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억압

May 3, 2019

프로이트의 경험에 따르면 그를 찾아온 환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과거의 어느 특정한 부분에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현재나 미래에서는 소외된 채, 마치 빠져나올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의 어느 지점에 자기 스스로를 가둔 것처럼 보였다고요.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들의 이러한 특징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 이미 알려진 바 있는) 외상성 신경증(traumatische neurose)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고 일단 언급합니다. 그리고 강의에서 이제까지 다루어 온, 자발적인 신경증(spontane neurose)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한 일반적인 신경증에도 외상성 신경증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덧붙이지요. 프로이트는 우선 현재로서는 외상성 신경증의 원인과 특징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서를 붙인 다음,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외상성 신경증의 바탕에는 사고 순간에 대한 고착이 깔려 있다는 사실은 파악할 수 있었다고 밝힙니다. 바로 이것이 일반적인 신경증이 외상성 신경증과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기도 한데, 신경증자는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자아가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되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태는 증상을 야기합니다. 증상은 비정상적이거나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자아의 특징적인 행동과 행태 속에 존재합니다. 그저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인 어떤 행동을 두고 증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증상이라는 개념은 반복을 핵심 요소로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증상이 고착과 반복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고착이라는 측면은 비교적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고착의 세부적인 구성과 동학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자아가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꼼짝도 할 수 없이 사로잡히는 것이라는 고착의 도식 자체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반복입니다. 증상 속에서 자아는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저 증상으로서의 어떤 행위나 감정 처리가 반복해서 나타날 뿐인 것일까요? 이렇게 본다면 자아가 ‘왜’ 그것을 반복하는가라는 물음이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또 왜 하필이면 ‘그것을’ 반복하는가라는 보다 구체적인 물음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요.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본 사례를 참조한다면 노부인은 왜 자신이 받은 투서에 담긴 내용이 얼토당토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처녀의 이름만 나오면 어김없이 망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까요? 또 남편과 별거 중인 아내는 왜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하녀를 불렀다가 그냥 내보내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증상의 반복을 단순히 어떤 행위나 감정의 반복이라고 간주한다면 증상에서 반복이 갖는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즉 증상이 반복하는 것은 증상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증상을 다루면서 고착과 반복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던 지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프로이트는 증상에 있어 고착과 반복이라는 문제를 외상성 신경증의 특징과 관련 지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시대와 달리 요즘에는 흔히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혹은 어쩐지 조금 더 전문적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보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개념이 있지요. 이런 식의 명명법이 간과하기 쉬운 문제는, 정신이 외상을 입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외상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왜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외상 이후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장애(라고 할 만한 문제)가 발생했다, 라는, 일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전문 용어처럼 보이는 이런 서술적인 명명 방식은 정작 증상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는 게 없습니다. 자, 증상 이면에는 고착이 있습니다. 증상은 곧 반복이고요. 증상이 반복하는 것이 단순히 감정 처리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고 했을 때, 증상이 반복하는 것은 결국 고착에 대한 반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착을 유발한 외상적 상황을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그걸 왜 반복하느냐, 입니다. 외상이라고 할 정도로 자아에게 강한 충격을 준 어떤 체험의 순간이 있다고 했을 때, 이전까지의 정신분석이 자아와 인간의 정신 구조에 대해 밝혀낸 사실에 비춰 판단한다면 자아는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사실 이건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일반적인, 대개의 경우라면 고통을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지요. 무엇의 반복인가라는 문제에 앞서 왜 반복하는가의 문제를 먼저 다뤄 볼까요? 일단 쾌락의 경제학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 봅시다. 자아가 고통을 반복하고 있는 까닭은 고착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외상적 상황은 자아가 자신이 기대하거나 투사한 만큼의 쾌락을 환수할 수 없는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강력하게 자아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즉 자아가 외상적 상황에 강제적으로 접합되어 있기 때문에 매번 불가피하게 그 상황으로 불려가듯 증상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겠지요. 가설의 논리 구조 자체는 일단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증상의 바탕에 있는 고착이라는 개념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고요. 자아의 입장에서 증상의 반복은 자아가 피할 도리 없이 ‘반복 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곧 난관에 봉착합니다. 불가항력적인 고통의 반복이라는, 자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강력한 적자 구조는 기본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자아가 버틸 수 있는 작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두 번쯤이야 어떻게 버텨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증상의 반복이 이렇게 강제적인 고통을 자아가 손 쓸 도리 없이 반복하는 것이라면 자아가 왜 파산하지 않는가라는 문제가 곧장 등장합니다. 물론 파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증상이 자아의 파국이라는 결말로 이어지는 사례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의외로 증상 속에서 자아는 안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경험 속에서 발생하는 쾌락의 교환 관계를 놓고 자아가 일방적으로, 강제적으로 고통이라는 손실을 반복해서 감당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만큼 자아는 매우 안정적으로 증상을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손실은 있는데 딱 파산하지 않을 정도로만 손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면, 단순히 과거에의 접합과 강제 회귀라는 공식만으로는 이 관계를 썩 매끄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반복에 모종의 긍정적인 기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반복에서 자아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 따져보자는 것이지요. 적자라고 해도 뭔가 얻는 게 있으니까 교환을 지속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관점은 일견 아주 타당하게 보입니다. 이를 테면 자아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 체험의 시점에서 적절하게 소화시킬 수 없었던, 그러므로 외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체험의 충격을 반복을 통해 완만하게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개 어떤 경험이 주는 충격은 그것에 대한 준비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지요. 흔히 어떤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기에 앞서 상대방에게 혹시라도 놀라지 말라,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언질을 먼저 건네는 것처럼, 어떤 종류의 충격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준비를 한 상태에서 사건을 조우하는 것과 전혀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사건에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설령 애당초 준비한다고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성격의 충격이 아닌 경우조차도 준비가 있는 것과 준비가 없는 것 사이의 차이는 퍽 크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내가 운전하면서 앞 차를 받는 것과 뒤에서 갑자기 받히는 것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지요.)

