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July 13, 2018

바디우는 사랑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무엇을 구축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 구축하는 것, 사랑이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는 랭보의 시구를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이미 인간의 사랑이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 몇 번이나 거듭해서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디우가 사랑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것, 사랑이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 트리옹과 바디우의 대화를 통해 완벽한 사랑의 이상을 꿈꾸는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관념과, 사랑을 믿지 않고 부정하는 회의적인 관점을 함께 살펴봤지요. 흔히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이 사랑에서 기대하는 것은 의외로 둘이 아닌 하나, 하나로의 합일입니다.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룬다’는 기독교적인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 사랑하기 전에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던 두 사람이 사랑을 통해 온전하게 결합할 것이라는 기대가 (결혼이나 한 가족을 이루는 것을 사랑의 결실로 바라보는 관점 또한 합일에 대한 일종의 낭만적인 환상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사랑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 속에 존재합니다. 사랑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사랑의 흔한 시작 속에서도 이 ‘하나’에 대한 기대는 존재합니다. 많은 경우 자신의 사랑을 찾으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 이를 테면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 같은 취향의 사람 등을 떠올리지요.

 

하지만 바디우는 사랑이 구축하는 것, 사랑을 통해 세계에 만들어지는 것은 ‘둘의 무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둘은 물론 여자 한 사람, 남자 한 사람을 가리키는 산술적인 의미에서의 둘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인 것과, 나 아닌 것으로서의 둘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에 가깝지요. 바디우는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의 개인은 무한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아닌 어떤 것도 모르는 사람을 생각해볼까요? 물론 이것은 단순히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주 순수하게, 자신이 아닌 어떤 것도 없이 완벽하게 고립되어 홀로 있는 어떤 것을 떠올려 봅시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덥다, 라는 것은 춥다, 내지는 시원하다, 따뜻하다, 서늘하다, 쌀쌀하다 등과의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무겁다, 라는 것은 가볍다, 묵직하다, 들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다, 밀리지 않는다, 등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요. 이건 언어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분간할 수 있는 아무런 기준도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태 속에서 인간은 그저 ‘어떤 것’의 총체일 뿐, 그것이 무엇도 될 수 없으니까요. 성별이 어떻고, 생김새가 어떻고, 나이가 어떻고, 품성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죄다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 파생하는 성격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아닌 어떤 것도 갖지 못한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셈해질 수 없고 분간되어지지 않는 무한한 존재에 다름 아니지요

 

사랑은 하나와 하나의 마주침에서 발생합니다. 사랑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이 둘,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둘입니다. 바디우는 이것을 ‘둘의 무대’라고 일컫습니다. 사랑이 구축하는 것은 바로 이 무대, 둘만의 무대입니다. (물론 모든 마주침이 다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문을 열며 바디우가 언급했던 것처럼, 사랑에서 위험을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이 만남과 우연을 사랑에서 배제시키려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접근은 실은 홀로 갇혀 있는 개인을 지속시킬 뿐이며 사랑을 개인에게 종속된 어떤 것으로, 쾌락을 산출하거나 불편을 초래할 수 있는 인간 활동 가운데 하나로 사랑의 의미를 축소시킬 뿐입니다.

 

 

... (중략) ...

 

 

바디우는 사랑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하면서, 사랑에 충실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의 진리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 혹은 배우자를 속이지 않겠다는 약속 등이 사랑에 있어 충실성의 전부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사랑에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는 거짓이라고 할 수도 있을 어떤 것들이 얼마든지 끼어들 수 있습니다. 사랑에서의 충실성은 말 그대로, 사랑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요.

 

그렇다면 사랑에 충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 구축한 것, 사랑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 그 자체에 충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전적으로 우연한 만남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 만남으로부터 사랑하는 연인들은, 사랑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요소들을 기꺼이 떠안습니다. 바디우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우연한 것을 세계에 고정하는 사랑. 사랑은 우연을 세계에 고정합니다. 사랑은 이전까지의 세계와 전적으로 낯선 것,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세계에 있었던 것처럼,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우연에 불과한 요소들을 마치 세계의 규칙인 것처럼 만들고 세계에 각인합니다. 바로 그렇게 연인들은 둘만의 무대에서, 둘만의 규칙으로, 마치 세계에 자신들 둘 뿐인 것처럼, 기존의 세계가 아닌 사랑으로 인해 바뀐 세계에 충실한 것이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우연을 세계에 고정하는 것은 비단 사랑만이 아니라, 그가 ‘진리의 절차(procédure vérité)’라고 부르는 정치, 예술, 과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생산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효과를 산출한다는 것은 바디우가 사랑의 고백이 아닌 사랑의 선언, 사랑을 선언하는 것을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자, 바디우에 따르면 이 세계에서 (사랑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생산하는 몇 가지 활동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이것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바디우와 트리옹의 이야기는 이제 사랑과 예술, 사랑과 정치의 관계로 향합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7. 13.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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