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July 6, 2018

어느새 7월이군요. 많은 사람들이 ‘바캉스’라는 이름으로 무더위를 피해 어디로든 떠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이맘때면 연극 축제가 열립니다. 피카소의 작품으로도 유명한 아비뇽에서요. 매년 7월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연예술 축제, 바로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입니다.총 3주 동안 진행되는 축제 기간에는 다양한 다양한 연극과 공연이 펼쳐집니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현대극까지, 또 광대극, 1인극, 뮤지컬, 춤, 마임 등을 망라한. 극장과 무대는 물론 옛 수도원과 창고, 광장, 카페, 도시 곳곳의 골목들까지 다채로운 공연으로 가득 차지요.

 

1947년 처음 시작한 이 축제는 이제 프랑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큰 규모의 축제로 발돋움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기도 하고요. 마침 2018년 아비뇽 축제의 개막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지금쯤 축제의 역사를 소개하는 순서를 진행하고 있겠군요. 올해 축제의 주제도 퍽 흥미롭습니다. (주최 측에서 축제 소개를 슬로건처럼 딱 한 마디로 잘라서 내걸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대안은 없다, 다른 선택은 불가능하다고 한 방향의 선택을 강요하는 세계 앞에서, 가능성이 주는 즐거움을 후대가 계승할 수 있도록 ‘다른 것’을 욕망하는 방법을 배우자'는 것이 이번 축제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말은 그럴싸 하지만 여기에서의 다른 것, 즉 세계가 가능하다고 허락하지 않은 것, 그러므로 불가능한 (적어도 아직까지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거나 보이지조차 않는) 어떤 것을 사유하는 문제는 사실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좀 단순하게 도식화한다면 (인간의) 세계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답변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거대한 함수체계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는 여성과 남성의 자리를 나누고, (즉 이것은 여성이다, 여성은 무엇이다, 여성은 어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 어른과 아이를 나누고, 예절과 무례를 나누고, 정당성과 폭력을 나누고, 아름다운 것과 흉한 것을 구분하고, 성숙과 미숙을 구분하고, 값진 것과 무가치한 것을 구분하고, … 하는 식의 분할선으로 이루어진 셈이지요. 자, 그런 세계는 지금도 인간에게 똑같은 요구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무엇이다,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라고.

 

사실 굳이 ‘세계가 이런 곳이었다니!’ 하고 소란을 부릴 만한 일은 아닙니다. 세계는 본래도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인간 세계가 본래 그런 곳이 아닌 적이 없었는데 유난을 부리는 것은 어쩐지 좀 쑥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구획된 세계 바깥, 세계가 구획한 경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까요? ‘바깥'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사기 딱 좋군요. ‘다른 가능성’ 운운하면서 세계의 ‘바깥’, 즉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세계를 그리는 것은 세계를 낭만화하는,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다시 그러니까 세계의 실상이 어떻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유아적인 시각의 산물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오히려 세계가 구획한 기준선의 바깥이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는 이렇게 보는 편이 좋겠군요. 세계에 기준선을 다시 그린다, 그러므로 어제까지와 동일했던 이 세계는 이제부터 다른 세계이기도 하다, 라고요. 예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 가운데 몹시도 중요한 어떤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는 세계에 대해 웃으면서 왜 안 되는지 묻는 일, 된다고 말하는 일, 된다는 것을 새겨 넣는 일.

 

<사랑 예찬>의 주인공인 바디우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생각입니다. 그가 사랑을 예찬하겠다고 나선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바로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세계에 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지요. 프랑스의 작가 니콜라 트리옹은 2004년 아비뇽 축제에서 독특한 공연을 선보입니다. ‘사유의 연극(Le Théâtre des Idées)’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에서 트리옹은 철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들을 초대해 관객 앞에서 일종의 대화극을 선보입니다. 첫 공연이었던 2004년 데리다를 시작으로 낭시, 에두아르 글리상 등이 대담을 진행한 바 있고요. 바디우는 2008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트리옹과 함께 관객들을 만납니다. <사랑 예찬>은 바로 이 대담의 기록입니다.

