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July 2, 2018

사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갈등이 존재합니다. 서로 다른 여러 개인과 집단이 한 데 어울려 무리를 이룬 것을 사회라고 본다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입장에서, 똑같은 기준으로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면 갈등도 분쟁도 생길 리 없겠지만 역시 그런 세상이 가능할 리 없겠지요. 그래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갈등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거나 그와 어떤 일을 함께 수행하는 것은 의외로 긴장과 피로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당장 친구들 여럿이 모여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는 상황만 떠올려봐도 그렇습니다. 때로 만장일치로 치맥! 을 외치며 금세 쉬운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때로는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나는 이걸 먹고 싶고 너는 저걸 먹고 싶고 얘는 이건 싫다고 하고 쟤는 저건 싫다고 하고 누구는 매운 걸 못 먹고 누구는 해산물을 싫어해서 결정에 이르기까지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도 심심찮게 경험할 수 있지요. 뭐 저녁 메뉴 결정 따위로 친구들끼리 심각한 다툼을 벌이기야 하겠습니까만 갈등의 구조 자체는 대체로 동일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너는 저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원하고 너는 저것을 원한다, 라는 상황이지요. 이미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갈등을 조정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서로 번갈아 양보하기도 하고, 아니면 눈치껏 어느 한쪽이 먼저 양보하기도 하고, 중간에서 절충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정 식성이 안 맞으면 같이 밥을 안 먹겠지요. 오히려 이 편이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 있습니다. 식성 안 맞는 사람끼리 같이 밥을 먹겠다고 매번 만나서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에는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먹다보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걸 내심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테니까요.

 

그런데 어떤 종류의 갈등은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절충하거나, 아니면 아예 갈등 상황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부먹이냐 찍먹이냐 내지는 그렇다면 탕수육은 각자 따로 먹자, 정도가 아니라. 어떤 무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울릴 만한 다른 무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컨대 무중력지대 성북이 마음에 안 들면 얼마든지 다른 친구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지요. 이를 테면 가족 문제가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귄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어쩐지 나랑 생각도 좀 잘 맞고 같이 어울리면 재밌고 나를 크게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겠지만, 즉 반대로 말하면 나랑 생각지 잘 안 맞고 같이 있으면 어색하고 어쩐지 자꾸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가족이라면 그런 식으로 선택할 수 없으므로 서로 불편한 지점이 있어도 관계를 잘라내기 쉽지 않겠지요. 직장 동료도 사정이 비슷하겠군요. 회사에서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더러 회사를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물론 속으로 간절히 바랄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회사를 관두기도 쉽지 않고. (물론 직장인들의 가장 중요한 이직 사유입니다만.)

 

가족이나 직장 동료와의 갈등이 ‘부먹/찍먹’ 혹은 ‘양념/후라이드’ 갈등보다 불편한 까닭은 우선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고, 또 갈등의 영향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파급이 전방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적 갈등은 이해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는 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의외로 자신의 일로 닥쳐왔을 때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가 되지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불거진 성 갈등이 꼭 이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여성, 혹은 남성일 수밖에 없으므로 (사실 이 문제는 말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미나 기간 내내 천천히 고민을 이어가도록 합시다.) 이 문제의 당사자로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또 우리 곁의 모든 사람들, 가족이든 친구든 애인이든 어떤 누구도 마찬가지로 여성, 혹은 남성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문제가 내게 미치는 영향으로부터도 역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사정으로부터 한편에는 미투와 응원이, 페미니즘에 대한 뜨거운 열광과 호기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냉소와 조롱이, 불신과 편견이 존재하지요.

 

흔히 페미니즘, 혹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에는 공통적으로 성과 관련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확산하는 것은 아마 이러한 문제의식을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어쩌면 성의 구분은 한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미처 자의식이 생기기도 전에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남자 아이의 옷과 여자 아이의 옷을 다른 색으로 고르는 것처럼, 남자 아이의 이름과 여자 아이의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 제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기준일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이 구분 위에 놓여 있으며, 인간의 사회는 이 구분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진짜 질문은 던질 수 있는, 던져야 하는 장소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흔히 ‘1세대 페미니즘’ 혹은 ‘첫 번째 페미니즘 흐름(The First Wave of Feminism)'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페미니즘에서 비로소 현대 페미니즘이 고개를 내미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 (중략) …

