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정신 의학

April 27, 2019

러시아의 소설가 스트루가츠키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라는 작품은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중 인물 말랴노프는 천문학자인데, ‘확산된 은하 물질에 대한 별의 반응’이라는 논문의 발표를 앞두고 있습니다. 논문을 아직 발표하지도 않았음에도 대단히 놀라운 연구 성과가 논문에 담겨 있다는 것이 동료 연구자들에 의해 알려지면서 그가 논문을 발표하기만 하면 노벨상쯤은 당연히 그의 몫이 되리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논문 발표를 앞두고 있는 그에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머리에 떠오른 공식을 정리해서 공책에 옮겨 적으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매번 전화가 걸려오는 통에 좀처럼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번잡한 낮 시간을 피해 조용한 밤 시간에 생각을 정리하고 연구를 진행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과 별 관련도 없는 이상한 방문객들이 그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기도 하고요. 밤에 불쑥 그를 찾아왔던 이웃집 물리학자는 그에게 무언가 전하려던 말이 있었던 것도 같았는데, 우물쭈물 돌아간 그 다음날에 갑자기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학자들이 더 있었습니다. 말랴노프는 자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웃집 물리학자 말고도 다른 물리학자는 물론 천문학자나 생물학자, 또 과학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어떤 동양학 연구자도 이상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소설의 중간 과정을 조금 생략하고 건너 뛰어볼까요, 말랴노프의 친구인 수학자 비츠로스키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우주의 어떤 힘이 특정 연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밝혀지면 우주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어떤 공식이 있는데, 인간에 의해 이것이 밝혀지려 할 때마다 우주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공식에 접근하거나 그 공식을 밝혀낼 것 같으면 우주가 그것을 방해하지요.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군요. 말랴노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미 상당히 진척된) 자신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려고 하고요. 그럴수록 이상한 일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가 도저히 연구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층간 소음 유발자가 옆집으로 이사를 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200년만이라는 유래 없는 폭염이 레닌그라드를 덮치기가지 하지요. 그의 연구를 막기 위해, 그의 연구가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어 세상이 끝나지 않도록,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아직 10억 년이나 남았으므로!

 

작품은 1970년대에 소련의 소설가가 발표한 소설이므로 일종의 풍자로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연구자가 무엇을 위해, 왜 연구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프로이트 앞으로 가져 와 봅시다. 프로이트는 무엇 때문에 정신분석이라는 이 이상한 연구를 수행하는 걸까요? 그 자신과 그의 연구 결과를 둘러싼 무수한 오해와 편견과 비난과 냉소에도 그가 (스스로 고집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자신의 연구를 이어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과학자 집단의 정치성이나 과학자 개인의 특성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리 생산이라는, 과학이라는 특정한 사고의 방식, 혹은 탐구의 규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논의들을 이 자리에서 전부 다루기는 아마 어렵겠지요. 정신분석 강의의 2부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막연하게나마 한 가지 언급할 수 있는 점은 생각보다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어떤 마음의 결론을 가지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겁니다. 이건 사실의 왜곡이나 결과의 조작, 원하는 혹은 필요한 방향으로 결과를 유도하기 위한 교묘한 방법들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과학자 개인 또한 사람이므로, 관심사의 설정부터 시작해 인간적인 경험과 그가 받은 교육, 그가 속한 학파와 학풍, 이론적 관점과 견해, 그가 가진 입장들이 물론 그의 연구에는 묻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학자가 연구를 수행할수록 기존에 자신이 수행했던 연구의 내용을 뒤집기보다는 기존 연구를 보완하거나 강화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확장하기가 쉽고요.

 

프로이트의 경우는 어떨까요? 언뜻 보기에 정신분석이라는 특수한 기법에 (정신분석을 기술, 의술이라고 분류해야 할까요? 아니면 연구 방법이나 연구 분야라고 분류하는 편이 적절할까요?) 대해 완고할 정도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도 같지만, 실상 프로이트의 연구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때로 자신이 찾았던 발견을 적극적으로 폐기하면서까지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해부학에서 시작해 신체적 반응을 동반하는 정신질환을 다루는 실험적인 치료 기법에 대한 관심을 지나 그가 정신분석이라는 특수한 영역을 정초하기까지, 또 그 이후에도 그가 이 영역 안에서 수행한 작업들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요.