 

무대 위에서 바디우는 위협 받는 사랑, 위험에 처한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문을 엽니다. 그는 사랑이 처한 위험이 사랑에서 위험을 제거하려는 시도와 이어져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에 주목합니다. 바디우는 한때 파리 전역을 도배하다시피 했던 한 데이트 알선 사이트의 광고를 소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광고에 등장했던 문구들에 주목하면서요. 이 광고에는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와 같은 문구가 등장합니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와 같은 문구나, ‘고통 받지 않고서도 당신은 완벽하게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와 같은 문구도 있습니다.

 

바디우는 이러한 선전이 사랑에서 알 수 없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제거하여 사랑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는 프로파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위험이 부재하는 관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약속된 합의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상호 증여’로서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이를 테면 언젠가 미국이 자국이 수행하는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 ‘전사자 없는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전사자가 없는 것이 전쟁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전쟁이 발생하면 누군가는 다치고 죽습니다. 미군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지 않는 것은 다만 나,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으로서의 우리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타인의 고통, 또 고통의 원인으로서 전쟁은 사라집니다. 이처럼 ‘고통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나의 고통을 회피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왜 고통이 생기는지에 대한 접근 역시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만들지요. 위험 없는 사랑이 꼭 이런 짝입니다. ‘보험 계약서’와 같은 사랑, 사랑의 탈을 쓴 사랑의 적대자인 것이지요.

 

사랑에서 위험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 즉시 사랑을 쾌락의 차원에 한정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타자와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변화의 가능성, 심오하고 진실된 모든 경험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이루어지며, 사랑의 기쁨 역시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지지요. 즉 안전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기만 속에 사랑이 국한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난관에서 바디우는 사랑의 어떤 특성에 주목합니다. 바디우는 사랑의 경험에서 순전히 우연에서 비롯하는 어떤 특이성이 보편적 가치를 지닌 요소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지극히 주관적으로 보이는 사랑이 실은 가장 보편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수익에 대한 기대나 이해타산이 아닌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사랑은 대상의 차이, 즉 나와 다른 타자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매우 근본적인 경험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이어서 바디우는 기존의 철학이 사랑을 대하는 관점을 검토합니다. 이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철학이 사랑을 대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 상반되는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하나의 극단으로 쇼펜하우어를 필두로 하는 ‘반(反) 사랑’의 철학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를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거나 성차에 대한 오만한 편견을 포함하는 입장이지요. 다른 한편 이와 정반대로 사랑을 신비화하고 탈세속화하여 사랑 자체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때로 사랑은 단순한 쾌락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개인의 윤리와 진실성을 시험하는 과정을 겪으며 윤리적, 종교적 단계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디우는 키에르케고르를 후자의 예시로 꼽습니다.) 즉 사랑을 중심으로 생리적 현상에 사랑의 의미를 국한하려는 극단적 관점과 사랑을 종교적 도약의 매개로 바라보는 극단적인 관점이 교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디우는 사랑에 드리운 철학적 개념들 가운데 세 가지 원칙을 구별해낼 것을 제안합니다. 첫째는 만남의 황홀로서 사랑을 바라보는 낭만적 개념, 둘째는 사랑을 상업이나 법률 관계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계약적 개념, 마지막으로 사랑을 일종의 환상으로 여기는 회의적 개념입니다. 이렇게 세가지 차원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 이들로부터 사랑의 의미를 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는 기존의 관점들이 갖는 한계 속에서 이리저리 재단당하고 잘려나간 사랑이 아니라, 바디우의 표현을 인용한다면 ‘세계의 탄생’과 관련된 어떤 것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그것의 본래 의미를 확증하기 위해서지요.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관점은 사실 퍽 독특합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보다 성애로서의 사랑인데, 사실 철학의 역사에서 성애는 그리 중요한 탐구 대상이 아니었으니까요. 성애는 적어도 프로이트에 이르러서 욕망이라는 주제와 함께, 혹은 다윈에 이르러서 종의 재생산이라는 관점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합니다. 철학에서 사랑이라는 주제, 특히 성애적 사랑, 연애로서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그리 환영받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 최초의 철학 저작은 아마도 <향연>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향연>에 등장하는 사랑은 엄밀히 말해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과는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미메시스’를 통해 예술의 문제를 검토한 이래 오랜 시간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일정 부분 여전히) ‘미메시스’가 예술의 문제를 다루는 핵심 개념이었던 것처럼,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랑(에로스)의 문제를 사랑, 진리, 아름다움의 삼항관계 속에서 파악한 이래 철학은 대체로 이 관점을 고수했습니다. 중세에 이르러 사랑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해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하지만 여전히 성애적 사랑, 연애로서의 사랑은 등한시되었고요. 등한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멸시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유럽의 지적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두 줄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 양쪽에서 사랑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 (중략) …

