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

May 25, 2019

 

지난 시간 신경증과 리비도의 퇴행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았지요. 현실에서 쾌락과 만족을 획득하지 못한 리비도는 만족스러웠던 과거의 상황, 혹은 대상을 향해 퇴행할 수 있는데, 그러한 퇴행이 의식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때, 즉 의식이 자아의 이러한 퇴행적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고 외면할 때 억압된 만족은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뼈대만 간단히 추린다면 현실에서의 만족의 좌절과, 이에 따른 리비도의 퇴행과, 그러니까 퇴행을 통한 특정한 상황이나 대상으로의 회귀와, 회귀 이후의 만족과, 퇴행적 만족에 대한 거부감과, 만족과 거부감의 혼재와, 이에 대한 자아의 억압이 증상이라는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도식은 어디까지나 참고를 위한 발판에 불과합니다. 즐거움은 뼈와 살 양쪽 모두에 있으니까요.)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리비도 본능과 자아 본능을 구분하고 있는데, 두 가지 본능은 증상 속에서 혼재되어, 특히 서로 대립하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또 강의에서 프로이트는 성적 본능이라는 표현과 리비도 본능이라는 표현, 혹은 리비도라는 표현을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따져본다면 이러한 용법이 학술적으로 적절하다고 보기는 물론 어렵겠지만, 강의가 글쓰기가 아닌 말하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했을 때 논의에서 개념의 엄밀함을 조금 양보한 대신에 설명이 도달하는 의미의 파장을 확대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적 본능, 리비도는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좌절되지 않고요. 현실의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형식적으로 좌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실의 이면에서 퇴행이라는 방식으로 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우회 속에서 리비도는 절대 좌절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요, 현실에서 좌절한 리비도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만족하는 그 지점까지 무한히 퇴행할 수 있니까요. 앞서 몇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리비도의 이러한 특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점은 강의 시점 이후인 1920년대에 이르러 얼마간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 정도만 간단히 덧붙여 놓겠습니다.

 

신경증의 여러 증상 가운데 나르시시즘은 리비도 작용의 결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예시입니다. (혹은 다양한 유형의 신경증 가운데, 라고 표현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군요.) 나르시시즘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은 세미나의 3부에서 따로 시간을 할애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분석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볼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전이(ubertragung, transference)는 분석 과정에서 증상에 연관된 과거의 특정한 경험과, 그러한 경험에 얽혀 있는 피분석자의 감정이 분석자를 향해 이전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성장 과정에서 겪은 모종의 경험에 기인하는 부모에 대한 적대감이, 분석 과정에서 피분석자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 가운데 분석자를 향해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감정의 반대 방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감정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감정, 이를 테면 피분석자가 분석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프로이트가 처음 생각했던 전이의 문제는 주로 분석자와 피분석자 사이의 관계에 한정됩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그와 인접한 다른 대상으로 옮기는 상황과 같은 사례에 대해서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라캉 같은 경우라면 전이가 단순히 감정의 문제나 주체의 상상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닌 주체와 타자 양쪽에 작용하는 상징계의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고요. 이렇듯 프로이트를 넘어 정신분석이라는 사유의 흐름 전체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전이라는 문제가 상이한 맥락 속에 자리한다는 사실 정도만 짚어 두고 프로이트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처음 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프로이트는 단순히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감정이 옮겨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분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환자가 분석가에 대해 보이는 특이한 감정의 투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개념을 수정하여 구체화 시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초기의 분석가들은 전이라는 현상을 우연으로 치부했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투사하는 경우든,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하는 경우든 분석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관계의 다양한 양상일 뿐, 이런 것들은 분석이 의도하지도 촉발하지도 않은 우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환자가 의사에게 애정을 품는 일이 규칙적으로 발생한다면, 뭔가 감정의 교환이라는 문제가 발생할 법한 특정한 사례뿐 아니라 그런 상황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사례에서도 어김없이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심지어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망측한 상황에서도 되풀이해서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를 단순한 우연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증상과 치료라는 본질 자체와 내밀한 관련이 있는 사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프로이트를 따라서 전이가 발생하는 추이를 재구성해 봅시다. 신경증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자신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김없지요. 설령 그의 관심이 외부의 어떤 대상에 편집적인 방식으로, 집착적인 수준으로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신경증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상의 객관적 속성이나 의미가 아니라, 현실의 맥락과 무관하게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갖는 특수한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즉 신경증자는 대상과 자신이 맺는 특수한 관계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자기자신에게 몰두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른 대상, 다른 사람, 다른 관계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망상의 문제를 다루며 이미 이 지점을 지나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경증자가 한 인간으로서 외부에 아주 특이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분석자에 대해서는요. 분석 과정에서 신경증자에게는 분석자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이 자기자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자기자신의 문제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이제 그는 다른 일에는 무관심하고, 의사에게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당연히 분석 과정도 순조롭겠지요. 이렇게 일정 기간 동안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순탄하게 흘러갑니다. 환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달리 의사를 대할 때면 예의 바르고 세련되게 행동하고자 하고, 의사가 병자에게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의 장점과 덕성을 내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날씨가 매일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습니다. 상황이 매번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환자는 더 이상 분석에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치료를 받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의사와 앞서 맺은 관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고착의 문제를 다루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환자는 마치 증상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것처럼만 보입니다.)

