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행위들

March 22, 2019

사람은 때로 실수를 합니다. 큰 실수나 작은 실수, 치명적인 실수나 바로잡을 수 있는 실수, 남 보이기 부끄러운 실수나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실수 등 실수의 종류도 다양하겠지요. 혹은 말실수나 숫자를 잘못 셈하는 경우, 계단에서 발을 헛딛는 경우나 어딘가에 우산을 깜빡 놓고 나오는 경우처럼 실수를 구분하는 방식도 다양할 수 있겠군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연구의 대상으로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실수 행위입니다. 프로이트를 따라 실수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강의의 순서에 관련한 이야기를 언급해두는 편이 좋겠군요. 강의의 순서와 프로이트의 연구 내지는 그가 탐구한 주제들의 순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가 1915년 3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약 2년에 걸쳐 진행한 전체 강의에서 개별 강의의 주제나 내용이 꼭 연대기 순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연구자로서 프로이트가 가장 먼저 주목한 주제는 실수 행위가 아니지만, 정신분석학의 안내인으로서 프로이트가 가장 먼저 제시하는 주제는 실수 행위인 겁니다.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일일까요? 어떤 학문의 발견과 성과, 혹은 전개나 발전 과정이 반드시 시간 순서를 따라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론 사실들의 선후와 축적된 발견들이 이후의 발견에 미치는 영향은 당연히 시간의 정방향을 따라가겠지만, 그러한 발견들이 이루어진 임의의 시점에서 이제까지의 과정을 가장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이 꼭 시간 순 배열일 필요는 없습니다. 프로이트가 강의를 진행했던 상황처럼 정신분석이라는 주제 자체가 생소한 사람들에게 정신분석을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더 그렇겠지요. 어쩌면 우리의 상황도 비슷하겠군요.

 

자, 어쨌거나 프로이트가 선택한 출발점은 실수 행위입니다. 말하려던 단어 대신 엉뚱한 단어나 틀린 단어를 내뱉는 잘못 말하기(verspreche), 책이나 인쇄물 따위를 읽을 때 쓰인 것과 다르게 읽는 잘못 읽기(verlesen), 다른 사람의 말을 잘못 알아듣는 잘못 듣기(verhören), 누군가의 이름이나 약속했던 날짜가 떠오르지 않는 망각(vergessenheit), 어딘가에 놓아둔 물건을 찾지 못하는 경우(verlegen)나 들고 갔던 물건을 어딘가에 깜빡 놓고 돌아오는(verlieren) 경우 등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실수들이 있지요.

 

실수의 몇 가지 유형들을 일별하며 프로이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의심의 눈초리를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정신 질환이나 심리적 현상 가운데 해명과 해결이 시급한 과제들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누구나 저지르고 누구나 목격할 법한 소소한 실수 행위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정신분석이라는 게 기껏해야 이런 사소한 실수들만 다룰 뿐이라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나 할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는 대답합니다. 기다리라고, 문제의 크기와 징후의 확실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요. 그리고 흥미로운 예시를 덧붙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범죄의 수사관이 되어 현장을 조사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자기 사진이나 명함 혹은 범행의 동기나 방법에 대한 안내문을 현장에 남기고 가는 범인은 당연하게도 없을 겁니다. 수사관이 찾아야 하는 것은 작은 흔적들, 미약하고 불분명할지 모르지만 범행의 정황과 범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들이겠지요. 현장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실수 행위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정도를 넘어 강력하게 권고하기까지 합니다. 이 실수들에 관심을 고정시키라고.

