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과 그 변화

June 14, 2019

본능의 발달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프로이트는 어쩐지 과학의 발전 과정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논문의 제목이 아니었다면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을 정도로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이기까지 하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흔히 과학이 명료하고 분명한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엄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발견, 생산하는 탐구의 과정을 과학이라고 본다면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틀렸다고 보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는 과학의 맨 처음, 어떤 탐구를 시작하는 출발점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하지요. 프로이트의 생각에 따르면 ‘개념’에서 먼저 출발하는 과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탐구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지요. 탐구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기술하고, 분류하고, 배열하여 서로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 과학적 탐구의 과정을 이룬다면, 탐구가 끝나지 않은 상태, 혹은 적어도 탐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을 설정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탐구가 과학의 한 영역을 이루기 위해서는, 즉 과학적 탐구에 의해 밝혀진 지식의 체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관찰하고 기술하는 단계에서부터 어떤 추상적인 개념들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들이 정립되지 않았으므로 이 단계에서 탐구에 적용되는 개념들은 어딘가에서 빌려온 개념들일 수밖에 없지요. 탐구의 시초를 이루는 이러한 개념들은 대상에 대한 초기 기술 과정의 근간을 이루게 되고, 대상에 대한 지식이 발전하며 하나의 체계에 도달하는 과정에서도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초기에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참조하고 동원했던 특정 개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상에 대한 지식 체계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지요.

 

자 물론 프로이트의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박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았을 때 어떤 대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그것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탐구 초기에 사용했던 개념을 지양하거나 폐기하는 것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단 우리는 과학적 탐구의 발전 과정을 더 깊게 다루기보다는 본능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프로이트의 논리로 돌아옵시다. 지식과 탐구의 논리에 대해서라면 언젠가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밤이 있겠지요.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서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기본 개념들 가운데,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으면서도 논의에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본능(trieb)’이라고 밝히며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합니다. 앞서 다룬 <강의>의 내용을 떠올려본다면 실제로 프로이트 자신 또한 특정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리비도, 리비도 본능, 충동, 성적 충동, 성적 본능과 같이 다양한, 달리 말하면 통일성을 결여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 문제를 다루는 프로이트의 관점이 전혀 일관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맥락에 따라 특정한 의미를 더 부각시킬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해서 사용한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겠지요. 어쨌거나 이제 때가 왔습니다. 정신 분석에서 본능이라는 개념은 이제 너무나 중요한 논의의 차원을 이루는 만큼 이제는 더 이상 모호한 채로 남겨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프로이트는 먼저 본능과 자극을 구분하고, 본능을 자극의 하위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힙니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본능을 자극의 일종으로 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본능을 자극과 동일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덧붙입니다. 정신에 가해지는 모든 자극을 죄다 본능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요. 예컨대 강한 빛이나 큰 소리처럼 단순히 외부에서 신경에 주어지는 (즉 신경이 반응할 수 있는) 생리적인 자극을 본능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단순히 시신경이 빛에 반응하는 것, 이를 테면 밝기에 따라 홍채가 빛의 투사량을 조정하는 것을 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외부 환경의 조도에 따라 홍채를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혹은 ‘인간은 외부 환경의 조도에 따라 본능적으로 홍채를 조정한다’, 와 같은 판단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본능의 개념은 차라리 ‘빛이 전혀 없는 어두운 곳이나 지나치게 강한 빛이 내리쬐는 상황보다 알맞을 조도의 환경을 선호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와 같은 판단에 더 부합합니다. 다른 예를 떠올려볼 수도 있지요. 본능은 추울 때 몸을 떠는 것이나 더울 때 땀을 흘리는 것의 차원이 아니라, 지나친 추위나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의 온도 자체가 (상위 범주에서) 자극의 차원을 이룬다면, 이에 대한 땀을 흘리거나 몸을 떠는 것과 같은 생리적 반응의 차원이 아니라 이러한 자극을 피하고자 하는 정신적 성향이 본능의 차원에 해당합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본능이 전적으로 정신에 속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본능은 반드시 신체 기관과 결부되어 나타나고, 신체 기관에 작용하니까요. 이렇게 자극과 본능을 거칠게나마 구분한 뒤, 그는 외부 세계가 아닌 기관 내부에서 발생하여 정신에 작용하는 것, 그리고 일회성 작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본능으로 규정합니다. 외부의 물리적 기온 자체는 자극에 해당하고, 땀을 배출하는 신체 기관의 작용과 함께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 본능의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외부의 자극은 상황에 따라 일시적일 수도, 지속적일 수도 있지만, 본능은 항상적으로 작용합니다. 즉 기온은 오르내리면서 더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더위가 주어졌을 때 이를 피하고자 하는 본능은 지속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본능은 특정한 욕구를 일으키고, 그 욕구의 해소를 통해 만족에 도달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에 상응하는 신경 체계는 그 체계에 도달하는 자극을 제거하거나 가능한 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낮추고자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능하면 자극이 전혀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는다고요. 하지만 지속적인 자극으로서의 본능은 신경 체계가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을 해소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능에 따른 인간의 활동 또한 멈추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고요.

