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야, 바깥으로 나오너라."

November 16, 2018

버지니아 울프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 책에 다가가면서 때로 우물쭈물하고 때로 빈둥거리고 때로 꾸물거린다고 해도, 마지막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차후에 어떤 거래든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이전에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일이 있다.”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남아 있다고, 책을 이렇게 읽든 저렇게 읽든 간에 마지막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고 그녀는 말하지요. 어쩐지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군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과 생애를 알고 있으므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말하는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블랑쇼처럼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책'을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그 책은 바로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아마 누구나 어렸을 때 한번쯤 접한 적이 있겠지요. 대문호가 비장하게 소개하는 책이 고작 어린이용 동화 같은 이야기라니, 어쩐지 시시하게 느껴질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소설에 주목한 것은 울프만이 아닙니다. 영국의 비평가 이언 와트에 따르면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의 개인주의 신화를 가장 선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니까요. 그에 따르면 <로빈슨 크루소>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탄생과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소설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종교적이거나 사회적 활동의 의미를 가졌던 읽는 행위가 개인적인 행위로 전환되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근대적 개인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매우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이야기의 시작, 즉 고향을 떠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개인주의적 삶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나 운명의 개척 따위는 너무 뻔한 주제가 아니냐고요? 오이디푸스고 오디세우스고 다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면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디포가 묘사하는 인물이 가진 도덕적 수준과 윤리적 척도는, 보통 사람의 생활과 행동에 꼭 알맞은 수준입니다. 서사시나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과 달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으로, 보편적 전형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들이지요. 또 인물들이 보여주는 도덕성은 다른 어떤 문학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일상 생활의 물질적 쟁점들을 근접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고향을 떠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했을 때, 삶을 개척하는 기준이나 척도는 보통 사람들이 가진 딱 그 정도의 수준이었고, 그가 경험하는 핵심적인 개척의 대상은 대체로 그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주인공들과 달리요.

 

게다가 그가 프라이데이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통상 사람을 만나면 이름을 묻든지 정체를 묻든지 그가 누구인지 묻기 마련 아닙니까? 하지만 크루소는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그냥 이름을 붙이지요. 금요일에 만났으니까 너는 이제부터 금요일이다, 라고.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가 이름을 물으려면, 이름을 물어서 각자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면 이미 개인이라는 관념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즉 그러한 통성명은 이미 여러 개인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가능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로빈슨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왜냐, 그는 최초의 개인이므로! 그러니까 이름을 묻고 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기준에서, 세계를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것이지요. (금요일에 만났으니까, 네 이름은 금요일!)

 

이 귀여운 소설의 중요성을 조금은 더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요. 소설가나 비평가만 이 소설에 주목한 것은 역시 물론 아닙니다. 마르크스 또한 이 최초의 개인, 근대인의 표상을 즐겁게 조롱합니다: ”우리는 로빈슨의 기도를 무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즐거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를 기분전환 정도로 생각한다.”

 

자 이쯤이면 이 이야기를 그냥 애들 동화 정도로 치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울프가 최후의 싸움 운운하는 것도 그저 과장으로 넘기기 어렵겠지요. 물론 울프가 독서를 그리 무겁고 무섭게 여긴 것만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인용하지요.

 

가끔 나는 이런 꿈을 꿉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들이 그들의 보답을, 보석으로 꾸민 왕관, 찬란한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새겨진 이름들을 받으러 왔을 때, 신께서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사도 베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자, 이 사람들에게는 보답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공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독서는 즐겁습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겁니다. 때로 즐겁지 않게 느껴지는 고뇌조차 실은 즐거움입니다. 어쩌면 조금 전 만큼 많지는 않겠지만, 아마 여기에도 기꺼이 동의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보석과 왕관과 대리석과 불멸의 이름보다 읽는 즐거움이 크다고 말할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조금 더 심각하게 이 문제를 다뤄봅시다.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신조차 부럽게 만드는 즐거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방금 인용한 예시를 들기 전, 그러니까 꿈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울프는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집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독서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목적 자체인 즐거움은 세상에 없을까, 라고. 그리고 덧붙이지요. 적어도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라고. 말이 매끄럽게 술술 읽히니 생각도 미끄럽게 슥 따라가기 쉽지만, 생각해봅시다. 울프는 어떤 목적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묻고 있지만, 실상 우리는 목적이 아니고서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목적이 없으면 읽지 않지요. 목적을 정하고, 목적에 알맞은 책을 고릅니다. 그리고 읽지요. 목적에 맞춰서, 수단을 찾아서, 수단으로서.

 

그런데 이런 읽기가 문학일 수 있을까요? 애당초 ‘읽기’라고 볼 수는 있을까요? 잊지 맙시다, 우리는 이미 블랑쇼를 좇아 말라르케와 릴케와 카프카를 읽었습니다. 글쓰기에 대해, 무언가를 쓴다는 작업에 대해 살펴봤지요. 나의 일기와 말테의 일기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읽는 철수의 글은 문학이 될 수 없고 카프카가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문학일까요? 세간의 평가에 의해서? 아니면 시간 차이 때문일까요? 글의 완성도가 부족해서? 글에 비문이 있거나 글이 체계가 없거나 글에 재미가 없거나 글이 효과적이지 않아서? 그렇다면 아주 잘 쓰인 신문기사는 어떻습니까? 문학인가요? 아닌가요?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정확히 말해 질문을 정확히 제기하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문학인 것과 문학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답은 당연히 없다, 입니다. 그러니 문학을 통째로 부정하고, 혹은 기호놀음으로, 혹은 권력이 산출하는 효과로밖에 문학을 정의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 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오늘 밤에는.) 하지만 이것만 확인하고 넘어가지요. 모든 글쓰기가 다 문학이 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읽기가 다 문학인 것도 아닙니다. 쓰기의 문제를 다뤘으니 이제 읽기의 문제를 다룰 때가 되었습니다. 작품에 대해 저자가 갖는 절대적인 위치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시각과 달리, 어쩌면 블랑쇼에게 작가는 ‘연필을 쥔 손'에 다름아닐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블랑쇼가 작품에 대한 감상자, 혹은 해석의 가능성에 절대적인 자리를 양보하는 것 역시 당연히 아닙니다.

