리의 경우도 대체로 사정은 비슷합니다. 소중한 대상의 상실은 멜랑콜리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슬픔과 멜랑콜리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자존감의 추락이지요. 곰곰히 생각해볼까요, 일반적으로 슬프다고 곧장 자존감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슬픔 속에서 인간은 고통스럽고 호기심도 잃고 사랑도 할 수 없고 모든 일 앞에서 무기력하게 느낄 수 있지만, 그것과 자기비하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멜랑콜리의 특징을 중요한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 다음, 앞의 네 가지를 ‘자아의 억제와 제한‘이라고 요약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 자존감의 추락과 자기비하, 처벌에 대한 망상이 바로 슬픔과 멜랑콜리를 구분짓는 핵심 요소입니다. 슬픔은 자아의 억제로 이어지는 반면, 멜랑콜리는 자아의 맹렬한 자기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자, 이번에는 관점을 바꿔서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슬픔과 멜랑콜리의 문제를 바라봅시다. 슬픔도 멜랑콜리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왜 생기고, 어떻게 작용할까요? 우선 슬픔에 앞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관심을 쏟아붓고 있던, 일종의 행복했던 상태가 존재합니다. 이 상태가 영원하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사랑하는 님이 침묵만을 남긴 채 나를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마음이 떠난 다음이라면 상대방이 떠나든 말든 내심 별로 동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애착이 있었던 대상이 아니라면 역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가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안타까워 하겠지만, 그로 인해 고통에 빠지고, 낙심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반면 리비도는 여전히 대상에 붙어 있는데, 갑자기 대상이 사라진다면 리비도는 이전까지 대상에게서 획득하고 있던 쾌락을 갑작스럽게 상실하게 됩니다. 리비도를 강제로 회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지요.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잃어버린 대상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죽은 어린 자식의 방을 치우지 못하는 부모, 잃어버린 가족의 사진, 헤어진 연인의 소지품, 죽은 반려견의 목줄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요.

 

사라진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떼어내는 작업이 바로 애도에 해당합니다. 슬픔과 애도는 이렇게 닿아 있는 것이지요. 애도 속에서 자아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결국 고통스럽지만 잃어버린 대상의 자리로부터 리비도를 떼어내야 합니다. 한편에는 (이미 상실한) 과거의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바뀐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요구가 있습니다. 애도는 이 둘 사이의 타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타협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프로이트는 애도 작업의 핵심으로 기억을 제시합니다. 역설적이지요, 사라진 대상을 잊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애도라는 말이 단적으로 드러내듯, 그것에 합당한 장례를 치러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슬픔에 빠진 동안 자아는 자신이 잃어버린 대상을 회상합니다. 아쉬워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지요. 대상은 사라졌지만 리비도의 투자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리비도가 쾌락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리비도는 투자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갑니다. 이를테면 투자는 계속 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손실뿐인 상황인 것이지요. 따라서 투자되는 리비도의 양도, 투자할 수 있는 리비도의 양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적당한 다른 대상으로 투자를 옮겨가는 것이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멜랑콜리의 핵심은 애도 작업의 실패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실패라고 말하기도 어려운데, 왜냐하면 멜랑콜리에서는 애당초 애도 작업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분은 슬픔과 멜랑콜리 사이의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실패한 애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상실로 인한 슬픔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애도 작업이 성공하면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가, 실패하면 멜랑콜리로의 이행이 생겨난다고 식의 관계가 성립할 여지가 반면, 애도 작업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슬픔과 멜랑콜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성립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지요.