 

 

오늘날 페미니즘의 사회 비판은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이에 기인하는 사회 제도들이 얼마나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부당한 압력을 가하도록 작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의 이면에는 여성들이 직접 체험하는 차별과 폭력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고요. (이러한 차별과 폭력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은 정말이지 ‘당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에 꼭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생각들,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던 관습과 제도들이 어떻게 여성을 타자화하는지, 혹은 어떻게 여성의 시각과 목소리를 배제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서서히 늘어가기는 것이겠지요. 또 특수한 맥락, 예컨대 최근의 한국 같은 경우에는 가히 파괴적이라고 할 만한 방식으로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지자가 늘어나는 만큼 페미니즘의 적대자 역시 함께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사람들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릴수록 이에 대한 오해 역시 함께 늘어난다고 할까요? 오늘날 페미니즘을 둘러싼 가장 일반적인 오해와 편견, 다시 말해 페미니즘의 비판이 겨냥하는 ‘여성’이라는 타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아닌 ‘페미니즘’ 그 자체에 대한 오해와 편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것의 이름에 관한 오해입니다. 이를 테면 페미니즘이 사실 은밀한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냐는 의혹이지요. 여전히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 앞에서 남성에 대한 사회의 부당한 처우와 남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편견을 맞세우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페미니스트임을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아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둘러싼 의심과 오해가 끊이지 않는 까닭은 아마 복잡하게 얽혀 있겠지요. 일차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냥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기존의 관성에 대한 경로의존성일 수도 있겠고요. 남성중심적인 세계에서 수혜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남성들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혹은 페미니즘(이라고 자처하는 주장들)이 쉽게 차별 행위자로 전제하는 남성들 역시 수많은 차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차별의 주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젠더를 둘러싼 주장들은 수많은 이유에서 연유하는 오해의 중층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대체로 오해의 층을 보태면서요. 쌓이는 오해를 따라 갈등도 함께 늘지만 늘 진짜 문제는 좀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부터 출발할 것인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문제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언제나 문제의식을 당대에 맞게 다시 묻는 것, 그리고 문제의 근원을 사유하는 것에서 출발하니까요.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이론적 지형이 존재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동등함에 초점을 맞추고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가 하면, 서로 다른 두 성이라는 차이에 초점을 맞춰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요청하기도 하지요. 어떤 페미니즘은 ‘두 개의 성’이라는 전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도식 자체가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면서요. 이러한 주장은 성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자연적 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보편 집단으로서의 남성과 그 여집합으로서의 여성이라는 타자 집단이라는 구분에 기반하고 있다고 접근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은 다양한 개인의 신체적 자유나 성 정체성에 관련한 문제에 있어 필연적으로 억압과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지요. 또한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과 여성의 삶, 혹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넘어 현대 사회의 윤리와 정치, 경제 등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페미니즘은 ‘여성’에서 출발하지만 여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적인 것(feminine)과 여성주의적인 것(feminist)을 구분합니다. 여성주의가 다루는 것이 단순히 여성적인 것을 초과한다는 뜻이지요. 때로 여성주의가 여성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여성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그것이 다루는 대상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라는 이름의 의미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때의 그 ‘여성’이라고 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보편’이 배제하는 타자의 고유명사, 기존의 권력관계에서 은폐되는 것들의 대명사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단순히 남성의 대립항(counter term)이 아니라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이론과 이들이 다루는 문제들, 이들 사이의 관계들을 천천히 살펴봅시다. 전통을 물려받는 것은  그 가운데 이을 것과 자를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고, 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그 가운데 배울 것과 내칠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면 너무 오만할까요? 페미니즘의 논쟁은 사실 이미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낡은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성 평등과 여성 해방을 기계적으로, 혹은 동물적으로 외치는 수준에서는 그렇습니다. 낡은 이야기가 여전히 강력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은 이 세계가 그만큼, 여전히 낡아 있다는 뜻이겠지요. 우리는 앞으로 갑시다. 발목을 잡는 뒤쳐진 세계의 망령을 떨치고, 낡은 세계를 뒤로 무르고. 페미니즘의 진짜 힘은 바로 이 가능성에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즐겁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7. 2. / 무중력지대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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