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의 방법들

September 21, 2018

롤링 스쿨의 두 번째 주제는 모리스 블랑쇼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을 함께 읽습니다. 얼핏 생소한 이름인 것 같지만 블랑쇼는 푸코나 들뢰즈, 데리다처럼 이름도 쟁쟁한 동시대 철학자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던 독특하고 매력적인 사상가입니다. 특히 그가 문학을 중심으로 펼쳐놓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군데군데 까다로운 요소들이 있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블랑쇼는 다양한 유형의 문학 작품들을 섬세하게 검토하면서,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또 작품과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무엇인지 끝없이 성찰합니다. 탐구 대상을 추적하는 블랑쇼의 방법이 갖는 의미는 비단 문학과 예술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차츰 살펴보도록 하지요.

 

블랑쇼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문학을, 문학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블랑쇼 이전에도, 이후에도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었습니다만 블랑쇼는 이전까지의 논의들과는 상당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을 책의 제목 <문학의 공간>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블랑쇼는 문학이라는 고유한 어떤 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문학을 그 자체로 정의하고자 시도합니다. 바깥, 밤, 죽음, 불가능 따위 개념을 통해서요.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사실 퍽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세미나에서 우리가 다루는 문제의 경우라면 예술을 그 자체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되겠지요.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쩐지 이미 한물 간 유행처럼 느껴질 때도 종종 있습니다만, 진지하고 경쾌한 탐구를 경시하는 얄팍한 시선들은 정작 그러한 풍조가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또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유행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을 유행 따라 흘러가도록 두는 것도 물론 좋겠군요.)

 

실은 이 예술이라는 개념 또한 상당히 의심스러운 개념이긴 합니다. 어원과 용례 양쪽에서 모두 그렇습니다. 예술 운운하는 의심스런 용례야 굳이 일별할 필요도 없을 만큼 차고 넘치는 판국이니 어원 쪽부터 살펴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예술’이라는 낱말은 메이지 시대의 학자 니시 아마네가 ‘art’를 번역하기 위해 선택한 조어입니다. 한자 예(藝)와 술(藝)을 결합시켜 만든 낱말이지요. (잘 알려진 사실처럼 유럽의 지적, 문화적 전통에 기원을 둔 많은 개념어들이 이러한 방식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되었고, 이때 들어온 개념들은 오늘날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예(藝)는 본래 어떤 재주나 법도를 뜻하는 문자로, 농경 문화에서 풀과 나무를 심는 모양을 본따 만든 문자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풀을 심기 위해서는 재주가 필요하다, 혹은 어떤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의미에 기원을 두고 있겠고, 나아가보면 농경 문화의 근간인 농작의 중요성처럼 어떤 일에 필요한 기술과 재주 전반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술(藝) 또한 어떤 재주나 방법을 뜻하는 문자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이 문자는 우선 모든 사람이 벗어나지 않고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을 의미하겠고, 그러므로 응당 따라야 할 어떤 규칙이나 법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동아시아의 개념어 안에는 아름다움이나 창조적 활동에 관련한 의미보다 방법과 기술이라는 의미가 퍽 강하게 들어있는 셈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예술’이라는 개념어를 탄생시킨 현대어 ‘art’는 라틴어 ‘ars’에서 유래한 낱말입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ars’’’는 그리스어 ‘technê’에 기원을 두고 있지요. ‘technê’는 당장에 전문적인 기교나 기술을 가리키는 현대어 ‘technic’로 이어집니다. 의미도 고스란히 살아 있고요. 한편 라틴어 ‘ars’는 그리스어 ‘poiêsis’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poiêsis’는 만들다, 제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결국 ‘ars’는, ‘art’는 제작하고 만드는 기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입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예술은 꼭 전문적인 직업인이나 기술자, 작가에 한정되는 일이 아닙니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커피를 끓이는 것, 혹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 또한 말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의 전통에서, 매체 불문 그 모든 탁월한 업적과 성취가 증언하는 종적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작인으로서 인간의 궁극적인 과제와 성취는 어떤 작품을 만들고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자기자신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는 그리스의 지적 전통의 정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한 것과도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만드는 것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이념은 나중에 헤겔이 경탄스럽게 전유하여 다시 선언합니다. 가장 참된 것, 진정한 것, 생생하고 탁월한 것에 대한 예술의 위대한 과업은 이제 세계에, 세계 내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과업이 되었다고요. 물론 진짜 그런지는 또 따져봐야 할 노릇입니다.

