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죽음

January 18, 2019

지난 시간 세미나를 시작하며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겨누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봤지요.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환대를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세계에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검토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타자라고 여기지만, 레비나스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 단순히 내가 아니라는,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것의 타자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타당하지 않지요, 실은. 어떤 대상을 나와 다르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판단에 선행하는 어떤 기준을 먼저 공유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이지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같은 척도를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뒤에 나타나는 차이가 아무리 크게 느껴진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주체의 인식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경험을 초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나와 다르다고 판단한 대상은 결국 내가 경험한, 내 경험 속의 대상일 뿐,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과 대상의 실상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대상을 보고 만지지만, 내가 경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눈에 보이는 형상과 내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니까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판단의 진위를 판정하는 최종 수준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체의 인식과 대상의 실상이 완벽하게 등가일 수는 없다는 사실만은 자명합니다. 대상에 닿고자 하는 주체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인식과 실상의 거리가 때로 멀어지고 때로 가까워지겠으나 어느 경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우선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은 서로에게 다른 것이기에 앞서 공통의 척도를 공유하고 있으며, (특히 인간과 인간 서로에게 있어서는) 각자 자신의 경험을 통한 이해만으로 대상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실은 자기자신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주체는 자신이 포섭한 대상만, 자신이 포섭한 방식대로 바라봅니다. 오로지 자기자신에서 출발해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레비나스는 주체의 이러한 사정을 고독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오늘 밤 천천히 살펴보겠지만 레비나스는 고독의 의미를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고립이나 단절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세계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있을 뿐이라는 사태로서의 존재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독을 떠안으면서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로 세계에 우뚝 서니까요. 레비나스는 이 과정을 잠과 잠에서 깨어나는 의식이라는 일종의 은유를 통해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에 등장한 존재자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기본적으로 자기자신에게 몰두합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러한 집중에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거나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에 골몰하는 모습을 떠올려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모습은 사실 몰두의 대상으로서의 자신과, 몰두하는 자신의 이중성을 제3의 구도에서 재귀적으로 구성한 다음에야 떠올릴 수 있는 일종의 가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내가 나를 대상으로 갖는다는 식의 접근은 레비나스의 생각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자가 자신에게 몰두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존재자의 존재 근거가 다른 어떤 본질이나 속성이 아닌 존재한다는 그 사태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재자에게 이런저런 속성을 부여할 수도 있겠고, 존재자가 이런저런 행위를 수행하는 상황을 상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존재자에게 있어 일종의 타동사와 같은 성격을 갖습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존재자와 존재자에 결합하는 다른 대상을 연결해 존재자의 특정한 상태를 기술할 뿐, 존재자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으니까요. 홀로 선 존재자는 그저 자신이 이 세계에 있다는 그 사태로 인해 세계에 존재할 뿐, 그가 존재한다는 그 사태는 어떠한 경향이나 지향성도 띄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자는 (적어도 레비나스의 논의에 따르면 아직까지는) 자신에게 속한 어떤 것을 다른 존재자에게 전달하거나,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을 다른 존재자로부터 건네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요. 다른 존재자와의, 타자와의 교환관계로부터 차단되어 있다고 할까요. 여러 존재자 가운데 어떤 한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모든 존재자가 완벽하게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비춰 본다면 실은 타자라는 개념이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두고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에는 물리학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발생이 사건의 시간 계열이나 인과 계열로 밝혀지는 성격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홀로 선 존재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고독입니다. 존재자는 존재라는 익명의 사태로부터 하나의 의식으로서 자기자신을 정립하고, 자기자신을 온전히 떠맡으며 홀로 일어섭니다. 이때 홀로 선 주체로서의 존재자는 무엇보다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로서 신체를 갖게 되는데, 레비나스는 이를 일컫어 주체의 물질성이라고 부릅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물질성은 정신이나 영혼에 대응하는 신체, 혹은 그것의 한계를 환기하기 위한 표현은 물론 아닙니다. 물질성은 존재자가 주체로서 홀로 서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떤 특징입니다. 레비나스가 존재론적 사건이라고 칭하는 존재자로서의 주체의 출현은, 신체라는 물질성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아는 자신의 신체라는 물질성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또한 고독의 비극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요. 이렇게 주체는 자기 동일성 안에 포로처럼 갇혀 있는 형편이므로,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홀로서기, 존재자, 물질성, 고독 등의 개념은 같은 의미 계열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레비나스는 고독에 대한 언급으로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때의 고독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다른 욕구들이 충족된 이후에 고차원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불안과는 다릅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죽음을 향한 존재의 특권적인 경험도 아니고요.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독은 물질로 가득 찬 일상적 삶의 일부입니다. 레비나스는 고독으로부터 일상적 삶이 발생한다고까지 보고 있지요. 존재자가 자신의 고독에 대응하는 방식, 고독으로부터 구원을 꾀하는 방식이 바로 일상적 삶을 구성합니다.