 

새롭게 강의를 다시 시작하며 프로이트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양해를 구합니다. 이전처럼 토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히면서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실수 행위나 꿈의 경우라면 특별한 연구 경험이 없더라도 건강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합리적인 비판과 사고를 전개할 수 있겠지만, 이제부터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경험 없이는 어쩌면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담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의 경우 자신을 의심하는 일에 대한 연습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 게 우선이지, 내가 느끼는 이 허기가 진짜 허기인지, 타당한 허기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판단하는 일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화나게 만든다면 화를 내든지 아니면 화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지,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한지 혹은 지금 내가 가진 감정의 정체가 화가 맞는지 따지고 있다면 아마 놀림을 피하기 어렵겠지요.

 

경험과 감정과 감각이 이렇게 강력합니다만, 프로이트에 따르면 그것은 지성의 특징은 아닙니다. 지성은 거의 아무런 반발 없이 자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즉각적인 확실성과는 아주 거리가 멀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는 확실성이란 어떤 주제에 대한 힘들고 지난한 작업을 집중적이고 심층적으로 이어오며, 그 과정에서 놀라운 장면들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첫눈에 반하는’ 것처럼 성급하게 가질 수 있는 확신들은 지성의 영역에서는 온당하지 않다고 덧붙이면서요. 프로이트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강의에서 하는 말들을 쉽게 믿지도 단순히 거부하지도 말라고, 일단 귀담아 들은 뒤 그것이 당신들의 내면에서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숙고하라고, 나는 나의 주장에 대한 어떤 믿음도 요구할 생각이 없다고, 그저 당신들의 생각을 자극하고 편견을 뒤흔들고자 할 뿐이라고.

 

 

… (중략) …

 

 

프로이트가 이번 강의에서 다루는 노부인의 사례는 정신분석이라는 영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발견을 시사합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실수 행위나 꿈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수 행위에 있어서 행위자는 부지불식 간에 저지른 자신의 어떤 실수를 타인의 지적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경우에 따라 자신의 행위 이면에 자신이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다른 동기들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나 은연 중에 자신의 속내가 실수에 묻어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거꾸로 실수를 통해 깨닫지 못했던,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다른 생각들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이 가운데에는 그가 도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생각이나 감정도 있습니다. 그럴 때라면 실수 이면에 어떤 종류의 작용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지요. 그가 평소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기 인식과 실수를 유발한 동기가 멀다고 느낄수록 더욱 완강하게 부정하려 들 겁니다.

 

프로이트가 이번 강의에서 다루는 노부인의 ‘질투 망상’이라는 사례를 본다면, 망상에 사로잡힌 부인은 자신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왜 그러한 종류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현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인의 망상과 이로 인한 고통은 그치지 않았지요.

 

문제는 이 지점에서 생깁니다. 현실과의 맥락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러니까 망상이 사실이 아닐 뿐더러 현실에서 어떠한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해서 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망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걸까요? 망상이 현실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실에서의 사실 관계만으로 망상의 기원과 전개와 영향과 효과를 모두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낮의 잔재가 꿈-작업의 질료로서 활용되지만, 낮 동안의 경험만으로 꿈의 모든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렇다면 이 망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 이후에도 망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공포에 질린 사람에게 두려워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 보여도 그의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화가 난 사람에게 사실은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화를 삭이지 못하는 (오히려 부추기는) 상황에 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단순히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거나 어리석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문제일까요?

 

자, 망상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일단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둡시다. 아직은 어떠한 확신을 갖기에도 이릅니다. 의심이 믿음의 토대인 것처럼, 확신은 망상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프로이트는 앞서 실수 행위와 꿈의 연구 과정에서 선보인 바 있는 사고의 기술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보여줍니다. 사소한 실수들로부터 시작해 인간 행위 이면에 얽혀 작용하는 다양한 동기들의 문제를 규명하고, 어린 아이의 꿈을 통해 꿈 일반의 문제로 나아가고, 증상으로서의 망상이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세계 인식 일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지요. 정상성을 기준으로 병리성을 판단하는 것, 즉 정상성의 예외 범주로서의 실수와 망상들, 병리적 증상이나 정신 이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보이는 대상들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이라는 탐구 대상에 거꾸로 접근하는 것이지요. 칸트가 일찍이 전환의 기술로서 선보인 바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군요. 보기 좋게 일반성의 범주를 설정한 다음, 자신이 설정한 일반성을 사수하기 위해 일반성에 부합하지 않는 요소들을 지속해서 배제하는 방식을 좇아간다면 (아마 보기에는 그럴 듯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실체 없는 앙상한 우상만이 남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4. 27.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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