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

January 25, 2019

강의를 시작하며 레비나스는 자신의 기획을 파르메니데스와 결별하려는 시도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살펴본 것처럼 주체는 익명의 존재라는 사태에서 존재자로 홀로 서면서 자유를 거머쥐지만, 그 반대 급부로 철저한 고독이라는 한계에 직면했지요. 흔히 타자라고 하면 나와 다른 어떤 것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기 쉽지만, 레비나스가 꼼꼼하게 검토하는 것처럼 실은 주체는 타자라는 개념과 좀처럼 쉽게 양립하지 못합니다.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주체와 대립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대상의 어떤 성질을 포착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대상과 나 사이에 공통적이고 동일한 어떤 것이 있어야만 대상에 대한 앎이나 이해가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타자라는 개념은 이 동일한 것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성립합니다. 어떤 기준에 비춰서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일을 훌쩍 넘어, 타자 앞에 ‘절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본다면 사정은 더욱 심각합니다. 절대적 타자란 말 그대로 마주 상대하는 요소가 전혀 없는, 어떠한 기준이나 방법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이질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타자의 어떤 부분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알게 된 부분들이 타자의 중심이거나 핵심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핵심으로 가진 대상이라면 타자라고 볼 수도 없을 테니까요. 때문에 레비나스가 제기하는 타자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식이나 앎의 차원에서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해의 문제는 주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라는 문제 다음에 성립하지만, 레비나스의 비판은 주체의 인식 과정 자체에 일종의 치명적인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겨누고 있으니까요.

 

주체가 태생적으로 가진 한계가 바로 고독입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다른 욕구들이 충족된 이후에 고차원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불안과는 다릅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죽음을 향한 존재의 특권적인 경험도 아니고요.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독은 물질로 가득 찬 일상적 삶의 일부입니다. 레비나스는 고독으로부터 일상적 삶이 발생한다고까지 보고 있지요. 존재자가 자신의 고독에 대응하는 방식, 고독으로부터 구원을 꾀하는 방식이 바로 일상적 삶을 구성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고독한 주체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향유와 노동에 대해, 노동의 수고로움과 고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고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요? 레비나스는 이 문제 앞에서 두 가지 관점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적 경험을 통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과, 반대로 집착과 번민으로 가득 찬 일상적 삶에서 벗어나 오히려 진정한 고독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맞부딪치고 있다고요.

 

레비나스는 주체가 경험하는 일상의 세계를 먹거리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주체가 수행하는 행위의 의미가 주체가 갖는 목적이 아니라 대상의 특징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지요. 인간의 행위가 그의 실존을 구성한다고 본다면, 세계 안에서 인간의 실존은 그에 선행하는 대상들에 의해, 레비나스의 표현을 따른다면 먹거리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 바깥에 있는 것들이 나의 실존을 규정하는 상황인 것이지요. 주체는 먹거리로서의 세계를 경험하며 자신의 고독을 잠시 동안 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먹거리를 획득하기 위해 주체가 수행해야 하는 노동은 주체에게 끝없는 수고로움을 돌려주지요. 노동과 향유를 통해 주체는 자신의 고독을 잠깐 잊을 수 있지만, 레비나스의 시각에 따르면 이 과정은 주체가 수행하는 행위의 본질이 그의 의도나 목적이 아니라 주체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가 꽃 향기나 산책을 예로 든 것처럼 주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고 비록 먹거리로서일지언정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니까요.

 

이 노동의 수고로움처럼 주체가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죽음이지요. 죽음은 주체에게 매순간 가장 자명한 사실이지만, 주체가 경험하는 어떤 순간에도, 즉 주체의 현재에 속하지 않습니다. 주체가 있다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있다면 주체는 없습니다. 주체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주체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체의 힘이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죽음은 주체의 힘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영역이 단순히 관념적인 가상의 차원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차원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 영역에서 주체는 자신의 힘을 철저하게, 전적으로 상실할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사정을 두고 레비나스는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설령 꿈꾸듯 죽음을 떠올리거나 구체적인 상상을 덧붙일 수 있을지언정 그것의 완수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계획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반전을 살펴보았지요. 죽음으로부터 주체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과 우리가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체는 죽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주체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주체가 경험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죄다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반면, 주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장 궁극적인 낯선 것으로서의 죽음은 주체가 이미 자신의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방식으로 주체가 경험할 수 없는 것, 즉 주체가 자신으로 동화시킬 수 없는 것, 타자 그 자체인 어떤 것을 주체는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은 주체의 고독을 깨트릴 수 있는 단초가 됩니다. 앞서 레비나스의 논의를 따라 세계에 타자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논의를 쭉 살펴봤지요? 죽음이 존재한다는 그 확실성은 다름 아닌 타자의 확실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존재라는 사태는 실은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원주의는 단순히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들이 여럿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이미 하나가 아닌 여럿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합니다. 죽음을 통해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됩니다. 하지만 확실하게도, 자신의 존재에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이 이미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요.

