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

June 7, 2019

지난 시간까지 <강의>를 통해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아, 억압과 저항, 리비도, 쾌락 원칙과 자아 본능 등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 청중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강의었던 만큼 강의에서 프로이트는 줄곧 정신 분석 운동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길목들을 소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요. 경험적 사례를 제시하는 것도 설명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논증이 필요하거나 가능한 반론에 대한 검토와 반박이 필요한 경우, 또 프로이트의 주장만으로는 충분히 납득하기 어렵거나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많은 내용을 다룰 때조차 다소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한 모습도 종종 보였습니다.

 

세미나에서 우리는 최대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좇아가고자 노력하면서, 강의라는 말하기의 기록이 가진 특수성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강의 전체의 큰 구도 아래에서 매시간 이루어지는 한 번의 강의라는 사정을 감안한다면, 강의는 강의 도중 마주친 특수한 문제들을 끝까지 파고들어 해결하기보다는 다음 강의를 예비하거나 전체 구도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특히 쾌락 원칙과 리비도 본능, 자아 본능 같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개념들은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각각의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특수한 관계에 처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하나의 개념, 하나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모두 다루(면서 강의라는 제한적인 논의의 기회를 소진하)기보다는, 우선 중요한 개념들을 소개하고 그 뒤에 관련된 주제를 다룰 때 이를 보완하는 방식의 설명 방식을 택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겠지요.

 

약 2년에 걸친 강의를 모두 마친 시점에서 강의 내용을 맨 앞에서부터 종합적으로 재구성해보면 이런 특징은 더욱 도드라집니다. 프로이트는 우선 사소한 실수 행위들관 관련한 가벼운 주제들을 다루면서 정신분석의 가장 중요한 발견인, 인간의 의식은 단일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러니까 정신분석을 모르는 사람이든 정신분석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든 쉽게 동의할 수 있을 만한 가볍고 단단한 발견들로부터 시작해, 꿈에 대한 짧은 논의를 거쳐 인간의 정신 작용 전반의 문제를 구석구석 살펴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다른 모든 설명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런 방식 또한 일장일단이 있을 겁니다. 가장 큰 단점이라면 세밀한 논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일 테고, 가장 큰 장점이라면 프로이트를 따라서 정신 분석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뼈대와 바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겠지요. 세미나를 다시 시작하는 오늘 밤부터는 이제 몇 가지 중요한 주제를 뽑아서 프로이트가 생전에 직접 발표했던 원고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맨 처음 다룰 주제는 나르시시즘입니다. 이 논문을 맨 먼저 다루는 이유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까요. 우선 논문 발표 시점입니다. 프로이트는 초기 임상 진료를 중심으로 한 탐구에서 1910년대 후반을 지나며 자신이 탐구 과정에서 발견, 설정한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의 정신 작용, 정신의 작동 과정 전반을 종합적으로 해명하고자 시도하는데, 1914년 발표한 이 논문은 이러한 방향 전환, 내지는 이후 프로이트의 탐구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와도 같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어느 정도 몸풀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개인의 경험을 통해 쉽게 떠올려볼 수 있는 사례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나르시시즘의 원천으로서 가족 내에서의 유년기라는 개인의 특수한, 그러나 대체로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논의를 개진한다는 점이나, 자아가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는 과정, 또 이를 바탕으로 사랑의 대상이나 그 대상과의 관계가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통찰 등이 그렇습니다. 다른 한편 쉬운 논의들로 핵심적인 주제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단순히 다루는 논의 속으로 한정되지 않는 폭넓은 사정 범위를 갖는다는 것 또한 이 논문의 분명한 장점입니다. 가령 프로이트가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듯이, 하나의 본능 속에 대상을 향한 리비도와 자아 본능이 함께 존재하는지, 혹은 상반되는 경향의 두 본능은 애당초 서로 별개의 것인지와 같은 논의가 그렇습니다. 프로이트 자신도 고백하듯이 이 주제는 여기에서 아직 명확하게 해명되지는 않는데, 그가 앞으로 어떻게 이러한 고민을 이어가는지 잘 찾아보는 것 또한 흥미로운 관전 요소가 되겠지요.

