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1: 니콜라이 레스코프

May 9, 2018

  

<이야기꾼>은 벤야민의 서사 이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텍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관한 고찰’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러시아의 작가 레스코프와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글이고요. 벤야민은 파리에 머무르던 1936년, 한 잡지의 특집 기획으로 원고를 청탁 받아 이 텍스트를 작성합니다. 이에 앞서 벤야민은 1928년 10월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운 ‘소설의 이론'을 쓰고 있다”고 밝히고, 루카치와 나란한 위치에 오를 것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루카치의 저작인 <소설의 이론>은 1916년 첫 발표 이후 유럽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지요. 벤야민은 1920년대 중반부터 서사와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책으로 출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루카치의 저작이 이를 자극했을 것으로 보이고요. 벤야민은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활동한 유물론자인 루카치의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1933년 5월의 한 편지에서도 “루카치의 것과 닮지 않은 소설론"을 최근 자신이 작성한 서평에서 개진했다고 밝히기도 하니까요. 벤야민은 루카치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서사 이론을 펼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의 망명 시절 벤야민은 저작의 출판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만, 원고 청탁을 계기로 서사에 관한 그간의 생각을 정리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 텍스트는 레스코프와 그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 만큼이나 서사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을 포함하고 있는데, 벤야민은 무엇보다 ‘이야기'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루카치에게 소설이 근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 형식이라면, 벤야민은 이야기라는 개념을 통해 서사라는 문제에 접근합니다. 흔히 소설은 등장인물이나 사건, 줄거리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 이야기의 특정한 형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벤야민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소설과 이야기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야기와 소설은 공통적으로 서사 장르에 속하지만, 근대로의 진입 과정에서 발생한 소설의 흥기는 이야기의 쇠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요. 1936년 4월에 지인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벤야민은 “러시아 문학사에 대한 고찰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 전혀 없다"고 밝히면서, “레스코프에 대한 원고를 작성하며 소설가와 이야기꾼의 대립에 관해 펼쳐볼 생각"이라고, 그리고 “(소설가보다) 이야기꾼을 더 선호하는 자신의 관점을 펼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의 핵심은 경험을 나눌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벌써 소설과의 분기점이 확연히 드러나지요? 영국의 문학사가 이언 와트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성장이 특정한 독자 계층의 성장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간파한 바 있습니다. 바로 개인주의, 근대가 만든 ‘개인’들의 집단이지요. <소설의 발생>에서 이언 와트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초기 특성과 그것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을 분석한 뒤, 항상 사회적이고 개인적일 수는 없는 ‘전통’이라는 힘으로부터 단절된 ‘개인’이라는 특수한 계층이 등장한 것과 소설의 발생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시합니다. 이에 따르면 소설의 등장인물과 소설에서 그가 겪는 상황은 기존의 서사시, 로만스 등과 달리 지극히 내재화된 윤리 규범의 문제를 다루고,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들을 제시합니다. 예컨대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성취와 고난을 판가름 하는 척도와, 소설의 주인공이 일상의 문제와 대면한 상황을 판단하는 척도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소설은 개인이 일상의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을 문학의 심오하고 지속적인 주제로 제시했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가장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였습니다. 자연히 소설의 관심사, 또 소설을 읽는 독자의 관심사 또한 개인이라는 주제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요.​

 

벤야민은 이러한 특징을 개인주의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나 근대적 주체의 탄생 따위의 낭만적인 태도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서사의 문제를 다루는 벤야민의 관점은 (앞선 편지들에서 수차례 밝힌 것처럼) 단순히 특정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장르 분석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학적인 탐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설의 ‘개인’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다면 이 개인은 어떻게 등장했을까요? 개인이 일종의 근대적 발명품, 또는 허상이라고 진단하는 방식의 쉬운 가치 판단은 이 물음에서 썩 유용한 해법이 아닙니다. 차라리 ‘개인'이라는 관념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물음으로써 (오늘날 사회를 이루고 있는 기본단위로 확고하게 여겨지는) 그것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거나, 혹은 개인이라는 관념이 가진 특징으로부터 그것의 기원과 변천을 읽어내는 것이 낫겠지요. 벤야민의 접근 방식도 이와 유사합니다.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이야기를 가진 동물인 인간의 어떤 특징을 읽어내고, 이야기의 변화를 통해 이야기를 둘러싼 인간의 특징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진단하고자 시도하니까요.​

 

벤야민이 제시하는 서사 이론의 핵심은 ‘이야기하는 기술의 종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에서 이야기의 문제를 구성하고자 시도하는 것이지요. 앞서 언급한 소설의 성장과 개인의 탄생 사이의 관계에 비춰본다면 그리 어려운 생각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인간 사회를 일종의 인간 집단이라고 했을 때, 여기에서 ‘집단’이라는 속성을 걷어내면 당연히 개별 인간, 즉 개인이 남겠지요? 인간들의 관계가 사라지면 자연히 이야기의 성격도 달라질 겁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나누는 이야기와, 한 개인이 자신만의 공간에서 읽어나가는 이야기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야기의 종말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은 <이야기꾼>의 작성 시기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8년 경 작성한 한 에세이에서 벤야민은, 매일 아침 지구상에서 벌어진 새로운 일들, 즉 뉴스를 전해 듣지만 정작 새로운 일이 아닌 진기한 이야기 자체는 사라지고 있다는 견해를 개진한 바 있으니까요. 벤야민에 따르면 설명이 첨부되지 않은 사건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달리 말해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거의 이야기 자체가 되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정보로서 소비될 뿐인 것이지요. (정보의 본질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정보는 어떤 인간이 취사 선택하는 지식의 종류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특정한 사고와 행동을 유도하는 일종의 지시와 명령 체계입니다.)