 

자 이렇게 일상적 삶은 고독에서 출발합니다.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고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 문제를 두고 두 가지 생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적 경험을 통해 (사회, 라는 말이 유럽의 지적 전통에서 갖는 풍부한 의미를 두루 고려해야 합니다.)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과, 반대로 집착과 번민으로 가득 찬 일상적 삶에서 벗어나 오히려 진정한 고독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딪칩니다. 전자는 고독이라는 상황과 고독의 감정을 일종의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의 대화나 집단적 작업과 같은 사회적 경험을 통해 자아로부터의 고립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삶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 후자의 관점은 사회적 경험이나 활동의 가치를 썩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런 활동들은 사물을 지배하려는 인간 욕구의 발현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집착이나 관습적인 물질주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요. 당연하게도 이 두 관점은 서로에게 적대적입니다. 이들 각각은 일종의 도덕적 태도로서,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관계를 정향합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구원은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는 방식으로도, 정신 활동을 통해 세계의 물질성과 인간의 동물성을 극복하는 방식으로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앞서 고독과 물질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논의를 살펴본 바 있지요. 다시 말해 물질성과 고독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일상적 삶은, 물질적 욕구를 더 잘 충족하는 방식으로도, 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일상적 삶과 고독이라는 문제는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자기자신에게 매여 있다는 사실에 연원하기 때문이지요.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무엇보다 자신의 도구로서 바라봅니다. 물론 호모 파베르 따위의 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인데, 행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 또한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버립니다. 인간 존재가 가진 이런 특징으로 인해 세계는 그야말로 도구의 총체라고 할 만한 상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레비나스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에게 도구이기에 앞서 먹거리의 집합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이데거의 통찰을 조금 더 가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계를 먹거리로 이해하는 레비나스의 접근은 주체가 수행하는 행위의 의미가 주체가 갖는 목적이 아니라 대상의 특징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꽃의 냄새를 맡는 인간의 행위는 향기를 좇는 인간의 의지나 목적 때문이 아니라 꽃에 향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람을 쐬기 위해 산책을 나서는 것도 행위에 앞서 바람이, 공기가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행위가 그의 실존을 구성한다고 본다면, 세계 안에서 인간의 실존은 그에 선행하는 대상들에 의해, 레비나스의 표현을 따른다면 먹거리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 바깥에 있는 것들이 나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이지요.

 

