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July 9, 2018

지난 토요일 대학로에서는 몰카촬영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시위가 다시 한 번 열렸습니다. 시위를 전후해 다시 한 번 많은 논란이 있었고요. 일상에 만연한 수준의 성 범죄에 대한 비판이야 (물론 공감의 정도 차이야 있겠습니다만)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겠지만, 예컨대 시위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대통령의 자살을 구호 삼아 외쳤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다소 억지스런 해명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때아닌 음모론까지 불거질 정도로요. 시위의 주장에 공감을 표한 정부 부처장에 대한 강한 비판 여론도 줄을 이었습니다. 시위를 조직한 운영진 내부에서 남성에 대한 혐오 발언과 독단적 운영을 시인하는 내부 고발이 등장하기도 했고요. 이처럼 많은 논란에도 시위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시위는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한 대학의 누드모델 사진의 유포와 이에 대한 수사 과정의 편파성을 규탄하는 것으로 시위는 시작했지만, 시위에 앞서 꾸준히 문제가 되었던 미투운동이나 모 항공사 여성 승무원들이 사주 환대를 위해 부당하게 동원된 사실 등이 공개되는 등 불씨를 살릴 수 있는 요소들이야 차고도 넘치니까요. 하긴 현 시점에서 본다면 불씨를 살린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이미 불은 잘 붙어 활활 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몇 차례 시위와 이를 둘러싼 논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사실들의 관계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것처럼 젠더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잠정적이거나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이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위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지점들이 있을 테고, 또 근본적으로 문제 자체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관점들도 존재하겠지요.

 

어떤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진위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어떤 문제를 제기했을 때 문제 제기가 타당한지, 혹은 정말로 그런 문제가 존재하는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지식을 참이라고 판단하고 어떤 종류의 지식을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편파 수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에 놓여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여기까지만 듣고도 벌써, 이미 각자 속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셨는지도 모르겠군요.)

 

판단의 과정이야 복잡할 수 있겠지만 결국 핵심은 판단한 그 지식이 실제 현실과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일 것입니다. 당연하겠지요, 오늘처럼 비가 올 때 ‘비가 온다’고 판단했다면 그건 진실이고 비가 오는데 ‘눈이 온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이 단순한 구분을 실마리 삼아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사태를 실재라고 명명한다면, 자연적 실재에 대한 판단의 진위를 구분하는 것은 비교적 수월합니다. 예를 들면 ‘물이 100℃에서 끓는다’라는 지식은 ‘물’을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화합물로 정의하고, ‘100℃’라는 상태는 섭씨온도 표준계에 따라 설정한 뒤, ‘끓는다’라는 술어의 의미를 ‘물’의 상태가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것’이라고 정한다면 쉽게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경우에 따라 표준기압 설정 등의 세부조건을 부연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진술의 진위를 경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와 같은 지식은 어떻습니까? 물 끓이듯이 실험하기도 어렵거니와 문제를 다루기 위한 규칙과 기준의 설정 방식 또한 달라야겠지요. 사회학(사회과학)은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사회학은 앞서 예시한 진술과 같은 사회 현상이 자연과학이 다루는 자연적 실재처럼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믿음을 토대로 사회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수행합니다. 뒤르켐은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개인 외부에 존재하며 개인에게 강제적 힘을 부여하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제하는 행위양식, 사고양식, 감정의 양식’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들은 표상과 행위로 구성되기 때문에 생물학적 현상과 뚜렷하게 구분되며, 특정 개인에게, 특정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현상과도 다르다고 주장하지요. 사회적 차원에서 개인들에게 광범위한 지배력을 갖는 바로 이 행위와 사고와 감정의 양식을 ‘사회적 실재’라고 합니다. 사회과학은 바로 이 사회적 실재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학문 영역이라 할 수 있고요. 19세기 후반 사회학이 본격적으로 탐구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 뒤, 명시적으로 사회학이라는 간판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이 사회적 실재를 다루는 탐구가 광범위하게 등장했습니다. 뒤르켐이나 막스 베버, 넓은 범위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나 프로이트의 연구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는 대체로 큰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자연과학 역시 함께 발달하고 탐구의 방법을 정교화하면서, 결국 ‘과학’과 ‘실재’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회적 실재를 다루는 연구가 20세기 중반 이후 근대성 비판과 인간중심주의 비판에 치중하면서 과학적 인식에 대한, 과학의 객관적 토대에 대한 광범위하게 비판하면서 이러한 차이는 점차 도드라지지요. 이러한 차이는 결국 1990년대 ‘과학전쟁’으로 폭발합니다. 포스트모너니즘 논쟁으로도 불리는 이 갈등은 과학의 객관성과 실재성을 둘러싸고 그것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실재론자들과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구성주의자들 사이의 극명한 입장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과학전쟁의 핵심은 연구자의 개인적, 사회적의 특성과 연구 결과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있습니다. 실재론자들은 과학적 탐구야 말로 지적 활동과 그 결과물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과학이 탐구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도출하지 못한 경우는 과학적 탐구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은 일부 ‘나쁜 과학’이나 ‘실패한 과학’의 경우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것을 구실로 과학 자체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지요.

 

반면 구성주의, 특히 오늘 우리가 다룰 하딩이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입장론(standpoint theory)의 지지자들은 과학자 역시 그가 속한 사회적 힘들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과학자’여도 마찬가지지요. 이에 따르면 과학의 보편성이란 결국 지배 계급, 인종, 성별, 문화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성이며, 심지어 과학은 보편을 구실로 이러한 배제를 타당한 것처럼 제도화하는 작용까지 수행할 때도 있습니다.