 

​<이야기꾼>에서 나타나는 벤야민의 생각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텍스트의 첫 머리에서 이야기의 종언을 언급하며 벤야민은 세계와 접촉하는 인간의 경험 그 자체가 처한 위기에 주목합니다. (벤야민은 이 문제를 이미 <일방통행로>의 한 단편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이전까지의 역사에서와 달리) 허풍이나 과장 섞인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말없이 돌아오는 모습을 지적하면서요. 벤야민은 세계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경험이 근본적으로 인간이 소화할 수 있는 강도를 초과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야기의 소멸이라는 전례없는 사태에 대한 탐구에 착수합니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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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사적인 것이 차지하는 영역이 인간의 삶에서 확장되는 것을 이야기가 처한, 그리고 이야기의 능력을 상실해가는 인간이 처한 중대한 위기로 진단합니다. 요즘이야 사생활에 관련해 워낙 민감한 문제들도 많이 생기고 또 자유주의의 전통에서 ‘개인의 것’이 갖는 의미나, 한국처럼 개인의 사적 영역이 권위주의적 공동체 문화에 의해 쉽게 침범당하는 경우에서라면 사적인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고 존중되어야 하는 어떤 것 같지만, ‘사적인 것(private)’의 본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벤야민의 우려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적인 것의 본래 의미는 개인만의 고유한 것이 아닌 박탈당한 것, 빼앗긴 상태의 어떤 것을 의미하니까요. 오늘날 사적인 것의 어원인 라틴어 ‘privare’는 무언가를 빼앗는 것, 기회나 권리를 박탈하는 것, 무리나 집단으로부터 (특히 죽음처럼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그 자신 혼자만 외떨어져 있는 상태, 혹은 다른 누구와도, 어떤 사람과도 공유될 수 없이 철저하게 고립된 것을 가리키는 개념인 것이지요. ​

 

정치적 동물이니 사회적 동물이니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벤야민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렌트 역시 이러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오직 사람들이 공동으로 살아간다는 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니까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고,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대체하는 사태, 사적인 것의 영역이 확장되는 현대의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를 경유합니다. ​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적 영역으로서의 가정(oikia)과 공적 영역으로서의 폴리스(polis)의 구분이 선명했습니다. 가정은 필요와 욕구가 지배하는 영역, 폴리스는 자유의 영역이었지요. (물론 인간의 삶에 필요한 요소들을 가정에서 충족하는 것은 폴리스에서의 자유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또 가정이 가장과 여성, 노예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철저한 불평등의 장소였다면, 폴리스는 지배나 예속과는 무관한 평등의 장소였습니다. 폴리스에서의 자유는 (가정에서와 같은) 지배관계에 내재하는 불평등에서 벗어나 지배와 피지배 둘 다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

 

시간이 흐르고 가정에서의 활동이나 가정이 지녔던 특징이 공론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사회’가 탄생합니다. 이로 인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게 되었고, 두 용어의 의미와 이것이 인간의 삶에 대해 가졌던 의미 또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지요. 오늘날 우리는 흔히 사적인 것을 친밀성의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관점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출현과 함께 등장한 사적 생활의 박탈적 특징을 감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적(private) 생활은 문자 그대로 어떤 것이 박탈당한 상태를 의미하니까요.

 

​아렌트는 사회라는 영역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근대 이후, 인간의 노동은 점점 더 완벽해지는 반면 (인간이 서로와 관계 맺는) 행위 능력과 언어 능력은 이전과 비교했을 때 상당 부분 퇴보했다고 진단합니다. 공적 영역을 이루고 있던 이러한 능력이 사적 영역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이지요. 벤야민이 이야기의 능력을 상실해가는 인간을 진단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만 아렌트는 사회의 변화에 주목한다면, 벤야민은 세계 자체과 경험 자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지요.

 

​사회의 변화 때문이든, 아니면 세계와 경험 조건의 근본적인 변화 때문이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은 다른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한 채, 자신의 경험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벤야민이 레스코프에 주목하면서 (이야기의) 동화적 특성이나 사람을 한 데 모으고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결합시키는 이야기의 특징, 기억(Erinnerung)과 서사적 기억(Gedachtnis), 회상(Eingedenken)을 구분하면서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특징을 구분하는 이유도 일정 부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다시 아렌트를 경유하며 오늘 밤 이야기를 마칠 수 있겠군요. 오늘날의 상황에서 타인과의 객관적인 관계와, 이러한 관계가 보장하는 현실성의 박탈은 고독이라는 대중적인 현상을 낳습니다. 특히 이야기를 매개로 한 관계의 축소는 상당히 특기할 만한 현상입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의 변화는 가장 극단적이고 반인간적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적 영역에서의 고독이 종래에는 사적 영역 자체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사적 영역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가 가진 것은 사생활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5. 8.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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