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November 30, 2018

정리합시다. 고독에 대한 언급으로 블랑쇼는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릴케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완벽하게 밀폐된 과일 속에 있는 씨앗처럼 홀로 고독하게 있다'는 릴케의 고백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당연하게도 고독은 홀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릴케가 작업의 고독을 이야기할 때, 블랑쇼는 릴케가 진짜로 혼자 있는 것인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찾아내지요. 릴케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작업 속에서 작품과 함께 있는 것이다, 설령 그 작품이 아직 온전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릴케는 홀로 글쓰기에, 오직 글쓰기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몇 주 간 거의 입도 열지 않은 채 글만 붙들고 있지요. 누가 봐도 고독한 작업이라고 할 만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블랑쇼의 생각은 다릅니다. 릴케는 작품과 함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정되지 않은 어떤 것이지요. 작품이 아직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 즉 무한하다는 것은 단순히 막연한 어떤 가능성이나 잠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블랑쇼의 꾐에 따라 문학의 공간을 한 바퀴 둘러본 이제는, 블랑쇼가 왜 처음 고독과 무한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주 조금 비약해서 말한다면 그것이 문학 그 자체이기까지 하니까요.

 

작업에는 물리적인 끝이 있습니다. 작업의 시간을 생각했을 때도, 아니면 완성된 작품이라는 결과물을 생각했을 때도 끝이 없을 수는 없지요. 그림이 회랑에 걸리는 순간이 있고, 제본된 책자가 독자의 손에 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작품의 물리적 완성과 문학 사이의 관계를 이루는 긴장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블랑쇼가 미래의 예술을 언급하며 이야기했듯이, 예술 작품의 가장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가 사용가치나 목적 속으로 용해되지 않는 의미를 확보하는 것이니까요.

 

문학이 아닌 책은 독자가 몇 명이든, 심지어 실제로 아무도 읽지 않았다고 해도 언제나 이미 읽힌 책이라고 했던 블랑쇼의 이야기를 떠올려볼 수 있겠지요. 사용가치나 목적은 언제나, 이미 세계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이 세계 자체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작품은 끝나지 않습니다. 세계의 규칙 속에서 의미가 종결지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셈해질 수 없으므로 짝을 갖거나 어떤 의미연관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홀로, 무한하게 있는 작품의 존재, 사용가치나 목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의 존재는 세계를 이루는 규칙들만으로 셈할 수 없는 어떤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바로 문학의 공간입니다.

 

자 이렇게 감춰진 공간의 가능성을 제시한 뒤에, 블랑쇼는 이제 발견한 이 공간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무한한 이 공간을 이해하는 첫 걸음은 무한의 매혹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소비되어지는 예술이 갖는 매혹, 혹은 사회가 짜놓은 규칙이 산출하는 쾌락과는 전혀 다른 매혹입니다. ‘무슨 맛인지 알기 때문에 먹는 것’이라는 어느 다이어터의 이야기와 달리, 매혹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금지와 위반이 욕망의 경제학을 이룬다면 매혹은 통제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어떤 끌림에 가깝겠지요. (근본적으로 매혹의 가능성을 축소, 부정하는 현실은 쾌락이 매혹을 대체하는 세태와 무관하지 않겠습니다만, 블랑쇼가 말하는 매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욕망, 충동, 본능처럼 근처에 있는 비슷한 개념들의 의미관계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한한 이 공간에 매혹된 자는, 글쓰기 속에서 자신을 잃어갑니다. 매혹 속에서 한정할 수 없는 어떤 것 속으로 끝없이, 말 그대로 무한하게 다가선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그 행위의 주인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태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자신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합니다.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상실하는 셈입니다. 작품에 대한 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행위의 주인일 수 없으므로 행위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 또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작품은 매혹의 흔적이자 불가능의 증거일 뿐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었다, 라는 확고한, 그러나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증언. 그래서 블랑쇼는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문학 그 자체라고 말하지요.

 

그러므로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말을 잃은 사람입니다. 말라르메처럼요. 블랑쇼가 문학의 고유한 차원을 제시하기 위해 말라르메를 소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말라르메의 기획을 살펴봤지요. 그가 겨냥했던 가장 순수한 언어에 대해. 사유도 이미지도 아닌 가장 순수한 말 그 자체의 가능성에 대해. 말과의 공모에서 자기자신이기를 그치고 말의 한계에서 그저 그 말을 발음할 뿐인 시인에 대해.

 

