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와 예술에 관한 질문

November 23, 2018

드디어 마지막입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긴 논의 끝에 쓰는 것과 읽는 것의 관계를 다루었으니, 이제 그것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블랑쇼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물음은 바로 미래와 예술에 대한 질문입니다. 물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쉽게 결론부터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읽는다는 것이 어떤 행위인가, 읽는다는 행위는 정확히 무엇을, 어떤 것을 뜻하는가를 살펴본 우리도 서두를 필요도, 서두를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독서는 정보와 전혀 무관하다는 블랑쇼의 말을, 진정한 독자는 결코 책을 향해, 저자를 향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질문을 허용하는 책은 독자가 읽기도 전에 이미 모든 의미가 결정된 책입니다. 오직 문학이 아닌 책들만, 이미 결정된 의미들로 짜여진 조직망으로서, 이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의 연속으로서 독자 앞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문학이 아닌 책은 언제나 이미 모두에 의해 읽혀진 책이지요. 몇 사람이 읽었든 모든 사람이 읽었든 심지어 단 한 사람도 읽지 않았다고 해도 그  책은 이미 읽힌 책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독서가 그 책의 존재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예술 속에서 그 근원을 갖는 책, 다시 말해 문학은 세계 속에서 결코 그 보증을 갖지 못했고, 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읽혀지는 그 순간까지 읽히지 않았었고, 읽혀지는 그 순간에도 결코 읽혀지지 않는다고 블랑쇼는 말합니다. 왜냐, 독자의 시선이 문장을 지나친 그 순간, 책장이 넘어가는 그 순간 이미 그것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유일한 공간이 아니고서는 (아직) 이 세계의 어디에도 그것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매번 처음이고 매번 단 한 번뿐인 유일한 독서를 통해, 문학의 공간 속에서 책은 비로소 작품으로 현전하는 것이지요.

 

자 그래서 블랑쇼는 말합니다. 올바른 대답은 질문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고, 대답은 질문을 지워버린다고 상식은 믿고 있다고. 그리고 덧붙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대답은 언제나 질문 그 자체이고, 대답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질문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라고요.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은 자기자신을 물음으로 삼는 순간 태어난다고 합니다. 문학에서 끝까지 문제가 되는 물음 역시 동일합니다.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요.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블랑쇼는 먼저 슬쩍 포석을 놓는 겁니다, 대답은 질문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오늘날 어쩐지 이미 진부한 주제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만 여전히 유효할 뿐더러 한편으로 절박한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일을 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해 결국에는 인간에게 자신의 행위와 자기자신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블랑쇼는 다시 헤겔을 소환합니다. 앞서 카프카와 글쓰기를, 작품의 요구 앞에 선 작가의 모순을 다룰 때의 그 헤겔입니다.

 

헤겔에 따르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지만, 글을 쓰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그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모순에 봉착합니다.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다음이니까요.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행위가 마찬가지입니다. 백지와 같은 세계가 주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이 될 것인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내가 수영을 할 수 있을까? 바닷물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뭔가 소리를 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실제 생활에서야 큰 문제가  아닌 일일런지도 모릅니다. 노래나 수영쯤이야 되든 안 되든 한 번 해보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사유의 공간에서는 다릅니다. 아무것도 특정할 수 없는 가능성 속에서 결정의 무한한 유예가 발생하고 맙니다. 노래나 수영 따위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 생각해도 좋습니다. 누구든지 살아보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지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을 원할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많은 경우 삶의 선택은 그저 이미 주어진 가능성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것에 다르지 않습니다. 영악한 선택을 하고선 자기자신을 속여 넘기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이 유예를 어떻게 뛰어넘을지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불가능한 선택을 뒤로 하고 행위로 도약한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본질을 획득합니다. 자신의 행위 속에서.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니체 역시 경쾌하게 선언합니다. “당신은 행해진다! 행해질 뿐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예술이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작품일 겁니다. 예술은 작품을 창조합니다.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예술은 작품 속에서 비로소 실제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작품은 어디까지나 세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불가능한 읽기를 다루면서 블랑쇼가 진정한 책은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내용과 혼동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책의 의미를 세계의 의미망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 작품은 분명히 세계 속에 있으니까요. 아직 읽히지 않은 채. 그렇기 때문에 릴케에게도, 카프카에게도 글쓰기가 기도일 수 있는 겁니다. 세계 속에서 작품이 갖는 사물로서의 지위 때문에.