레비나스는 주체가 대상과 이렇게 관계 맺는 방식을 향유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방식인 참여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 논의했었지요?) 레비나스는 향유, 인식, 노동, 거주 등 고독하게 존재하는 주체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활동을 통틀어 ‘존재의 일반 경제’라고 부르는데,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세계 속에서 (다른 인간을 포함하는) 자신 이외의 사물들과 무엇보다 먼저 향유를 통해 만납니다.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실 때, 이러한 활동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레비나스는 무엇보다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먹는 것과 사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우선은 배가 고프다와 배고픔을 채워야 한다, 즉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 가장 선행한다는 것이지요. 욕망의 대상 앞에서 주체는 욕망의 근거와 움직임에는 눈이 멀고, 오로지 대상을 향해 달려드는 것에 집중합니다. 향유를 통해 만나는 타자들은 주체의 향유와 동시에 주체에게로 동화되어, 자신의 타자성을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레비나스는 이 과정을 최초의 망각이라고 부릅니다. 주체가 대상을 향유할 때, 일상적 삶과 자신의 고독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향유의 과정에서 주체는 우선 자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익명의 존재적 상태에서 벗어나 존재자로서 홀로 설 때, 주체는 자기와 자아에 철저하게 갇혀 있는 고독한 상태였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대상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잠시 자신을 잊고, 자신의 홀로 있음을 잊고, 고독을 잊고 자기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분리, 향유의 자기 망각에서도 자기자신과 자아의 관계 자체는 깨지지 않습니다. 향유는 홀로 선 주체가 자신의 물질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완전히 극복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여전히 주체는 자신의, 자기자신의 보편성 안에서 다른 것들을 포괄하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유아론, 즉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고 존재하는 것은 자아일 뿐이라는 주장은 궤변도 착각도 아닌 이성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빛으로 은유하는 이성의 작용과 이성적 지식의 객관성은 실은 주관성, 자기자신 안에 머무르는 이성 그 자체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자 우리는 이렇게 홀로 있는 주체를 다루었습니다. 그가 존재자라는 사실, 오직 이 사실로 인해 주체는 홀로 있습니다. 주체의 고독은 그가 익명의 존재에서 존재자로 홀로 선다는 사실에서 발생합니다. 이때 주체는 세계 안에 자신의 자리를, 즉 신체를 가진 존재자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물질성은 주체의 홀로서기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홀로 선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는 우선 그에게 먹거리로서 나타납니다. 먹거리로서의 대상을 향하는 주체의 관심은 주체에게 일시적인 해방을 제공하지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해방이자, 잠시 동안의 망각입니다. 향유는 고독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방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대상을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성은, 다시 말해 주체가 다른 사물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동시에 대상과 그 경험을 기억의 요소로, 즉 주체의 이성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고 맙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기능을 노동이라고 정의합니다. 앞서 세계를 주체의 먹거리로 규정한 것과 짝을 짓는다면 주체는 이성을 통한 노동으로 먹거리서의 대상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지요.

 

레비나스는 주체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동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고통에서 물리적인 통증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의 고통은 그런 종류의 통증을 포함하는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하겠지요. 노동 또한 단순히 구체적인 신체 활동이나 경제적 생산 활동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주체로서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종류의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체의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고 한다면, 노동의 고통은 노동에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수고라고도 바꿔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수고로움, 이 고통은 주체가 존재자로서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면제되어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하는 이상 반드시 노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므로 고통 역시 피할 수 없지요. 레비나스는 주체가 경험하는 고통의 내용은 고통으로 해방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피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주체를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고통은 생겨납니다.

 