 

 

세미나 서두에 아비뇽 축제를 소개하면서 간단하게 세계의 구획에 관해 언급했습니다만, 세계의 이러한 특징은 사랑이라는 주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는 답변이 짝을 이뤄, 사랑인 것과 사랑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이러한 구분을 강제하는, 즉 세계가 허용한 방식으로만 사랑을 허락한다는 사실에서요. 시대에 따라 사랑의 유형이 변해왔다는 뻔하고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연애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12세기 유럽 정도부터만 간단히 살펴볼까요? 흔히 기사도라고 하는 바로 그 이야기와 함께 연애는 시작합니다. 기사도의 등장 이전까지 인간의 연애나 사랑의 감정은 그저 육욕, 성욕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모름지기 진리에 대한 사랑 내지는 신에 대한 사랑, 혹은 세계에 대한 신의 사랑쯤은 되어야 사랑이라고 할 만하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갖는 사랑의 감정은 그저 쾌락에 대한 욕구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졌지요. 오늘날 생각하기에는 쾌락에 대한 욕구를 갖는 것이 뭐가 나쁜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쾌락의 지배를 따르는 인간을 미성숙하고 열등하다고 여겼던 그리스의 전통이나, 나아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던 로마 가톨릭의 전통에 비춰본다면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하찮고 심지어 나쁜 것으로 여겨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무려 무신론자와 이교도들이 고통 받는 지옥의 바로 다음 편이 바로 육욕으로 인해 죄를 범한 자들이 모여 있는 지옥입니다.)

 

앞서 ‘연애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연애의 등장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음유시인들입니다. 11세기경부터 슬금슬금 나타난 이들이 기사도 문학을 발명하고 전파하면서, 이들이 묘사하는 궁정의 사랑 또한 이제까지 육욕에 불과했던 모습이 아니라 일종의 숭고함을 가진 형태로 전승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기사들이 가장 숭고한 형태로 자신의 연정을 오로지 한 상대에게 바치는 것, 그리고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오롯이 이를 간직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궁정 연애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사도 문학 속에서 이야기의 외관이나 형태, 등장인물이나 사건 따위야 당연하게도 다양하겠지만 이 특징 만큼은 동일하게 살아남아 확산되었습니다. (적어도 돈키호테라는 탁월한 패러디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이야기와 함께 연애라는 것,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 또한 바뀌었고요.

 

18세기에 이르러 궁정이 타도되면서 궁정 연애 또한 끝이 납니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봉건 질서가 붕괴하고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연애의 방식, 사랑의 유형 또한 재편됩니다. 궁정에서의 연애가 살롱에서의 연애로 바뀐 것이지요. 부르주아 세계로의 전환과 이 세계의 특징이야 익히 알려진 바이니 길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연애의 방식이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는 것은 세계대전과 이후입니다. 그야말로 국민을 포함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벌이는 전면전이 끝난 후, 그야말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의 유럽에서 기존의 계급적 구분이나 계층, 가문 등의 구획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유로운 연애’, 개인이 자신의 짝을 찾는 사랑의 방식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부르주아적 세계의 질서가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연애의 질서를 허용했다면, 종전 후에는 남성 수 자체가 크게 줄었다는 사실 또한 여기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이렇게 사랑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세계 속에서 변해왔다면, 당연히 우리도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세계가 허용하는 그 방식이 아니라, 세계가 사랑은 이런 것이다, 이것과 다른 나머지 것들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구획하는 그 방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랭보와 마찬가지로요.

 

자, 바디우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과 사랑을 구축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선을 그으면서, 이제 사랑의 구축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오늘날 사랑이 처한 상황이나, 이제까지 철학이 사랑을 어떻게 홀대했는가를 다뤘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이 펼쳐질 차례입니다. 트리옹은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재발명할 수 있을지 바디우에게 묻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돌아오는 밤, 바디우의 생각을 들어봅시다.

 

 

 

2018. 7. 6. / Rolling School

info@labyrinthos.co.kr

Please reload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