 

애도 작업과 멜랑콜리의 관계를 다루며 프로이트가 주목하는 지점은 ‘미지의 상실’입니다. 슬픔이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감정인 반면, 멜랑콜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즉 뭔가 잃어버리기는 잃어버린 것 같은데(분명히 슬프기는 하니까요), 뭘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모르니까 애도할 수도 없습니다. 즉 기억할 수 없습니다. 기억을 통해 상실이 남긴 빈자리를 채울 수도 없고요. 쉽게 말해 슬픔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애도할 수 있습니다. 애도 작업 중에는 자아의 억제가, 즉 세계에 대한 관심의 철회가 발생합니다. 애도 작업 중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상중에는 일상 생활에의 요구로부터 면제되는 것처럼요. 애도 작업을 마친 뒤에는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상을 다 치렀으면 다시 출근도 하고 타인의 부름에 적절히 응대해야 합니다. 멜랑콜리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애도할 수도 없습니다. 시신이 없어 상도 치르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지요. 출근을 할 수도, 장례를 치를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자아의 억제가 아닌 자기비난이 발생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알 수 없는 상실을 자기비난으로 변환하는 것이 멜랑콜리의 핵심입니다. 슬픔의 애도 작업은 기억을 통해 사라진 대상의 자리를 채우는 과정으로 이루어지고, 이 틈새를 모두 메우고 나면 슬픔 또한 사라집니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슬픔의 양이 줄어듭니다.) 반면 멜랑콜리커의 정서 작용은 자학적인 방식으로 점철됩니다. 대상의 상실을 자기비난으로 바꾸는 것이 멜랑콜리의 내적 작용입니다. 애도할 수 없으니 끝없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지요.

 

멜랑콜리의 자기비난은 가혹합니다. 잃어버린 뒤에야 있을 때 잘할 걸, 하는 종류의 후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멜랑콜리 환자는 자신의 자아를 쓸모없고,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드러냅니다. 그는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고, 사회에서 추방되고 처벌 받기를 기대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심리학적으로 아주 특이한 상태지요. 프로이트는 이것을 열등감 망상이라고 지칭합니다. 망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확신입니다. 의심하는 정신은 기본적으로 망상에 빠지지 않아요. 망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망상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확신합니다. 멜랑콜리의 영역에서 이 문제는 환자들의 자기비하에 대한 확신으로 귀착합니다. 즉 멜랑콜리 환자는 자기비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멜랑콜리 환자가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이야기할 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자기비하의 망상이 멜랑콜리 환자들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어떤 작업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종의 작업의 결과로 자아가 고갈되어버린 것이지요.

 

프로이트가 주목하는 멜랑콜리의 두 번째 특징은 수치심의 부재입니다. 자기 비하의 가혹성이 슬픔과 멜랑콜리를 구분하는 특징이라면 수치심의 부재는 자기 비하의 일반적인 차원이나 죄의식으로부터 멜랑콜리를 구분하는 특징입니다. 일반적인 자기 비하에는 어느 정도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사람 앞에서 그것을 드러낼 때에는 모종의 한계가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멜랑콜리 환자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거나, 적어도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멜랑콜리를 분석하는 프로이트는 자기 비하를 통해 만족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에 이르지요. 이 논문을 집필하던 시기에 프로이트는 아직 명확하게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한 채 어떤 예감만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문제 의식, 그러니까 자기 비하를 통해 만족을 얻고 있는 이상한 정신 상태에 대한 해명은 보다 이후에,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요. 

 