 

프로이트가 본능이라는 주제를 포착하는 방식은 그가 가진 빼어난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는 먼저 본능을 이해하기 위해, 즉 본능에 관련한 지식을 얻기 위해 신경증과 같이 특수한 사례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을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본능과 그것의 작용, 그리고 이에 대한 의식적 통제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정상인의 경우에서라면, 균형 아래 통제된 방식으로 드러나는 본능의 작용 밖에는 확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해 잘 안 보이는 겁니다, 본능이 뭔지. 하지만 신경증 환자의 사례에서라면, 본능을 통제하는 것에 문제가 생긴 사람의 경우라면 어떨까요? 증상의 종류나 그것의 의미를 판단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본능의 작용을 훨씬 용이하게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요? 프로이트가 그간 관찰해온 분석의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신경증은 환자의 성적인 삶과 어떤 식으로든 밀접한 관련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지 않은 영역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신 분석의 발전 과정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성적 본능에 관련한 것이었다고 프로이트는 밝히지요. 자 이렇게 본격적으로 본능을 탐구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의식의 통제 아래에서 본능의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정상인의 사례가 아닌 증상이라는 영역에서 본능의 작용이 통제 없이 여실히 드러나는 특수한 사례를 중심으로 이 주제를 살펴볼 것, 그리고 이 특수한 사례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열쇠인 성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는 탐구의 개요가요. 이렇게 해서 프로이트의 성적 본능을 탐구하고, 성적 본능에서 본능 일반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요소들을 파악한 뒤, (프로이트가 자아 본능이라고 부른 바 있는) 성적 본능이 아닌 다른 본능의 성격 또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실마리가 생긴 셈이지요.

 

 

… (중략) …

 

 

지난 밤 다룬 나르시시즘의 문제에서부터 오늘 다룬 본능의 문제, 그리고 다음 시간에 다룰 쾌락 원칙과 자아와 이드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들은 프로이트 사상의 백미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초기의 임상 연구나 사례 분석에 비해 훨씬 흥미롭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프로이트만의 독창적인 관점과 탐구의 방식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또한 <강의>가 주로 정신 분석이라는 주제를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탐구의 거시적인 흐름을 소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근본 개념>에 실린 텍스트들에서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의 핵심 주제들에 과감하게 달려들어 씨름합니다. 때로 텍스트에서 주제가 완벽하게 해명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에서조차, 곱씹을수록 프로이트가 왜 이런 방식, 이런 관점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을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지요.

 

이런 사정은 우리 세미나에서 시간 관계 상 다루지 않는 논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능의 문제를 다룬 프로이트는 다음 텍스트에서 이제 본능에 대한 억압이라는 문제를 다루는데, 그에 따르면 억압은 본능에 내재된 방어 기제가 아닙니다. 단순하게 보이는 이 지적이 왜 중요한가 하니, 본능과 억압을 별개의 차원으로 완전히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판단이 이것과 관련한 주제들, 즉 증상의 형성, 자아와 이드의 문제, 자아와 초자아의 관계, 쾌락 원칙의 문제 따위와 강력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으로 인해 의식으로의 진입을 거부 당한 본능의 특정한 대상, 혹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본능은 억압이 발생한 바로 그 자리에 마치 돌기둥처럼 멈춰 섭니다. 기본적으로 본능은 대상에 도달할 수 없을 때 대상을 바꾸거나, 혹은 성공의 척도를 낮추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만족에 도달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렇게 만족을 추구하는 힘과 흐름으로서의 본능이 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방식으로 쾅, 억압이라는 강력한 벽 앞에 부딪치게 되면 마치 교통사고 현장과도 같은 일종의 고착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억압으로 인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뿐이지, 본능의 힘은 소진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힘의 작용이 억압으로 인해 좌절 당한 대상의 대체물을 형성하고, 증상을 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증상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저 유명한 명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이 문제로 다시 귀환하게 되겠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6. 14.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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