 

하딩은 페미니즘에 관련한 입장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과학은 세상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생산함과 동시에 정치적인 정보를 생산하며, 과학적 지식은 진보적 성향과 퇴행적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딩은 과학적 지식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독법을 제안합니다. ‘지식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하딩은 과학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과학학(social studies of science)’, 특히 ‘페미니스트 과학학’의 필요성을 제안하지요.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의 과학 비판은 ‘나쁜 과학(bad science)’을 비판하는 것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뉩니다. 전자는 과학적 탐구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성차에 관한 가치중립을 지키지 못하는 일부 과학을 비판하는 것을 요체로 하고, 후자는 모든 지식은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상황 속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성차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하는 현행 질서에서 만들어지는 과학적 지식, 즉 정상적인 탐구라고 여겨지는 활동 전체를 비판합니다. 당연히 ‘더 좋은’ 방식으로, ‘더 잘’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젠더 이슈를 다룰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요.

 

전자의 관점을 통상 페미니스트 경험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연구자가 가진 성차별이나 남성중심적 가치관 같은 사회적 편견을 제거하면 중립적인 탐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여성의 과학적 참여가 중요한 것은 여성 과학자가 젠더  이슈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기존의 편견을 덜 공유하며 그만큼 과학의 객관적 규범을 준수하기 용이하기 때문이지요.

 

후자의 관점은 페미니스트 입장론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든 연구자는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지니고 있으며, 연구자가 어느 위치에 있든 그 자리 또한 중립적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의 참여적 가치관이 오히려 연구 결과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연구자의 사회적 정체성이 연구 결과의 신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에 따르면 여성의 과학적 참여가 중요한 것은 여성이 중립적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성차별주의를 내재화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차이가 눈에 들어오시나요? 어떤 관점이 더 타당한 것 같습니까?

 

하딩 역시 다른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연구를 거듭하며 초기 입장을 조금씩 개선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입장론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초기에 하딩이 주로 과학에서 여성이 갖는 특수한 위치를 강조했다면 뒤로 갈수록 점차 페미니스트의 의미를 확장해서 적용합니다. 즉 페미니스트 연구자란 단순히 여성이거나 여성의 경험을 공유하는 연구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삶의 위치에서 기꺼이 연구를 시작하려는 자세를 갖춘’ 연구자를 의미하며, 과학자로서 이들이 갖는 입장은 ‘단순히 여성의 경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 집단의 경험이 산출하는 상식과 그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들을 상대화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페미니스트의 관점이란 사회적으로든 선택적으로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인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후기로 갈수록 하딩은 사회의 여러 관계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성에서 벗어나 여성 집단 내부에서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페미니스트 과학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성의 삶에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합니다. 이러한 입장은 자칫 ‘여성의 삶’을 ‘모든 여성’의 삶으로 단순화시켜 환원할 위험을 안고 있지요. 그래서 하딩은 ‘모든 여성들의 삶’에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여성 집단 내부에서도 계급, 인종, 성적 정체성 등 기존의 수많은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할 테니까요. 이러한 하딩의 관점은 결국 서로 다른 입장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 차이들이 상호 교차하는 일상에서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보이지 않게 은밀히 작동했던 권력을 발견하고 타자들의 삶이 처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아갑니다. 기존의 보편 담론이 축소하거나 외면하거나 은폐했던 여성의 문제에서 출발해 페미니즘이 타자 전반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본격적인 지평을 확보한 셈입니다.

 

 

 

… (중략) …

 

 

지난 시간 보부아르를 통해 사회적 성으로서 젠더는 생물학적 성과 달리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확인했지요. 하딩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라는 것,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어떤 판단과 가치관의 체계의 근원을 묻고 이를 바탕으로 더 타당한, 더 바람직한, 더 올바른 신념 체계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은 성취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하딩이 제시하는 페미니스트 과학은 단순히 여성인 과학자가 수행하는 과학이나 여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보부아르가 여성이라는 성이 단순히 남성의 대립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중심으로 한 질서 체계가 존재하고 여기에서 배제되는 속성들이 여성이라는 성이 구성하는 것이라고 파악한 것처럼, 하딩 또한 사회를 이루는 여러 집단의 지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직시하고 여기에서 중심 집단과 배제되는 집단이 어떻게 나뉘는지, 또 어떻게 중심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 질서가 편성되는지 이해하는 것을 과학의 사회적 과제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페미니스트 과학은 중심 집단의 경험이 그 사회의 상식과 방법들을 형성하는 과정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이라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니스트 입장론은 사회 각 영역의 행위자들이 갖는 저마다의 ‘입장(standpoint)’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며, 과학과 정치를 통해 더 올바르게 교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은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또 백인들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요.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수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문구로서 페미니즘은 사실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말장난 같은 논쟁, 논쟁을 위한 논쟁을 부추기는 트집을 피한다면)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내지는 ‘차로 사람을 치면 안 됩니다’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상식적인 내용이지요. 페미니스트 입장론의 함의는 백인도 백인이 아닌 입장에서 인종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사장은 사원의 입장에서 (혹은 사원도 사주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은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와 같이 각자가 가진 정체성은 사회적 구성물이므로 여기에 갇히지 않고 다른 입장들을, 입장을 만드는 사회의 구성과 작동의 차원에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있습니다. 정체성 논리에 갇히지 않고 서로의 정체성의 다시 묻는 일, 페미니스트라면 가능합니다.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7. 9. / 무중력지대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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