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성취

April 12, 2019

… (중략)

   

 

정신분석에 있어 꿈이 갖는 의미와 꿈의 여러 특징들을 살펴본 뒤 프로이트는 이제 꿈-작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다루고자 합니다. 꿈의 ‘소원 성취(wunscherfüllung, wish-fulfilment)’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낱말에서 바로 드러나듯이 소원 성취란 말 그대로 꿈-작업을 통해 원했던 어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면을 방해하는 내외부의 자극에 대응하는 정신의 활동을 꿈이라고 파악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낮 동안에 충족되지 않았던 소망들이 꿈-작업을 거친 뒤 외현적 꿈으로 나타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어린이의 꿈처럼 충족되지 않은 소망과 외현적 꿈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쉽게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꿈이 그런 것처럼 꿈-작업 이전의 본래적 요소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 해석의 본래 의미는 감춰진 어떤 것을 찾는 것이라고 했었지요. 같은 의미에서 라캉 또한 한 세미나에서 “자신은 언제나 발견할 뿐”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자, 낮의 소망 가운데에는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지 못 했다거나 날씨 때문에 소풍 계획이 틀어졌던 상황처럼 자신이 무엇을 원했고, 자신의 원했던 소망의 달성과 좌절 여부를 비교적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원했는지조차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는 어떤 소망이나 감정들 또한 있기 마련이지요. 또 개중에는 단순히 순식간에 지나쳤기 때문에 미처 지각되지 않은 소망이 아니라 차마 자신이 그것을 원했다는 것을 밝힐 수 없는 은밀한 소망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입 밖으로 선뜻 꺼내기 어려운 소망이나 남들에게 알리기 것이 꺼려지는 소망이 하나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시샘이든 탐욕이든 불만이든 뭐든 바라는 모든 것을 남들에게 조금의 거리낌 없이 모두 꺼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최근 ‘사이다’ 운운하며 유행하는, 생각이 없는 건가 싶을 만큼 하고 싶은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남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유형의 인간상을 분석해보는 것은 일견 흥미로운 작업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 순서를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인간상과 그가 보이는 행태에 사람들이 유독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그러한 행태에 대한 소요가 존재한다, 즉 그에 대한 결핍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내지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겠지요. 언제나 그렇듯, 당대의 세태와 그 시대의 인간상은 서로를 반영하니까요.) 유치하다고 무시 당하거나 파렴치하다고 손가락질 당하거나 돼먹지 못했다 비난 받거나 흉이나 책이 잡힐까 두려워서, 혹은 어쩐지 남세스럽거나 지레 부끄러운 마음에, 남들이 알아차린다면 속물 같아 보이진 않을까 걱정에 꺼내 놓지 못하는 소망을 느꼈던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 없지요. 오히려 사정이야 제각각 다양하겠으나 꺼내 놓지 못하는 소망들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소망과 꿈-작업의 관계에 주목하고, 외현적 꿈의 해석하는 과정에서 꿈에 소원 성취라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자아의 여러 소망 가운데에는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나, 관습과 통념에 비추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들도 물론 존재합니다. 검열은 이 과정에서 작동합니다. 자아가 원했지만, 자아가 구성하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는 부합하지 않는 여러 소망들이 자아에게는 존재합니다. 자신이 그것을 원했다는 사실조차 자아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소망들이요. 어떤 것을 원한다는 사태와 그것을 원하는 자신을 부정하는 사태가 내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균형 위에 자아는 성립합니다. 그것을 소망했다는 사실조차 자아는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그것을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아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문제는 시간을 두고 차츰 더 생각해 봅시다.) 금지된 소망으로 인한 불만족은 자아의 안정성을 끊임없이 위협합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특히나 자아의 휴식과 수면을 방해하지요. 꿈-작업은 꿈의 내용을 통해 자아에게 여러 이유로 금지되고 좌절 당할 수밖에 없었던 소원을 돌려주면서, 동시에 검열을 통해 이러한 소원과 소원의 성취 과정을 왜곡합니다. 왜곡을 일으킴으로써 자아를 안심시키는 것이지요. 간접적으로, 자아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요. 이렇게 자아는 수면을 유지하고 자신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꿈의 원리나 꿈-작업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 또 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이라고 할까요, 꿈 쪽에서나 정신분석 쪽에서나 양쪽 모두에게 있어 마찬가지입니다. 꿈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프로이트의 성과는 단순히 꿈의 중요한 기능을 발견했다, 혹은 꿈-작업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밝혀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다른 쪽에 있어요.