 

이런 감정들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요? 단순히 의사가 매력적인 사람이라거나, 분석 과정에서 권력 우위에 있기 때문일까요? 혹은 어느 대화 도중 아마도 실수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그가 환자를 다그쳤거나 윽박지르듯 고백을 종용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예외라고 볼 만한 그런 특이한 상황을 제외하고도 전이의 문제는 거의 모든 사례에서 빈번하게, 예외 없이, 반복해서 나타나니까요.

 

흔히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그런 경향 만큼이나 인과나 맥락이나 속성을 온전히 파악하지 않은 채로 예단하는 경향 또한 있지요.) 감정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은 그것이 느껴질 때의 선명함과 강력함으로 인해 마치 자기자신이 스스로의 원인인 양 감정의 기원과 구조를 헤아리는 것을 가로막지만, 앞선 강의에서 프로이트가 불안이라는 문제를 다루며 간략히, 그러나 분명하게 언급하듯이 어떤 경험에 대한 대응물로서 내면의 작용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을 산출하는 내면의 작용을 살펴보지 못할 까닭 또한 없겠지요.

 

자, 감정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번 세미나의 주제를 벗어나는 일이 될 테니 전이의 문제로 돌아옵시다. 분석 상황의 정황과 맥락을 두루 따졌을 때 환자가 의사에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일정 강도 이상의 강렬한 호감을 가질 이유도, 그렇다고 뚜렷하게 드러나는 적대감을 가질 까닭도 없다면 이런 감정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이런 감정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실천적인, 기술적인 차원에서 환자가 투사하는 감정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선 차치하고서라도, 분석 과정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사안이라면 필경 어떤 식으로든 증상과 그것의 작용에 관련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전이에서 환자가 의사에게 투사하는 감정은 분석 과정에서 환자가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지나고 있는 과거의 경험, 혹은 증상과의 특정한 연루 속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증상에 연루된 감정이 그것을 건드리고 있는 대상에게로 옮겨가는 것이지요. 증상을 다루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증상을 산출한 특정한 경험 주변을 거듭해서 자극하는, 환자가 자각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 그를 옮기려고 하고 있는 바로 그 대상에게 증상에 얽혀 있는 감정을 옮기는 것입니다. 치료를 시작했다고 해서, 분석 과정에서 상태가 호전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증상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간주해서는 곤란합니다. 신경증자의 증상은 완결되거나 경직된 상태에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종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다시 한 번, 고착의 문제를 다루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환자는 마치 증상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것처럼만 보입니다. 이렇게 움직이고 또 저렇게 움직이면서, 나아질 것 같으면 퇴행하고 후퇴하는 것 같다가도 호전하면서, 꼭 특정한 바로 그 상태를 애써 유지하면서.) 그러니까 전이라는 문제는 바로 이런 맥락 가운데 발생하는 독특한 현상인 겁니다.

 

 

… (중략) …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는 깊은 밤 자고 있는 아내와 아내의 품에 잠든 아들을 깨우지 않고 소리 없이 이들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불경은 이 장면을 그가 자기자신의 주인이 된 순간이라고 기록하지요. (물론 깨달음을 향한 싯다르타의 여정은 출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결정 한 번으로, 하나의 결심으로 끝날 일이 아니니까요.) 사실 자기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퍽 이상한 표현입니다. 한편으로 무언가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자기자신의 모습이나 남이 정한 규칙이나 규범을 내키지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 따위야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만, 그런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잘은 몰라도 일단 괜찮은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말도 어쩐지 그럴싸하게 들리고요. 주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을 자신의 지배 아래에 두고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예컨대 이 집의 주인이 나라는 것은 집 안에 어떤 물건을 들이고 내보내는 문제나, 들인 물건을 어디에 놓을지 따위의 문제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의 문제를 자기자신의 문제에 적용해 생각해본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내가 나를 다스린다고 했을 때, 다스림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나이기 때문이지요. 지배하는 주체와 지배 당하는 대상 모두가 똑같은 나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들어맞지 않아 보입니다. 지배하는 나는 동시에 지배 당하는 나이기도 한 셈이니까요.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했을 때, 나의 위치는 지배하는 쪽에 있습니까, 아니면 지배 당하는 쪽에 있습니까? 어떻게 본다면 말장난처럼 보이는 물음입니다만 정신분석이 보여주는 자아의 여러 상황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은유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꿈의 문제를 다루면서, 또 억압과 저항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런 장면들을 지나쳐 왔지요.

 

자, 우리는 잠깐의 휴식을 가진 다음 몇 가지 주제들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강의를 통해 프로이트가 입문자를 대상으로 상정하고 정신 분석의 큰 흐름을 개관하는 것을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중요한 개념들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발언들을 수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가졌던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이를 정정하고 바로 잡았으며, 자신이 발표했던 개념이나 이론들 사이에 모순이 생기거나 매끄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끝없이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요. 어쩌면 이런 특징은 그가 선구자로서 피하기 어려운 시행 착오를 겪어야만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프로이트의 생전으로 시대를 국한다면 정신 분석의 발전 과정 자체가 프로이트의 연구 과정과 거의 같은 궤적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요. 그러니까 말 그대로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겁니다, 프로이트는.

 

우리는 프로이트를 뒤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루는 어떤 개념이 프로이트의 저작 어딘가에 명시적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단언하거나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발견하고자 따라가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 프로이트의 정신이랄까요, 아니면 자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종의 스타일이니까요. 남은 이야기는 다음 세미나로 넘겨 두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5. 24.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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