 

사람들은 왜 실수를 할까요? 대체로 실수는 행위의 우스꽝스러움이나 실수가 유발한 파장 때문이 아니라면 으레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실수니까요. 계단에서 발을 헛딛는 일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냥 미처 못 본 것이지요.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생각에 골몰하다가, 며칠 잠을 설쳐 피곤한 나머지, 난간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냥 실수로 발을 잘못 디뎠던 것이지요, 다른 특별한 사정이랄 게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실패가 아닌 실수입니다. 거창한 실패라고 하면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요. 자원이 부족해서, 계획과 상황이 어긋나서, 경쟁자의 등장 때문에, 실패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뭐 굳이 따진다면 실수에도 원인은 있을 겁니다. 사실은 역시나 당연한 일이지요,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따지기로 한 이상 실수의 원인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겠군요. 기분이 좋지 않거나 피로한 경우라면 정상적인 사람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또 지나치게 흥분한 경우에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겠지요. 다른 일 때문에 주의력이 분산된 경우에도 실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대체로 누구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 언급한 피로, 흥분, 방심 등은 결국 주의력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수의 원인이 밝혀졌군요, 주의력 때문입니다. 주의력의 분산 때문이지요. 상황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가 생긴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봅시다,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다면, 집중했다면 실수는 생기지 않을까요? 글쎄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정교한 작업에서도 때로 실수는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 시간이나 정신적, 신체적 역량의 문제로 실수라는 주제를 다뤄야 할까요? 하지만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특별한 주의나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 행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즉 실수 행위와 정상 행위 모두 특별한 수준의 주의나 집중이 요구되지 않는 영역에 같이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진짜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정상적인 행위와 실수를 구분하는 것, 혹은 실수가 생긴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하필이면 그런 실수인가, 라는 문제이지요. 프로이트는 잘못 말하기의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인용합니다. 프로이트가 강의에서 제시하는 사례들을 참고 바랍니다. 따지고 보면 말실수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실수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지요. 첫 번째 계단에서 미끄러질 수도 있고 두 번째 계단에서 미끄러질 수도 있고 세 번째, 네 번째, 열 번째 계단에서 잘못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처럼 계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실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참새를 촘새로 발음하는 일이나, 황새라고 말하는 일이나 참석이라고 말하는 일이나 코뿔소라고 말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안 될 이유가 없지요, 실수니까요. 실수는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일일 뿐, 그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제시한 말실수의 사례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잘못 말하기의 형태로 엉뚱한 낱말이 불쑥 튀어나온 현상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이들 잘못 말하기는 어떤 종류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회의장이 개회를 선언한다고 말해야 할 그 문장에서 개회 대신 폐회라는 낱말을 선택한 상황이나, ‘멋진 모자를 썼다’라고 말해야 할 그 상황에서 ‘뒤집어썼다’고 발화한 그 상황의 이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실수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실수 이면에 어떤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지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추론이기도 합니다.

 

실수 이면에 있는 어떤 의도는 발화 과정에서 일단은 달성되지 못한 의도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수를 통해 발화의 틈새를 비집고 나와 끝내 달성되고 맙니다. 개회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폐회를 선언한 의장에게는 사실은 당시 상황에서 개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므로 차라리 빨리 폐회되어야 한다는 속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장으로서 개회를 선언해야 할 자리에서 그런 속내를 표명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해진 대로 개회를 선언하는 것이 우선은 그의 의도였겠지요. 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낱말은 개회가 아닌 폐회였습니다. 그의 의도는 달성된 것일까요? 의장의 발언에서 달성된 의도는 무엇입니까? 속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의도가 달성된 것일까요, 아니면 그가 속으로 가지고 있던 숨은 의도가 달성된 것일까요?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한 두 개의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흔히 의도라고 지각되지는 않지만 의도라고 분류하기에 적합한 대상으로서, 대화 상황에서 발화 일반의 목적에 해당하는 의도입니다. 누군가를 칭찬한다거나, 질문에 대답한다거나, 뭔가를 부탁한다거나 하는 말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흔히 숨은 의도나 속셈이라고 불리는 진실이 아닌 말하기의 방식은 일단 제외해둡시다. 예컨대 문을 닫아달라는 부탁의 진짜 의도가 문을 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들어선 안 되는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것이라거나, 누군가에게 저지른 잘못을 감추기 위해 괜한 칭찬을 건네는 것과 같은 상황은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의도를 구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요.) 다른 하나는 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의도입니다. 직장 상사가 새로 산 구두를 자랑할 때, 속으로는 정말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당장에 환불을 종용하고 싶을 만큼 형편 없는 디자인의 구두라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면전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적어도 며칠 동안은 (어쩌면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귀찮은 일에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적당한 인사치레를 찾아서 돌려주기 마련이지요.