 

낮의 잔재나 언어, 상징들과 같은 질료를 꿈-작업을 통해 외현적 꿈으로 전환하는 모든 과정이 기본적으로 하 사람의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을 때, 검열하는 자는 누구이고 검열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낮 동안 발생하는 일상생활의 검열 상황 속에서는 대체로 검열하는 쪽과 검열 받는 쪽을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답답한 직장 상사 앞에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을 나오는 대로 내뱉을 수 있는 상황은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혹은 명절 때 만나는 집안 어른들이나 시댁 식구들에게 일상의 자잘한 기쁨들을 모두 털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가슴 속의 모든 불만 또한 후련히 쏟아낼 수 있는 상황도 그리 많지 않겠지요. 꼭 상하관계라고 볼 수 있을 만한 인간관계에만 국한된 상황이 아닙니다. 상심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오가며 몇 차례 마주친 것이 전부인 별 관심도 없는 사람과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 있다면, 면전에서 주고받는 말과 행동, 그리고 꺼내지 않고 속으로 갖는 생각들은 서로 다르기가 쉽지요.

 

하지만 꿈에서의 검열을 구분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물론 검열이라는 꿈-작업의 기능을 파악한 이상 검열하는 쪽과 검열 당하는 쪽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검열 당하는 쪽이 자아의 은밀한 소원들이고 검열하는 쪽은 역시 관습, 통념, 도덕 따위라고 도식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분 자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산출하는 파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정신분석이라는 탐구의 가능성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열린 셈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전부 예비적인 검토에 지나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꿈-작업이 검열을 경유하고, 검열을 포함하는 꿈의 최종적인 의미가 소원 성취에 있다고 본다면, 꿈에서 성취되는 것은 정확히 누구의 소원인가요? 검열에 성공한 쪽의 소원이 달성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꿈을 통해 은밀한 소원을 성취한 자아의 소원이 달성되는 것입니까? 성취된 것은 누구의 소원입니까? 자아가 성공을 거둔 바로 그곳에서 자아를 억압했던 ‘어떤 것’ 또한 정확히 같은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앞서 실수 행위를 다루면서 부딪혔던 문제와 똑같은 문제를 꿈을 다루는 상황에서도 다시 만났습니다. 실수한 쪽은 어느 쪽입니까? 프로이트가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소원 성취가 꿈의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꿈, 만족스럽지 않은 꿈, 고통스러운 꿈이 존재합니다. 꿈이 야기하는 감정, 혹은 꿈의 결과물이 단순한 쾌락과 만족으로 수렴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소원 성취가 꿈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이루는 까닭은, 금지된 것에 대한 소망이 자아의 것이듯 그것을 금지하는 의지 (‘의지’가 완전히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역시 자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안’이라는 표현 역시 썩 적절하지만은 않지만 아직은 조금 더 앞으로 가보도록 합시다.)

그저 부주의의 산물로만 보였던 실수 행위와 무의미한 이미지의 잡동사니로만 보였던 꿈에 대한 탐구를 통해, 프로이트는 너무도 당연하게 단일한 것으로 여겨졌던 한 인간이 실은 하나의 완전한 통일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너무나도 자명하게 자신의 것으로 여겨졌던 이 ‘나’ 안에 내가 아닌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매끄러운 표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어떤 틈새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도 이음새가 살짝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쩍쩍 갈라진 균열이, 좁은 틈새 약간이 아니라 큼직한 절단면이 숭숭 보일 정도로.

 

자 우리가 도달한 이곳은 주체와 실재의 구분이라는 라캉의 저 유명한 문제 의식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1부의 마지막 밤을 마치며 프로이트를 흉내 내서, 앞으로의 시간을 향해 몇 걸음 먼저 성큼 건너뛰어 말해볼 수도 있겠군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주체에게 새겨진 이 균열을, 나의 내면에 있는 타자를 밝혀내는 것이라고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0. 4. 12.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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