 

자 여기까지 논의를 이어온 레비나스는 관점을 바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죽음 속에서 타자의 가능성, 사건의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주체가 대상을 흡수하지 않는, 고독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건의 가능성을 발견했지요. 발견했지만 끝까지 명석하고 판명하게 확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주체’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죽음은 오히려 주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고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독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타자는 발견했지만, 타자와 동시에 주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존재자는 죽음이라는 타자에 의해 자기자신이 소멸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자아와 타자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문제이지요. 주체는 홀로서기를 통해 획득한 자유를 보존하면서 죽음을 수용할 수 있을까요?

 

타자와 주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정초하기 위해, 레비나스는 마지막 강의를 시작합니다. 마지막 강의는 시간에 대한 논의로 시작합니다. 주체에게 가장 확실한 타자로서의 죽음은, 타자와 주체가 양립하기 어려운 것처럼 현재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누군가의 현재에 도달했다면 그의 시간은 그것으로 끝인 셈이니까요.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듯 주체와 타자는 양립할 수 없다는 사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주체에게 타자의 존재가 ‘언제나 이미’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신비롭게 보입니다. 레비나스 또한 주체에게 시간의 가능성을 선사하는 일을 두고 신비롭다고 표현하고 있지요.

 

한국어에서 신비라는 표현을 떠올리면 거의 즉각적으로 신이라는 의미 연관이 따라붙습니다. 낱말에 들어 있는 의미소 때문일까요? 하지만 신비주의가 반드시 신이나 종교에 관련한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신비주의(mysticism)의 의미소인 명사 ‘mystic’은 ‘신비’가 아닌 ‘신비로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자신의 특징으로 갖는 사람이라고 풀어 설명할 수 있겠지요. 알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mystery’라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같은 의미소에서 파생한 낱말들이지요. 모두 알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나 어떤 초월적 실체를 가리키는 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 낱말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신비’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mustikos’에서 유래했는데, ‘mustikos’는 ‘mustēs’에서 파생한 낱말입니다. ‘mustēs’는 어떤 일에 착수한 사람이나 무언가를 시작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게 신비주의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아직은. 그리스어 ‘mustēs’는 ‘muein’이라는 낱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muein’은 시작하다, 착수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덧붙여 눈이나 귀를 닫는다는 중요한 의미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눈과 귀를 닫는다, 라고 하면 어쩐지 벌써 상투적인 신비주의의 냄새가 폴폴 나는 것 같지만, 이러한 의미는 낱말이 가진 군사적 의미에서 유래했습니다. 군대는 전투를 위한 조직이지요? 그런데 얼핏 보기에 군대에는 전투와 별로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역할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내용 모를 편지를 이곳저곳 전달할 것을 명령받은 병사나, 적의 군대와 상관 없어 보이는 엉뚱한 자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받은 병사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자, 이 예시에서 이미 우리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투덜대는 어떤 병사의 모습은 물론, 또 왜 그런 역할들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다른 병사들이 중요한 전투에 참전하고 있을 때 편지를 옮기고 있는 병사의 경우라면 그 편지에 병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장군들 사이에 교환해야 할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병사들이 보기에는 엉뚱한 지점이지만 실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중요한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 자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각자 맡은 역할이나 역할의 이유가 보이지 않지만, 지휘관의 눈으로 본다면 이들은 분명 역할이 있고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을 지시받은 그대로 수행하는 것, 눈과 귀를 닫고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이 바로 ‘신비'라는 낱말의 어원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신비라는 말은 알려지지 않은 것,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만, 어디까지나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것,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즉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는 볼 수 있고, 언젠가는 알려질 것이고, 그래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될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요.