 

 

… (중략) …

 

 

 

비트겐슈타인이 매우 날카롭게 간파했듯이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내적으로, 어떤 본질을 통해 정의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실은 비트겐슈타인 이전에도 대부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 모든 존재와 인식의 항구적 근거로서 이데아의 실재를 주장했던 플라톤 또한 이 사태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술 담론은 예술사회학, 혹은 메타비평(metacritic)을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이를 테면 특정한 업종 내에서 통용되는 특수 언어이자 지역 방언으로, 예술이라는 생태계의 행위자들이 주고받는 기호 논리로서 예술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요.

 

하지만 블랑쇼라면 문학이 문학을 생산한다고, 예술이 드러내고 확증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라고 조용하지만 힘주어 말할 겁니다. 블랑쇼가 문학과 죽음의 관계를 말할 때, 혹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잠들지 못하는 밤과 가능한 불가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요설이 아닙니다. 읽는 이의 쓸데없는 환상을 부추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첫 시간이니 만큼 예비적으로 한 가지만 짚어볼까요? <문학의 공간>에서 블랑쇼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제시합니다. <문학의 공간>뿐 아닌 다른 저작들 <도래할 책>, <카오스의 글쓰기>,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등에서도 비슷한 성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다루면서 블랑쇼는 죽음이 가능한지 묻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죽음이 가능한지요. 블랑쇼를 따라가 봅시다. 나는 죽는다, 내가 죽는다, 라는 사태가 가능할까요? 나는 죽을 수 있을까요? 블랑쇼에 따르면 사람은 죽음을 기도할(projecter) 수 없습니다. 심지어 노리는 것, 목표로 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물론 사람은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지요. 하지만 자명한 이치 앞에서 블랑쇼는 태연하게 의문을 던집니다. 다시 묻지요, 나는 죽을 수 있는가?

 

블랑쇼의 예시를 인용합니다. 한 사람이 자살을 준비합니다. 빈틈없이 계획도 세웠습니다. 칼을 준비했다고 봐도 좋고, 혹은 약이나 줄을 준비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날짜도 정했습니다. 그리고 결행의 순간. 베거나, 삼키거나, 혹은 줄을 목에 건 뒤 밟고 있던 의자나 물건을 걷어찬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습니다. 시간을 천천히 돌려볼까요? 결행의 순간부터 자살자는 죽어갑니다. 죽음에 다가갑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죽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질문을 바꿔 봅시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나의 죽음과 조우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나는, 살아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과 정반대로,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고 비인칭의 죽음이고 일반명사의 죽음입니다. 나는 절대로 나의 죽음이라는 결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음이라는 나의 행위를 완료할 수 없고 완료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즉 죽음의 본질은 나와 죽음이 동시에 사라져가는 사태인 것이지요. 블랑쇼는 한발 더 나아가 이 사라짐은 영원한 유예라고까지 말합니다. 죽음 속에서 나는 죽음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지만 나는 이 사라짐의 완료를 영원히 환수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 있는 사람 또한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상상하고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을지라도 끝내 그것을 완수할 수는 없으니까요.

 

블랑쇼는 이 끝없는 과정이라는 죽음과 문학의 공통점을 간파합니다. 죽음 운운하는 거짓 예술가의 착란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술 창작의 과정이 죽음과 닮았다는 시시한 이야기도 물론 아닙니다. 블랑쇼가 날카롭게 간파한 사실은 예술가와 작업(작품) 사이의 기이한 관계가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이 죽음과 맺는 관계와 닮아 있다는 점입니다. 둘 다 강고한 의지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지만, 어떤 심사숙고와 결연한 행위도 자신의 완료를 환수할 수 없다는 사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어떤 방식으로 결말과의 관계가 강제되어 있는 이 사태가 바로 문학이라는 것이지요. 도달할 수 없는, 노력이나 재주의 부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것을 향해,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끝없이 기도한다는 이 사태가 죽음과 닮아 있는 문학의 본질이라고 블랑쇼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블랑쇼는 덧붙입니다. 독서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묘석과 함께 추는 즐겁고 열광적인 춤이라고.

 

첫 시간이니 만큼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우리의 밤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9. 21.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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