멜랑콜리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제시한 뒤 프로이트는 마침내 문제의 핵심으로 돌입합니다. 멜랑콜리 환자의 고통스러운 자기 비하는 심지어 매우 정확하게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자존심을 상실했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 또한 성립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 환자는 (미지의) 대상과 관련한 상실로 인해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가 느끼는 상실감은 철저하게 자아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상의 상실을 자아의 상실로 변환하는 어떤 작용이 있어야만 합니다. 슬픔과 구분되는 멜랑콜리의 내적 작용, 슬픔에서의 애도 작업에 상응하는 멜랑콜리의 내적 작업이 있어야 하지요. 대상의 상실은 슬픔을 야기합니다. 이건 자명합니다. 그런데 왜 슬픔은 자아의 억제를 산출하는 반면, 멜랑콜리는 자아의 자기 학대로 이어질까요? 멜랑콜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프로이트는 이 멜랑콜리의 내적 작용을 구성합니다. 간단히 도식화해볼까요. 먼저 하나의 대상, 예를 들면 어떤 특정인에게 리비도를 집중시키는 일이 한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대상에게서 냉대를 받거나 실망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원하는 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 사람에게 집중되었던 리비도는 대상으로부터 이탈하고, 새로운 대상을 향해 옮겨가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하지만 다른 조건들의 작용으로 인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기도 합니다. 리비도 집중이 깨진 상태에서, 대상으로부터 이탈한 리비도가 외부의 다른 대상을 찾는 대신 자아 속으로 들어가는, 즉 자아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대상과 자아 사이의 리비도 분배가 아닌, 갑작스럽고 특수한 방식에 따라 리비도가 자아 내부로 몽땅 돌아왔을 때, 이 리비도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기존의 대상, 방금까지 자신이 집중하고 있던 대상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자아와 대상의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대상에 대한 비난이 자아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매우 간략하게 이 단락을 정리하고 있지만, 그가 멜랑콜리에 대해 설명하는 다른 내용들을 함께 고려한다면 멜랑콜리의 내적 작용은 상당히 특수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슬픔의 문제에서 애도 작업은 대상의 상실을 겨냥합니다. 이러한 애도 작업은 정신 건강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기능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의 내용 또한 전부 긍정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쉽게 말해 헤어진 연인을 잊기 위해서는 좋았던 기억 만큼이나 나쁜 기억 또한 함께 떠올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애도 작업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추억으로 바꾸는 과정은 물론 화나고 섭섭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헤어지길 잘했다고 납득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대상에 집중했던 리비도가 자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버렸다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애도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상을 비난해야 하는데, 비난해야 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대상을 비난하는 작업은 자아의 역량을 회복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애도를 완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대상을 비난할 때 비난 받는 것 또한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본래 애도 작업의 목적과 기능은 자아와 리비도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만, 멜랑콜리의 내적 작용은 끝없이 자아의 역량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자아의 회복과 자아의 파괴가 등가를 이루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지요. 꼼짝없이 함정에 걸린 꼴입니다. 대상을 지우면서, 대상을 지우는 만큼 자아를 회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 속에서 지워지는 것 또한 자아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진 셈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교착 상태를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요? 타개할 수는 있을까요? 슬픔과 멜랑콜리에 대한 자신의 탐구가 오직 심인성의 몇 가지 문제만을, 즉 뇌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 심리적인 요소를 원인으로 갖는 일부 문제들에 국한된다는 것과, (현재로서는) 보편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유효한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솔직한 고백으로 시작한 프로이트의 논의는, “다른 연구 결과들을 보고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미완성인 채로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끝이 납니다. 일단은. 프로이트 자신은 멜랑콜리에 대한 논의에서 나타난 중요한 문제들을 ‘자아와 이드’, ‘쾌락 원칙을 넘어서' 등의 후기 저작에서 재검토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이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프로이트의 훌륭한 계승자로서 라캉은 욕망, 결핍, 환상이라는 개념들로, 프로이트가 멈췄던 곳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해결하고자 시도합니다. 데리다는 애도 작업의 성격을 다시 정의함으로써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것도 돌아올 밤을 위해 남겨두지요.  

 

프로이트가 흥미로운 까닭은 그가 많은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문제를 발견하고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상당수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요. 방금 살펴본 것처럼 그는 어떤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고 숙고의 결과를 제시하며 그럼에도 “아직 미완성"이라는 단서를 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멜랑콜리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쓸개즙이 우울감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쓸개즙이 검은 색이 아니라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고요. 맨 처음 세미나의 주제를 소개하며 멜랑콜리 개념의 유래를 언급했었지요.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의 체질을 가리키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체질이라는 것은 통상 다른 합리적인 방식으로, 예컨대 해부학적 지식만으로 해명되지 않는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컨대 누군가의 어떤 언행을 도저히 납득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울 때, “그건 그냥 그 사람의 체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이렇게 본다면 체질, 즉 몸의 특성이라는 표현은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현상을 몸의 현상으로 전치시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해명이 필요한 어떤 현상이, 주술과 신화의 영역에서 이성과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는 어떤 현상들이 남아 있는 셈이지요. 오늘은 프로이트를 통해 멜랑콜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감정론적 단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시간 관계 상 전부를 다루지 못해 아쉽지만, 이 주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이해에 깊이를 더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간 다시 있을 겁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8. 24.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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