 

다시 돌아갑니다. 이 주제를 조금 더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 거칠지만 논리 구조를 단순화해볼까요? 예술은 작품 속에서 드러납니다. 작품은 세계 속에서 드러나고요. 이렇게 예술은 작품을 통해 세계에 관여합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도 크게 이견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떤 결과가 생기는고 하니, 행동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예술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행동 없이는 자신의 본질을 절대 확인할 수 없다는 헤겔의 떠올려본다면, 누구도 예술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 꿈을 쫓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을 썼을지 모르겠지만 세계를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전쟁과 평화>가 아닌 <자본>을 써야 합니다. 카이사르의 시해를 형상화할 것이 아니라 브루투스가 되어야 합니다. 플라톤이 되어 <국가>를 쓸 것이 아니라 페리클레스가 되어 국가를 움켜쥐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술은 행동과, 특히 즉각적인 행동과 정면으로 대치됩니다. 예술의 의미가 작품과 세계의 관계 속에 있다면, 굳이 작품과 예술을 경유하지 않고 즉각적인 행동으로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을 더 잘 충족시킨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지요. 심지어 예술의 본질이 갖는 이러한 모순은 시인조차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블랑쇼는 횔덜린이 프랑스 혁명기에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말합니다. 예술적 활동은 그것을 선택한 사람에게조차 행동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보충해야 하는 결정적 순간을 갖는다고. 작품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다. 무려 횔덜린인데! 횔덜린조차 때로 자신의 작업과 작품으로는 부족하고, 어떤 행동을 통해 메시지를 보충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쐐기가 이어집니다. 블랑쇼는 다시 1934년 지드가 남긴 일기를 인용합니다. 앞으로 오랫동안 예술작품은 더이상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문구를요. 그리고 이보다 한참 앞서 미학 강의를 시작하며 헤겔은 선언합니다. 예술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되었다고.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예술은 이제 더이상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예술이 이미 지나간 것이 되었다고? 끝났다고? 헤겔에 앞서 실러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인 작가도, 문학 작품들도 모두 엉터리다, 모방이나 속악한 것들 뿐이다, 이제 문학은 죽었다고. 뉘앙스는 조금 다릅니다만 괴테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세계는 저속함 속으로 흘러가버렸다고, 자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을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라고요.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괴테 이후 독일에서 어떤 사람들이 등장했는지. 헤겔을 비롯해 횔덜린, 노발리스, 하이네, 니체, 릴케, 첼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급의 위인만 당장 손에 꼽아도 사정이 이런데.

 

헤겔이 강의에서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 시점은 괴테가 아직 살아 있었고 낭만주의가 새롭게 도약하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헤겔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도 아니었고요. 예술이 이미 지나간 것이 되었다는 논의는 역사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성찰에서, 보다 더 중요한 논의를 위해 길어올렸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1818년 여름부터 1829년 겨울까지 10년에 무려 걸쳐 여러 차례 이 주제를 반복해서 다룰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블랑쇼가 던지는 진짜 문제는 이렇습니다: 왜 역사가 예술을 종속시킨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예술의 고유성이 인정되지 않는 오늘날에, 아무도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시인이 문학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문학인의 목소리가 일상적인 생활 언어에 자리를 내어주는 이곳에서, 시대의 위세에 예술이 사라지고 있는 이 순간에 예술의 본질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도 처음으로 하나의 탐구로서 등장하는가? 라는 문제이지요.

 

 

… (후략) …

 

 

 

2018. 11. 23.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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