 

증상이 아닌 경험 일반의 차원이나 논리 구조만 놓고 본다면, 경험의 반복과 충격의 완화라는 도식은 상당히 타당해보입니다. 첫 체험의 장면에서는 자아가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는 강력한 사건의 효과가 발생하는 바람에 자아로서는 그 상황에 고착될 수밖에 없었지만, 반복을 통해 차츰 체험의 충격을 완화시키면서 외상적 경험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안정적으로 편입시킨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가설도 곧 똑같은 난관에 봉착합니다. 반복의 주요 기능이 손실의 보상에 있다면, 손실이 메워질수록 보상으로서의 반복이 줄어들거나 손실이 다 메워진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반복이 소멸해야 합니다. 즉 증상이 줄어들거나 사라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지요. 그저 반복, 언제나 같은 반복입니다.

 

증상은 외상을 유발한 상황의 반복과 밀접한 연관 속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반복의 의미는 현재로서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채 남은 것으로 보이는군요. 프로이트의 초기 연구나 그가 강의를 진행했던 시점에는 증상으로서의 반복이라는 문제가 아직 선명하게 드러나기 이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에서 프로이트가 제시한 내용만으로는 이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 강의에서 프로이트는 고착과 반복이라는 증상의 중요 속성을 간단히 제시한 뒤, 치료의 기술로서 정신분석이 갖는 의미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가지요.

 

사실 이 문제는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시점에서 프로이트가 이전까지의 자신의 관점을 전면적으로 재평가하고 수정하는 계기로 이어졌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증상의 반복은 상당히 기묘한 문제로 보였을 겁니다. 그가 강의 과정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분석과 치료 과정에서 환자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경향과도 닿아 있을 테고요. 프로이트를 찾아온 환자들은 증상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뭐 자기 스스로 목놓아 호소하는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증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사를 찾았겠지요. 그런데 분석 과정을 통해 증상의 의미가 드러날 때쯤이면, 즉 증상의 제거가 임박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다시 병세가 악화되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마치 증상을 포기할 수 없다는듯이, 증상을 포기하지 않고 꼭 붙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증상은 자아에게 분명하게 고통을 야기하는데 왜 자아는 고통의 제거를 원하면서도 왜 증상을 놓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이런 의문이 갈수록 프로이트를 사로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20년대에 접어들며 프로이트는 결국 인간의 정신이 단순히 만족과 쾌락만을 추구하거나 긴장의 완화라는 일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기에 이르는 것이지요. 이런 전환은 1920년의 ‘쾌락 원칙을 넘어서', 1923년의 ‘자아와 이드' 등의 논문에서 잘 나타납니다. 우리는 세미나의 3부에서 다시 이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 (후략)

 

 

 

2019. 5. 3.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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