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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7, 2019

기억이 생생해질수록 글은 점점 비참한 빛깔을 띠었다. 기억에 몰두하는 한,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반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기억이 중단됐다. 기억이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변화되었다. 그것들은 내 안에서 상자에 담긴 내용물처럼 변했다. 필요한 순간에 나는 그 속에 손을 집어넣고 교환할 수 있는 지폐 한두 장을 꺼냈다. 나는 그것들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냈다. 내 삶의 사실들, 소위 말하는 '내 경험이라는 소재'가 이미 나를 방해하며 가로막고 나의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창작한 소설은, 내 삶이 끝날 때까지 먹고살 내 양식이었다. 나의 소설 쓰기는 내 경험을 시종일관 쇠약하게 만들면서 진행되었다. 종이 위에, 오로지 종이 위에 쓴 작품의 형식을 완성하기 위한 내 경험의 등가물이었다. 그것이 예술적으로 보인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볼 때 모든 소설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상징에서 얻어진 창조물이나 예술품으로서 나의 소설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작정 달려나가다 나는 큰 도약을 했다.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사건 속으로, 보편적인 일 속으로 들어갔다. 소설은 그 단순한 본성으로 인해 무언가를 중재할 때에만 소설이라고 불린다.

      

- 임레 케르테스,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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