 

자, 프로이트는 먼저 임상 의학적 영역에서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앞선 사례들을 간략히 검토하면서 탐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리비도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다룰 것임을 시사하지요. 프로이트는 먼저 이 문제와 관련된, 신경증의 특수한 경우를 제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신경증 환자는 병의 진행에 따라 현실과의 관계를 포기합니다. 즉 현실 세계를 이루는 사실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닌, 자신의 망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예컨대 주변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괴롭히고 해치고자 한다는 피해 망상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별 의미 없는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오인할 겁니다. 그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는 작은 농담 하나도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찾아간 식당이 우연히 문을 열지 않았다면 이 역시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한 누군가의 술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망상이란 그런 것이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런 신경증 환자들 또한 사람이나 사물과의 성애적 관계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환상 속에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적 대상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꺼낸 상상의 대상으로 대체하거나 현실적 대상을 상상의 대상과 뒤섞어 버리는 것일 뿐, 어쨌거나 대상으로서 외부 세계를 향한 관심 자체는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히려 대상을 향한 관심 자체는 정상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크게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조발성 치매나 정신분열 같은 이상 정신(paraphrenie) 환자의 경우 일반적인 신경증 환자와 사정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는 자신의 리비도를 외부 세계의 사람이나 사물에서 완전히 철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환상 속의 다른 대상으로 관심의 목표를 대체시키지도 않습니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탐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이 쾌락 원칙에 따르는 리비도 충동을 갖고 있다면, (이들 환자들의 사례처럼) 외부 대상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외부 대상에서 벗어난 리비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프로이트는 병에 걸린 사람, 심기증, 즉 건강염려증에 걸린 사람, 그리고 연인 간의 관계에서 외부 대상을 향한 리비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볼 것은 제안합니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병에 걸린 사람의 경우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 즉 신체 기관의 통증과 불쾌감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은 외부 세계의 대상이 자신의 고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 대상들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쉽게 말해 아프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지요. 극심한 고통은 외부 세계를 향한 관심을 차단하고, 오직 고통 그 자체로 모든 관심을 집어삼키기 마련입니다. … 고통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 고통 받는 사람의 경우라면 심지어 그가 평소 사랑했던 대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철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동안에는 사랑을 중단하는 것이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우선 자신의 리비도를 자아로 집중시킨 뒤, 병에서 회복되면 다시 그 리비도를 밖으로 발산할 수 있습니다. 심기증 또한 신체적으로 고통스러운 느낌을 병행한다는 점과, 리비도의 분배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 질병과 유사합니다. 고통의 실재성에 있어서만 차이를 보일 뿐, 심기증 환자는 외부 세계의 대상으로 보냈던 관심과 리비도를 후퇴시키고 대신 자신이 온 신경을 쓰고 있는 신체 기관에 그의 관심과 리비도를 집중시키는 경향을 보입니다.


 

… (중략) …

 

 

이미 너무 널리 알려진 장면이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의 상징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나르키소스 신화를 굳이 다시 소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실은 신화 속 이야기의 구성에 나르시시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자아를 향한 사랑이 아닌 자아 이상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나르시시즘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요. 흔히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서 그가 자기자신을 사랑한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정작 그가 사랑한 것은 자기자신이 아닌 어디까지나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이상을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자아의 자신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이 아닌, 자아가 자신을 존중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아 이상, 즉 이상적 자아와의 관계에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병리적 증상의 맥락을 찾는 것은 사실 퍽 흥미로운 발상의 전환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 삼을 만한 이상적 모습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바로 그것이 실질적으로 자아를 억압하는 작용 또한 수행한다는 점, 또 자신을 향한 관심과 외부 세계를 향한 관심의 방향 설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경우처럼 쾌락과 만족이라는 문제에 있어 리비도의 역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 등을 폭넓게 고민할 수 있는 중요한 맥락을 이루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가 이 논문을 작성할 당시 가졌던 가졌던 이러한 발상은, 나중에 초자아라는 개념을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 시간에 다룰 텍스트인, ‘본능과 그 변화'를 통해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6. 7.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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