 

앞서 작품과 작업의 측면에서 문학의 공간에 접근했던 시도와 비슷하게, 읽기의 측면에서 문학의 공간을 다루는 블랑쇼의 시도 또한 그리 평범하지 않습니다. 글쎄요, 만약 여기까지 블랑쇼의 논의를 충실하게 따라왔다면, 우리는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문학의 공간을 가로질렀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마 블랑쇼의 주장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와 의심 섞인 동조 사이 어디쯤이 우리의 현재 위치겠지요. 블랑쇼는 역시나 이상한 인용들로 읽기의 문제를 제시합니다. 적극적인 동의를 의아하게 만들고, 의심 섞인 동조라면 불안을 부추기는 인용들이지요. 그가 인용하는 표현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독서를 거의 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잘 살지요, 아주. 글을 읽는 순간은 언제나 불안한 시간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더러워진다고까지 합니다. 이어서 음악이나 회화의 사례를 몇 가지 더 제시한 다음 블랑쇼가 제시하는 생각은 퍽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거부가 애호가들의 수상쩍은 자기만족보다 더 강력하게 예술작품의 실재와 배타성을 보여준다고 하니까요.

 

블랑쇼에 따르면 책은 저자가 마짐작 마침표를 찍는 순간, 혹은 인쇄기가 멈추고 종이 책으로 묶이는 순간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책은 독서에서 태어납니다. 읽지 않으면 책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읽지 않는 책은 의미가 없다는 식의 한심하고 순진한 평가는 물론 아닙니다! 읽는다는 것은 책을 쓰여지게 하는 것이고, 쓰여진 것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읽기, 문학이라는 읽기에 의해 책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독서는 어떤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독서는 순종이 아닙니다. 정보를 습득하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편리하고 더 효율적이고 더 능동적으로 행위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요. 물론 정보는 힘입니다. 권력이지요. 우리는 정보를 가진 사람과 정보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뚜렷한 힘의 비대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을 작동시키는 체계가 가진 권력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보를 갖는다는 것은 그냥 그 체계의 일부가 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정보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한국어의 정보에 해당하는 낱말 ‘information’을 잘 뜯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보라는 표현을 운운하면 어떤 지적, 정신적 활동을 뜻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실은 ‘형태(form)’를 ‘갖는 것(-ation)’을 의미합니다. 형태를 만드는 것이지요. 여전히 정보를 가진 사람이 정보의 힘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정보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유도합니다. 자 어떤 운전자가 왼쪽 길로 가면 차가 막히고 오른쪽 길로 가면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정보를 습득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교통체증을 피해 오른쪽 길을 선택합니다. 자, 틀(form)안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형태(form)에 맞춰 움직인 사람이 누구지요? 정보의 강제력이 발휘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정보를 가졌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지요. 이렇게 정보의 권력은 가진 사람에서 갖지 못한 사람을 향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그 자체와 사람 사이에서 작동합니다. 자, 그러므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읽기는 읽기가 될 수 없습니다. 읽는다, 라는 나의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실은 그냥 어떤 행위도 될 수 없습니다.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요. 이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우리는 독서는 정보 습득이 아니고 순종과도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계속해봅시다. 그렇기 때문에 블랑쇼는 독서는 결코 책을 향해, 나아가 저자를 향해 ‘너는 무엇을 말하느냐, 너는 어떤 진리를 가져다 주느냐?’라고 묻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진정한 독서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직 문학이 아닌 책들만, 이미 결정된 의미들로 짜여진 조직망으로서, 이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의 연속으로서 독자 앞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문학이 아닌 책은 언제나 이미 모두에 의해 읽혀진 책입니다. 몇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든 심지어 한 사람도 아니든지 간에 이미 이루어진 독서가 책의 존재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예술 속에서 그 근원을 갖는 책, 다시 말해 문학은 세계 속에서 결코 그 보증을 갖지 못했고, 못하고 있고, 그것이 읽혀지는 그 순간까지 읽히지 않았고, 읽혀지는 그 순간에도 결코 읽혀지지 않습니다. 매번 처음이고 매번 단 한 번뿐인 유일한 독서를 통해, 문학의 공간 속에서 책은 비로소 작품으로 현전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통해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과 투쟁에 들어갑니다. 내 주변은 정보로 가득합니다. 온통. 작은 소리 하나 사물 하나까지 정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의미이고, 의미는 나에 앞서 세계에, 세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은 다릅니다. 진짜 책은요. 진짜 책은 이미 짜여진 그 의미들의 세계로 환원되어지지 않습니다. 왜? 아직 읽히지 않았으므로. 단 한 번도 아직 읽히지 않았으니까.

 

 

… (후략)

 

 

 

2018. 11. 16.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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