블랑쇼의 시선은 이제 카프카를 향합니다. 카프카를 통해, 카프카의 고민을 추적하며 블랑쇼는 문학은 부당하고 하찮은 것이라고 선고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이 하찮음이 순수한 상태로 고립될 수 있다면 놀랍고 경이로운 힘을 발휘한다고. 젊은 카프카가 마주쳤던 세계와 문학 사이의 갈등, 문학의 요구와 세계의 요구 사이의 갈등에는 글쓰기의 근본적인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이 갈등을 흔히 생각하듯 하고 싶은 일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일 사이에서 발생하는 한 개인의 내적 갈등 따위로 환원해서는 정말이지 곤란합니다. 갈등을 이루고 있는 고민이 고만고만하다면 고민의 결과물 또한 딱 고만고만한 수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원자핵을 묶고 있는 힘이 실은 어마어마하게 커서 그것을 분해할 때 나오는 파괴력 또한 가공할 규모를 이루듯, 문학이 놀랍고 경이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결코 쉬운 고민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 글을 쓰고 싶어하는 카프카가 있습니다. 그는 작품의 요구 앞에 서 있지만, 자신이 그 작품을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자신에게 작가가 될 재능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모순에 봉착합니다. 글쓰기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가 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지 알아야 수행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를 수행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즉 개인이 어떤 활동을 통해 현실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는 자신이 어떤 활동을 시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 불가능한 순환 속에서, 그러므로 블랑쇼는 작품은 계획될 수 없고 단지 실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쓰는 사람은 이 불가능을 지각하고 있습니다. 가능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저 불가능을 더듬으며 낱말과 낱말을 조심스럽게 이어나갈 뿐. 블랑쇼에 따르면 작가는 작품의 자리가 단어와 단어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행위의 차원으로 이행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때의 행위는 목적만으로 설명되어지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순환이 여전히 백지와 연필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글쓰기는 기도이자 기도의 형식입니다. 기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기도인 문학은 물음이 됩니다.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변신론을 근간으로 하는 스콜라 철학이 가장 강력한 신학인 까닭은 그것이 신에 대한 가장 첨예한 의심과 고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철두철미한 논변(과 그것이 지탱하는 세계관)은 철저한 의심의 산물입니다. 이 말을 했던 것이 라캉이었던가요, 오직 사제만이, 참된 신앙인만이 무신론을 감당할 수 있다고.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으로도 행위로도 세계의 어떤 논리로도 글을 쓰는 사람은 글 쓰는 행위를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질문에 부딪칩니다. 몸이 갈려나가도록. 나는 왜 쓰는가? 먼저 살펴본 말라르메의 경우를 상기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글쓰기의 무한한 가능성은 질문에서 행위하는 ‘나’의 자리마저 삭제하니까요. 카프카의 경우라면 어떨까요? 행위와 본질 사이에서 목적으로 환수되지 않는 의미는 ‘쓰는 것’이라는 행위의 정체성 또한 박탈합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블랑쇼는 이어서 발레리를 인용합니다. 진정한 화가는 평생을 다해 회화를 찾고, 진정한 시인은 시를 찾는다는 그의 경구를. 평생을 다한 엄격함입니다. 그저 은퇴할 때까지 남들 하는 만큼 했다는 의미에서 평생 했노라는 안일한 표현과는 감히 비교조차 까마득합니다. 자기 표현에 대한 강한 욕구나 개성으로 환원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엄격함이 요구되는 까닭은 시가 시인에게 진리나 확실성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시인이지 모르고,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는 철저하게,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린 일이 됩니다. 있거나 없거나,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거나, 그것을 묻고 따지고 시험하고 확증하는 것은 온전히 그에게, 그에게만 홀로 달린 일입니다. 바로 이 요구가 그를 깨우고 그를 엄격함으로 몰아세웁니다. 카프카가 말하듯 도대체 만족스럽게 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만족스럽게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최선의 것을 쓸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인하는데, 그 가능성을 찾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니까요. 릴케가 고유한 죽음을 간청하듯, 기도하듯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깨어있으라, 라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따라다니지 않을까요.)

 

가혹할 만큼 칠흑 같은 밤입니다. 사방은 고요합니다. 하지만 평온이나 휴식과는 거리가 멀지요. 문학이 자기자신을 물음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말라르메의 고백처럼 절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릴케는 자신을 부르는 시의 요구 앞에서 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극복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블랑쇼는 이 극복이라는 릴케의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도달해야 할 구체적 목표나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한정할 수 없는 종류의 어떤 초과로, 과도함으로 나타날 뿐이지요.

 

대도시의 경험 속에서 릴케는 자신만의 고유한 죽음의 자리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시의 엄격한 요구를 넘어설 수 있을지, 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삶의 자리 또한 부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유한 죽음을 갖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즉 잘못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내 죽음의 자리가 어디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어떻게 죽는 것이 나의 고유한 죽음인가라는 고민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행위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죽음의 자리를 찾기 위해 먼저 자신을 완성해야 합니다. 시인으로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를 완성해야겠지요.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글쓰기를 나의 행위 영역으로 환수할 수 없다, 시의 완성 또한 행위 영역으로 환수할 수 없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밤에 머물면서. 영감을, 가능성을 기다리면서. (물론 영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연히 떨어지는 벼락은 없습니다. 영감을 강조하는 릴케는 말하지요.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으로 쓰는 것이라고. 매순간이 경험이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을 극도로 섬세하고 예민하게 살펴야만 합니다. 다시 한 번, “깨어 있으라.”) 염려도 법도 모두 망각한 채 에우리디케를 기다렸던 오르페우스처럼. 밤, 몇 번이고 거듭하는 밤에 머무는 것이지요.

 

이렇게 작업과 작품과 밤과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일별한 뒤, 블랑쇼는 문학의 다른 측면, 읽기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 전체를 통틀어 고작 한 장만을 읽기에 할애한 것이 어쩌면 아쉬울 수도 있겠네요. 체계가 불균형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까운 지난 밤 살펴봤지요. 신마저 선망하게 만드는 읽기에 대해, 또 읽기와 쓰기의 교차에 대해. 질문이나 대화로, 목적이나 정보로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책’의 가능성에 대해. 그래서 알 수 있습니다. 읽기는 다시 읽기이자 계속 읽기이고, 그러므로 쓰기이고 다시 쓰기가 된다는 것을.

 

 

… (후략) …

 

 

 

2018. 11. 30.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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