그런데 주체가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존재자로서 홀로 선 주체는 먹거리를 획득해야만 합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먹거리를 획득하기 위한 주체의 노동은 어떤 목적이나 의지를 가진 활동이라고 볼 수도 없는, 그저 주체의 생리에 속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레비나스는 노동과 고통 만큼이나 주체에게 확실한 것이 하나 더 있다고 덧붙이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태어난 이상, 죽겠지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체에게 죽음은 가장 확실한 것이면서도, 가장 불확실한 어떤 것으로서 주어집니다. 죽음은 언제까지나 주체에게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까요? 주체가 있는 이상, 주체의 죽음 또한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체는 어떤 방식으로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요. 죽음이 도래는 주체의 사라짐을 의미하니까요. 주체가 그것을 향해 아무리 이성의 빛을 비추어도, 다른 대상과 달리 죽음은 주체에게 포섭되지 않습니다. 주체는 어떤 방식으로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체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존재가 주체를 가장 강력하게 묶고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체에게 있어 죽음과의 관계는 다른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와는 반대로 설정됩니다. 홀로 선 주체는 자신의 자유를 움켜쥐고 세계를 집어삼키지만, 죽음 앞에서만큼 철저하게 수동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주체가 자신 바깥에 있는 다른 대상들과 맺는 관계는 대상을 자신의 안쪽으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레비나스가 향유라고 명명했던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주체의 경험은 항상, 이미, 언제나 주체의 능동성을 토대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관계도, 어떤 대상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딱 하나, 죽음과의 관계만 빼고. 주체의 경험은 객체가 주체로 회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죽음은 끝까지 주체가 환수할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 있지요. 레비나스에 앞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죽음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특성을 규정한 바 있는데, 하이데거의 논의에 따르면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인간은 세계의 왜곡된 모습을 파훼하고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과 죽음에 대한 이해, 즉 죽음을 움켜쥐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강력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도구적 세계에 묶여 있는 인간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 역시 죽음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조금 더 논의를 이어 가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뒷이야기를 살짝 먼저 당겨온다면, 결국 주체는 죽음을 계기로 타자를,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니까요. 죽음은 주체에게 매순간 가장 자명한 사실이지만, 주체가 경험하는 어떤 순간에도, 즉 주체의 현재에 속하지 않습니다. 주체가 있다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있다면 주체는 없습니다. 주체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주체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체의 힘이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죽음은 주체의 힘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영역이 단순히 관념적인 가상의 차원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차원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 영역에서 주체는 자신의 힘을 철저하게, 전적으로 상실할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사정을 두고 레비나스는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설령 꿈꾸듯 죽음을 떠올리거나 구체적인 상상을 덧붙일 수 있을지언정 그것의 완수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계획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는 기가 막히는 반전을 제시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과 우리가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체는 죽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주체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주체가 경험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죄다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반면, 주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장 궁극적인 낯선 것으로서의 죽음은 주체가 이미 자신의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방식으로 주체가 경험할 수 없는 것, 즉 주체가 자신으로 동화시킬 수 없는 것, 타자 그 자체인 어떤 것을 주체는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은 주체의 고독을 깨트릴 수 있는 단초가 됩니다. 앞서 레비나스의 논의를 따라 세계에 타자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논의를 쭉 살펴봤지요? 죽음이 존재한다는 그 확실성은 다름 아닌 타자의 확실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존재라는 사태는 실은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원주의는 단순히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들이 여럿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이미 하나가 아닌 여럿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합니다. 죽음을 통해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됩니다. 하지만 확실하게도, 자신의 존재에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이 이미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요.

 

 

… (중략) …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팽팽하게 지탱하고 죽음에 직면할 수 있는 존재자만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영역에 주체로서 설 수 있습니다. 이때 주체가 맺는 타자와의 관계는 이전까지 주체가 참여나 향유라는 방식으로 대상을 거머쥐었던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설정됩니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무엇보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죽음과 타자를 깨닫기 이전까지 주체와 ‘대상들’의 관계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홀로 있는 주체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으니까요. 주체는 언제나 동일한 현재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간은 타자의 등장과 함께 주체에게 주어집니다. 현재가 아닌 미래가 열리는 것이지요.

 

자 여기까지 논의를 이어온 레비나스는 관점을 바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죽음 속에서 타자의 가능성, 사건의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주체가 대상을 흡수하지 않는, 고독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건의 가능성을 발견했지요. 발견했지만 끝까지 명석하고 판명하게 확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주체’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죽음은 오히려 주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고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독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타자는 발견했지만, 타자와 동시에 주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존재자는 죽음이라는 타자에 의해 자기자신이 소멸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자아와 타자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문제이지요. 주체는 홀로서기를 통해 획득한 자유를 보존하면서 죽음을 수용할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밤 레비나스의 마지막 강의를 펼쳐보도록 하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1. 18.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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