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그리고 또 다른 밤

November 9, 2018

블랑쇼는 마치 과일 속의 씨앗처럼 밀폐된 고독 속에 머물고 있노라는 릴케의 고백을 인용하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블랑쇼가 불러내는 릴케와 카프카, 말라르메 등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가 이끄는 <문학의 공간>으로 들어왔고, 단순히 홀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 고독에 대해, 불가능한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자기자신에 대한 부정과 의심을 토대로 쌓아 올린 견고한 확신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한편으로 많은 것들이 드러났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많은 것들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 짧지 않은 논의의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문학의 정체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수수께끼의 정체가 한마디 정답으로 쉽게 풀리지 않는,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우리가 통과한 여정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블랑쇼는 릴케의 경험을 언급하며 예술에 이르는 길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단언합니다. 작품은 노고와 실천과 지식을 요구하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온갖 재능을 헤아릴 수 없는 무지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일종의 영감입니다. 이 영감을 제시하기 위해 블랑쇼는 도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무지에서 작품으로 나아가는 영감의 움직임을 바로 도약이라고 칭합니다.

 

앞서 우리는 이 도약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본 바 있습니다. 도약이라는 표현이 블랑쇼가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굳이 거창한 용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확인했지요. 작품과 글쓰기 사이에는 도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만큼 중요하고 명백한 단절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을 잠깐 참고해볼까요? 벤야민은 자신의 걸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걷는 방법을, 자신이 어떻게 걸어서 움직였는지 명확하게 지각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요. 예컨대 셔츠를 입을 때처럼 옷깃을 잡고 옷을 들어 한쪽 팔을 먼저 옷소매에 집어넣은 뒤 반대쪽 팔을 마저 옷소매에 집어넣고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단추를 채운다, 라는 식으로 걷는 방법을 지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신체 기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방법을 지각하지 못한다고 해서 걷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왼팔을 어떻게 움직이면서 팔이 어느 위치에 도달했을 때 반대쪽 다리를, 무릎 관절과 발목을 어떻게 움직이면서… 하는 식으로 걷는 방법을 특정할 수 없지만 다들 잘 걷고 있지 않습니까?

 

글쓰기라는 도약이 이것과 꼭 비슷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걸음을 몇 발짝 옮기는 정도가 아닌, 헤겔의 표현을 차용한다면 무려 목숨을 건 도약입니다. 헤겔에 따르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모순에 봉착합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자신에게 작가가 될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글을 쓴 다음에야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개인이 어떤 활동을 통해 실천적 현실에 이르지 못하는 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는 자신이 어떤 활동을 시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활동 목적을 결정할 수도 없고요.

 

자, 헤겔이 포착한 이 모순 속에서, 작가 앞에는 글쓰기라는 거대한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 그리고 이 불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바로 영감입니다. 블랑쇼가 말하는 영감은 불가능을 뛰어넘어 작품에 도달하는 도약을 가리키는 표현이지요. 이렇게 설명하니 영감이라는 표현이 (매우 안타깝게도) 어쩐지 상투적으로 느껴집니다만, 블랑쇼가 말하는 영감의 의미는 흔히 사람들이 영감이라는 낱말에서 떠올리듯 단순히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신비나 황홀도, 작업에 필요한 자극이나 착상을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블랑쇼의 은유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영감은 노래에 대한 염려와 법을 망각한 초조함 사이에서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을 의미하니까요.

 

블랑쇼에 따르면 밤에는 짐승이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듣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건 무서운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환상이나 황홀에 관련된 경험도 전혀 아닙니다. 밤에 들려오는 이 소리, 다른 짐승의 소리는 들릴까 말까한 속삭임, 침묵과 구별하기 어려운 아주 작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소리는 끝나지 않고 그치지 않습니다. 블랑쇼는 일단 한 번 이 소리를 알고 나면 결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영감은 이렇게 그치지 않고 들려옵니다.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앙드레 브르통은 ‘웅얼거림의 마르지 않는 특성을 믿으라'고 시인에게 조언합니다. 블랑쇼 또한 다른 짐승의 소리, 밤의 속삭임과 같은 영감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영감을 받은 사람은,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끝없이 말을 하고 글을 쓰려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기도시집>을 쓰면서 릴케는 자신이 더 이상 글쓰기를 멈출 수 없으리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고흐 또한 작업을 멈출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말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 웅얼거림을 듣는 것만으로, 혹은 단순히 그것을 받아 적는 것만으로 작품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밤의 웅얼거림이 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웅얼거림을 멈추게 함으로써만 작품은 책이 될 수 있으니까요.

 

 

… (중략) …

 

 

꼭 블랑쇼처럼 생각하지 않더라도 작업에서 영감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지난 시간 파묵을 언급했던 것처럼 한 사람이 쓰는 여러 가지 글들 가운데 작품과 작품이 아닌 것, 혹은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에 영감의 자리가 있겠지요.

 

릴케가 남긴 로댕의 기록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대화 중에 누군가 영감을 언급할 때면 너그러운 미소로, 하지만 단호하게 영감이란 없다, 오직 작업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로댕의 모습이지요. 이 장면에 대한 릴케의 설명이 걸작입니다. 로댕을 가리키며 이 창조자에게는 영감이 지속하는 것이 된 나머지,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덧붙이지요.

 

소설가 김탁환은 왜 예술을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무서운 대답은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이라는 답변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논의를 왜 쓰는가, 라는 질문에 적용해볼 수도 있겠지요. 아마 어떤 목적을 위해 쓴다, 라는 추상적인 대답도 가능하겠지만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다시 물어야 할 테니, 왜 쓰는가에 대한 답변은 조금 더 구체적이어야 할 겁니다. 몇 가지 기준으로 가능한 답변들의 구분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크게 나눈다면 노동과 유희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필요에 의한 글쓰기라면 노동이겠고, 필요와 무관한 글쓰기라면 (자신이든 타인이든) 즐기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봐야 할 테니까요.

 

노동이든 유희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구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 펑 중요한 구분입니다. 만약 문학이 유희라면, 즐겁지 않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하지만 노동이라면 사정은 다릅니다. 즐겁든 괴롭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은 이상 더 능숙하게, 더 탁월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외면할 수 없으니까요. 노동은 결국 시간과 그 시간을 채운 수고에 다름 아닙니다. 말라르메가 드가에게 시는 생각이 아니라 낱말로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의 진짜 의미 역시 바로 이것이겠지요.

 

작업과 글쓰기에서 출발해 작품과 작품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오늘은 영감과 도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카프카는 자신이 쓴 <선고>를 수작이라고 생각했고, <변신>을 쓴 다음에는 자신의 형편없는 재능에 좌절하고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세간의 평가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마 쓰기의 매혹과 읽기의 매혹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이제까지의 방향과 반대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쓰기가 아닌 읽기에 대해, 독서에 대한 블랑쇼의 생각을 살펴보시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11. 9.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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