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간과 작품의 요구

October 12, 2018

앞서 블랑쇼는 고독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작가의 작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달한 고독과 작업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서 다시 출발해, 문학의 공간이라는 어떤 영역을 발견하고 여기에 접근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자, 블랑쇼는 다시 묻습니다: 여기는 어디인가? 이 지점은 어떤 곳인가? 이 지점에 대해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가?

 

블랑쇼는 먼저 언어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블랑쇼가 문학을 다룰 때 언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의미는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도, 또는 일반적인 기호학에서 정의하는 언어의 의미와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지요.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제시하는 이 지점의 몇 가지 특징을 먼저 짚어봅시다. 그가 제일 먼저 언급하는 특징이 바로 언어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의 공간에서) 언어는 우선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너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너의 대답을 기다리는 말이 아니라는 삼중의 부정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어서 일상적 언어와 문학적 언어를 구분하면서, 일상적 언어에서는 듣는다는 것, 즉 전달이 언어의 본질이지만 문학적 언어는 본래 들을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공간에서 말은 언제나 스스로를 벗어나 있는, 떠도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블랑쇼는 말합니다.

 

흔히 작가는 삶의 심각성에서, 지난한 밥 벌이와 피로한 사회 생활 따위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생활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여깁니다. 작가는 자신이 지배하는 자신의 작업 세계 안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즉 작품이라는 폐쇄된 영역 안에 웅크리고 있는 존재라는 인상을 풍기기도 합니다. 블랑쇼가 언급하듯이 자신의 작업 세계 안에서 작가는 사회에서 자신이 경험한 실패를 앙갚음할 수도 있습니다. 스탕달이나 발자크 같은 대문호조차 이러한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족과 직업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좌절을 경험한 카프카나, 반평생을 미치광이로 살다 생을 마감한 횔덜린 같은 경우라면 사정은 더 심각합니다. 어디 이들 뿐일까요. 스탕달, 발자크, 카프카, 횔덜린이야 여기에서 블랑쇼가 작가의 표상에 대한 미심쩍은 오해를 지적하기 위해 거론하는 대표적 이름일 뿐, 실은 자신의 작업과 작품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작가들이야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겠지요.

 

어쨌거나 블랑쇼가 예비적으로 언급하고 있듯이 작가라는 꼬리표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수많은 의지들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세계와 사회라는 영역이 아닌, 자신의 의지를 오롯이 간직하고 관철할 수 있는 자신만의 작업 공간에 안주하는 나약한 인상이 함께 따라붙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름도 쟁쟁한 불멸의 작가들조차 얼마간 이 꼬리표를 떼어놓지 못 하고 있습니다.

 

블랑쇼의 통찰이 다시 한 번 번뜩이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죽음과 고독과 불가능 등을 검토할 때와 마찬가지로, 블랑쇼는 이 지점에서도 상식과 통념에 반기를 들며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다시 묻습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작가는 작업이라는 경험 가운데 자신이 세계로부터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잃었다고 느끼고, 자신이 자신의 작업의 주인이 아니라 작업 가운데 자신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작업에서 작품은 그에게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더 이상 그 자신일 수조차 없는 순간에 직면하도록 요구합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바로 이 요구가 작품의 중심점을 이룹니다.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지만, 도달할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지점이고요.

 

작품은 작가에게 그의 본성과 모든 성격의 상실을 요구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그 자신과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를 중단하면서 비인칭의 공허한 장소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격리하고 박탈하는 근원적 경험에 온전히 몸을 맡길 것을 요구하지요. 이 요구는 충족해야 할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고, 또한 그러므로 어떠한 강제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따진다면 실은 요구라고 확실하게 지칭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블랑쇼는 이를 두고 ‘낮의 쇠락’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요. 낮의 쇠락 가운데 작가는 어떤 요구에 대한 응답을, 작품이라는 응답을 제출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작품이라는 자신의 응답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합니다. 진리에 대한 응답이라는 거창하게 수사를 붙일 수도 있겠고, 말하고 싶은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응답을 어떤 의무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하지만 블랑쇼에 따르면 이 응답의 최종적인 확인은 작가에게서도, 작업이라는 경험 그 자체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 (중략) …

 

 

카프카를 통해 블랑쇼는 문학에 대한 거창하고 고상한 담론들과 일별합니다.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 법의 세계와 글쓰기의 세계, 생활인의 세계와 문학의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카프카의 고민을 추적하며 블랑쇼는 문학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이 하찮음이 순수한 상태로 고립될 수 있다면 놀랍고 경이로운 힘을 발휘한다고.