 

 

… (중략) …

 

 

레비나스는 타자를 성서적인 의미에서 과부와 고아로 비유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의 모습으로요. 레비나스가 강의 곳곳에서 주체의 지배적 힘과 자유를 강조하는 까닭은, 주체의 인식과 행위가 근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전횡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은 이미 주체에 의해 포섭된, 즉 주체가 자신의 영역으로 집어삼킨 대상들일 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난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지요. 내가 가진 기준으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그가 가지고 있다면, 즉 내가 그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타자가 아닌 셈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이 논의를 살펴봤지요. 누군가를 타자라고 할 수 있다면, 그는 내가 가진 기준에서 아무런 힘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런 위력도 행사할 수 없지요. 만약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내가 서 있는 방식에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는 타자라고 볼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타자의 호소가 명령이면서도 (주체가 다른 대상에게 행사했던 것처럼) 강제나 지배력이 아닐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타자의 명령은 강제와 지배의 힘이 통용되는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자는 (타자라는 개념이 함축하듯) 철저히 무력한 채로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러므로 그의 목소리는 호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주체의 안전한 영토 안에서 타자의 묵살할 수도 있겠지만, 레비나스에 따르면 주체는 궁극적으로 타자의 호소를 회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타자의 호소는 주체의 영역 안쪽이 아니라 바깥에서 들려오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내가 아닌 그에게서 연원하고, 따라서 그것은 주체가 셈할 수 없는 어떤 것이므로 무한하며, 그렇기 때문에 주체에게는 이 무한한 타자를 없애거나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타자> 강의의 바탕이 되는 다른 저술들에서 레비나스가 언급하는 것처럼, 타인의 얼굴이 지닌 무력함은 강자의 힘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주체에게 자유를 문제를 제기합니다. 강자의 힘은 주체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때로 완전히 박탈할 수도 있지만, 자유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자유의 이념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철저하게 무력한 타인의 등장과 함께 주체에게는 (그를 위해, 그를 향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내가 가진 척도와 기준에 무엇 하나 공통되는 것을 갖지 않은,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주어지는 상황이야말로 주체의 자유가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인 것이지요.

 

인간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구획하고 한정하는 행위입니다. 우선은 감각적으로 어떤 대상을 지각하는 것부터가 연속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어떤 분절로 파악하는 행위이며, 그 분절 위에 이런저런 이름표를 붙이거나 의미연관을 부여하는 방식들이 곧 인식의 역사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각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인식은 이렇게 구획과 한정을 토대로 성립하지요. 인간이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가는 이상, 주체라는 전체성은 반드시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레비나스가 앞서 파르메니데스적이라고 표현했던, 거대한 동일자의 세계이지요. 나는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나인 채로, 내 눈에 비친 너의 모습을 보고, 내가 생각하는 너의 의미를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와 관계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영역, 그 지점들에서 사실 나는 부지런히 너를 죽이고, 너를 나로 바꾸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꼴이지요. 내가 있는 한 너라는 세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세계를 한정하고 규정짓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주체가 이렇게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자신의 영역을 세계의 전부라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작은가는 중요한 차이가 아닙니다. 조금 더 많이 아는 것과 잘 모르는 것 사이의 차이도 그리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레비나스의 성찰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라고 여기면서, 나아가 오해의 불가피함을 변명 삼는 유형의 인간이 타인에게 어디까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레비나스의 논의가 함축하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당장에 실천적 차원에서, 법과 윤리의 차원에서 공통 규범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당장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비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요. 데리다는 꽤 오랜 시간 프랑스 철학계에서 주변적이었던 레비나스에게 비교적 일찍 관심을 보인 바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나 브로델, 혹은 라캉, 푸코, 알튀세르 등이 한참 활동하면서 다양한 논의를 주도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에 주목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환대 이론을 구축합니다. 데리다의 레비나스 독해는 처음에는 레비나스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에서 출발해 뒤로 갈수록 점점 레비나스 철학에서 많은 것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레비나스의 철학과 타자의 문제를 다룬 논의에서 데리다는 기본적으로 폭력일 수밖에 없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주체가 타자를 인식하는 방식이나 주체에게 타자가 성립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동일자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주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답하지요. 주체의 담론이 근원적으로 폭력적이라면, 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면 담론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확립하고, 전쟁에 대해 전쟁을 거는 것뿐이라고요.

 

이러한 방향 전환을 타자와 같아지는 것, 타자가 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주체의 자유와 위력을 고집하는 한, 세계는 고독한 주체, 그러므로 실은 모두 동일한 한 가지 유형의 주체로 가득한 곳이 됩니다. 하지만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고 주체가 자신이 주인인 곳에서 주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올 때, 비로소 하나가 아닌 여럿의 세계가, 그러므로 나의 자리 또한 세계 속에서, 타인들에 의해 보존되고 보장될 수 있는 다원적인 세계가 열린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주체와 타자의 에로스적인 결합을 통해미래라는 시간 또한 비로소 열리겠지요. 결국 레비나스가 고집스럽게 정초하고자 했던 것은 진횡적인 자유를 행사하며 고독하게 말라갈 수밖에 없는 주체의 형상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주체성과 그러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미래의 가능성일 테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1. 25. / Rolling School

info@labyrinthos.co.kr

Please reload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