 

여기까지라면 뭐 특별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있는 말쯤이야 애들이 아니고서는 누구나 다 구분하는 일이니까요. 속으로야 원님도 나랏님도 얼마든 욕할 수 있지만 원님과 나랏님 면전에서 죽일 놈 살릴 놈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앞서 살펴본 실수와 주의력의 상관관계와 별개로, 발화의 두 의도 역시 인간관계 일반의 예의나 관습, 상황과 맥락에 따른 적절한 대화 예절과 규칙들의 차원에서 얼마든지 해명할 수 있는 문제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발화 이면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정도로 프로이트의 탁월함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통찰이 빛나는 지점은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서로 다른 복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은 거의 자명합니다. 당연하지요, 사람은 본래 여러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요. 여러 생각 가운데 말로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한 번에 하나씩입니다. 그 하나들이 모여 복합적인 의미작용을 산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각은 여럿이고, 말은 하나입니다.

 

프로이트가 특별히 재미있는 지점이라고까지 언급하는 문제는 이겁니다. 서로 다른 두 경향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던진 뒤에 바로 뒤이어 그는 청중들에게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하지요.

 

많은 경우 말실수는 화자가 지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말실수는 화자가 무심코 말을 하는 가운데 튀어나온 조각들입니다. 이런 말실수들은 때로 듣는 사람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대화의 맥락과 함께 자연스레 흘러가는 경우도 있고, 듣는 사람은 실수인 줄 알아차렸지만 그가 대화의 상황이나 말하는 이의 의도에 맞춰 의미를 교정하면서 역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자에게 말실수를 일깨워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화자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조차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라면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고 되묻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반응이겠군요. 몇 차례 확인을 거친 다음이라면 ‘아,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은 그게 아니라 이거였다'고 정정할 겁니다.

 

말실수가 특정 의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프로이트가 예로 들었던 축배(anzustoßen)와 트림(aufzustoßen)의 사례를 떠올려봅시다. 은사를 위한 축배를 제안하는 자리에서 트림을 제안한 축사자의 경우, 은사를 향한 그의 존경심이나 축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사를 조롱하거나 자리를 우습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도 없고요.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런 의심을 일축할 겁니다. 불경스런 의도에 대한 의심을 단호하게 부정하겠지요. 마치 심문하듯이 그의 의도를 계속 캐묻는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요? 몇 차례 부정한 다음이라면 오히려 격렬하게 화를 내지 않을까요? 자신의 말실수는 단순히 실수일 뿐, 다른 어떤 의도도 없다고요. 평소의 언행이나 그가 몰래 은사의 험담을 하고 다녔다는 식의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로 보입니다.

 

잠깐 정리를 해보지요.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다거나 두통이 심한 상황처럼 생리학적 이유로 말하는 도중 특정한 숫자나 장소를 떠올리기 어려운 일쯤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주 시끄러운 환경이나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상황처럼 주의력이 분산되는 상황에서도 말실수는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말실수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 가운데 생기는 말실수 가운데 상당수에서 발화 이면에 놓인 서로 다른 두 의도를 확인할 수 있었지요. 이런 말실수 가운데 어떤 경우들은 발화된 의도와 발화되지 않은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실수의 정황과 합리적 추론을 근거로 숨은 의도를 자백 받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살펴본 것처럼 당사자가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종류의 실수도 있습니다. 이 실수가 주의력 분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실수 행위자가 숨은 의도를 자백할 리도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이군요. 그러니까 문제는 이제 다음 차원으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프로이트가 특별히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표현했던, 하나의 말하기 속에 서로 다른 두 의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라는 차원으로요.

 

 

... (후략)

2019. 3. 22.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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