 

카프카라는 수수께끼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펼쳐봅시다. 이름 때문에 지레 겁 먹을 필요는 물론 없겠지요. 우스갯소리입니다만 이 책을 지구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라고 주저 없이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주저 없이 동의할 사람 또한 많을 것 같군요. 사실 미국의 저명한 헤겔 연구자 또한 자신이 집필한 <정신현상학> 해석서 첫머리를 헤겔을 읽는 것은 정신적으로 모래를 씹는 것과 같다는 말로 시작하기까지 합니다. 여러 모로 대단히 악명 높은 이름입니다만, 결코 허명은 아닙니다.

 

헤겔에 따르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모순에 봉착합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자신에게 작가가 될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글을 쓴 다음에야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개인이 어떤 활동을 통해 실천적 현실에 이르지 못하는 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는 자신이 어떤 활동을 시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활동 목적을 결정할 수도 없고요.

 

이러한 모순에 대한 통찰에서 헤겔은 의식의 주체로서의 인간 존재와 세계에서 인간 활동이 갖는 의미, 세계와 인간 활동의 관계에 대한 통찰로 나아갑니다만, 우리는 다시 글쓰기와 문학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옵시다. 헤겔의 모순 속에서 작가 앞에는 글쓰기라는 거대한 장벽, 뛰어넘을 수 없는 불가능성이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또한 글쓰기가, 불가능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 우리 앞에 도달한 문학 역시 놓여 있습니다. 마치 우체국의 파업 기간 중에 도착한 발신 불명의 편지처럼.

 

그렇다면 글쓰기는, 문학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헤겔의 논의를 비스듬히 참조하면 불가능한 그것의 가능성 또한 가늠할 수 있습니다. 확인할 수 없으므로 실행이 불가능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다는 불가능한 순환 속에서, 블랑쇼는 작품은 계획될 수 없고 단지 실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현실에서 작품의 자리는 단어와 단어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작가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고요. 블랑쇼는 카프카를 통해 작가는 상황이 어떻든, 시작, 중간, 끝의 과정을 염두에 두지 말고, 즉각적으로 시작하고 즉각적으로 행위의 차원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글쓰기를 가로막는 순환 고리를, 즉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지만 쓰지 않는 한 재능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순환 고리를, 또 실천적 활동을 통해 현실에 도달하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실천적 활동으로 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순환 고리를 단절할 수 있습니다. 쓰는 것을 통해, 오직 그 방법만으로.

 

헤겔은 인간 존재와 그의 행위가 사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동의 가능성에 주목하는데, 이 지점에서 헤겔과 마찬가지로 블랑쇼 또한 작가라는 노동자와, 노동의 산물인 작품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작가의 활동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계 속에서 확인하는 인간의 활동과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물론 이때 작가가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것이 바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고요.

 

블랑쇼에 따르면 노동의 산물로서 작품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그것이 사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사물. 사물로서의 작품은 다른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해 세계에 탄생하는 순간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 활동의 산물이, 모든 사물의 탄생이 즉각적으로, 필연적으로 세계의 변화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논의는 물론 보다 촘촘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카프카가 글쓰기를 기도의 형식이라고 일컫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가 처했던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기인하는 신비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글쓰기가 기도의 형식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글쓰기가 사물로서의 작품을 생산하는 활동이자, 세계의 의미와 기호를 바꾸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카프카에게 있어 이 문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질서를, 사라져 없어질 것, 고립된 것, 우연에 속하는 것, 하지만 확실한 그것을 어떻게 법의 영역으로, 세계 속으로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직결되지요.

 

우리는 블랑쇼를 따라 릴케와 말라르메를 지나 이제 카프카에 이르렀습니다. 작가와 작업과 작품 사이를 오가며 문학의 공간을 가늠하고 있지요. 카프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 원죄가 있는데, 초조함과 무관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려 원죄라고까지 한다면 피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느긋하게, 그리고 조금은 친절한 관심으로 이 공간을 더 탐사해봅시다. 아직 밤은 길게 남아 있으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문학의 공간에서 작품이라는 이상한 매개물이 갖는 의미들을 더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2018. 10. 12.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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