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란 무엇인가: <괴테의 친화력>

May 1, 2018

<친화력>은 19세기 초반 괴테가 발표한 소설입니다. <괴테의 친화력>은 이 <친화력>이라는 소설을 다루는 벤야민의 비평이고요. 벤야민은 1922년부터 괴테의 소설에 대한 비평을 집필하기 시작해 1924년에 발표했습니다. 이 텍스트는 앞서 함께 살펴봤던 (벤야민의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인 <독일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과 더불어 초기 벤야민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벤야민 스스로는 이 텍스트를 비평의 전범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그만큼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을 말 그대로 전범적으로 담고 있는 저작이라고 볼 수 있지요.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벤야민은 바로크 비애극이라는 장르와 그 작품들을 다루는 기존의 관점들에 대해 폭넓은 비판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애극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하면서요. <괴테의 친화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괴테는 생전에 이미 대문호로서의 명성과 지위가 확고했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문학사에서, 특히 독일 문학사에서 괴테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겁니다. 글쎄요, 물론 개인이 취향이나 장르에 따라 조금씩 평가에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문학사를 통틀어 괴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요? 벤야민의 시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이미 괴테를 다루는 비평이야 차고 넘치는 사정이었으니까요. 근대적 지성인, 흠결없는 교양인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을 괴테 자신의 인격과 명예에 함께, 괴테의 작품에 대한 칭송 또한 끊이지 않았습니다.

  

벤야민은 자신 역시 괴테에 대한 이러한 평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괴테는 훌륭한 문호이자, 그의 작품에 담긴 의미와 그것이 미친 영향은 어떤 방식으로도 축소할 수 없을 만큼 중차대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벤야민은 괴테를 다루는 기존의 비평들이 피상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의 이유에서 괴테와 그의 작품을 칭송하고 있지만) 정작 작품의 본질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친화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비평이 그것을 어떻게 읽고 제시하는지 보여줌으로써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비평의 진정한 의미를 정초하고자 시도하지요.  

 

<괴테의 친화력>은 벤야민의 초기 작업입니다만 그 이후에 이루어질 작업들과도 공명하고 있습니다. (별자리에 대한 벤야민의 은유를 다시금 곱씹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언어에 관련한 문제에서 그렇지요.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것처럼 벤야민의 언어이론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고유한 맥락과 그 함의에 대한 탐구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언어가 (경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의미 손실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대상의 진리에 관련한 무엇이라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제한적인 상황 때문이든, 혹은 역사적인 제약이나 특수한 조건 때문이든) 언어가 그 자신 속에서 전달하는 어떤 대상의 진리를 보다 온전하게 읽어내는 것이 바로 번역이라고 규정하면서 언어와 번역의 관계, 즉 서로 다른 언어들 간의 관계를 정초하고요. (물론 여기에서 ‘서로 다른 언어’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외국어들 사이의 수평적 차이가 아니라는 것 또한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이 언어에서 진리를 꺼내는 일이라고 한다면, 실은 그것은 무엇보다 비평에 가까운 작업이 됩니다. 비평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평에 가까운 일이지요. 하나의 언어 속에서 제한적으로, 자신이 아닌 비본래적인 요소들을 덧붙인 채 표현되어 있는 어떤 것을 선명하게 밝히는 일, 바로 벤야민이 생각하는 비평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분리가 아닙니다. 분리와는 전혀 상관 없어요. 자신의 본질과는 무관한, 여러 ‘불순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작품 속에서 본질만을 분리해서 꺼내는 것이 비평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벤야민이 가장 강력하게 항변할 오해일 겁니다. 벤야민 자신이 강조하는 것처럼 작품 속에서 아름다움은 일종의 가상으로서 나타나는 효과이지만, 이 가상은 작품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습니다. 본질이 아니지만 본질에서 분리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리고 일종의 껍질과도 같은 그러한 효과로부터 작품의 본질은 작품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그러한 가상이 없다면 작품 또한 사라지고 맙니다. 당연히 어떤 본질도 자취를 감추고요. 이렇게 본다면 작품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가상과 작품의 본질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함께 제시하는 것, 즉 특정 작품의 본질적 의미가 어떠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이라는 껍질을 만들어내며, 이 껍질은 어떻게 그 작품의 본질을 담고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바로 비평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친화력>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봅시다. 괴테가 처음 사용했을 당시에는 다소 생경했을 표현인 ‘친화력’은, (의외로) 오늘의 현대인들이 가까이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거리낌 없이 서로 잘 어울리는 두 사람, 혹은 잘 융합된 구성원들로 원활하게 과업을 수행하는 조직을 두고 흔히 ‘케미(스트리)’가 좋다고 표현하곤 하지요? ‘팀 케미스트리'라는 표현도 많이 쓰고요. 많은 사람들이 화학, 혹은 화학반응을 가리키는 이 표현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용해서 사용하곤 합니다. 아마 사람 사이에 이 개념을 적용한 것은 괴테가 처음이었을 것 같군요. 화학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친화력(affinity), 혹은 선택 친화성(elective affinity)이라는 개념은 본래 특정한 물질끼리 강하게 결합하려는 성질을 의미합니다. 적극적으로 결합하려는 성향이 있는지, 아니면 분리하려는 성향이 있는지에 따라 양과 음을 구분하기도 하고요. 나중에 막스 베버도 사회학의 특정한 제도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괴테는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 개념을 도입해서 퍽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보여줍니다.

 

괴테는 물질들의 결합과 분리에 관련한 이 속성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네 인물들의 사랑 관계로 옮겨놓습니다. 부유한 남작 에두아르트와 그의 부인 샬로테,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 샬로테의 질녀인 오틸리에, 네 사람이지요. 에두아르트와 샬로테는 한때 서로에게 끌리는 사이었지만, 각자의 사정 때문에 서로 다른 배우자와 혼인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혼이라면 마냥 행복하기는 어렵겠지요? 결국 이들은 배우자와 사별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결혼에 성공합니다. 이제 이들은 에두아르트의 시골 장원에서 살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에두아르트가 친구를 자신에 집에 들이기 전까지는요. 어느 날 에두아르트는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친구를 집에 들일 생각을 합니다. 에두아르트의 부인 샬로테는 그렇다면 자기 질녀인 오틸리에 역시 집에 들인다는 조건으로 남편의 생각에 동의하지요.

 

새로 두 사람이 장원에 도착하자, 샬로테와 에두아르트는 각각 대위와 오틸리에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치 단단한 결속을 이루고 있던 두 물질 사이에 어느 한 쪽과 더 친화력이 강한 물질이 나타났을 때 기존의 결합이 해체되고 새로운 결합이 일어나는 것처럼요. 괴테는 스웨덴의 화학자 토르베른 베리만의 연구를 통해 친화력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르만의 이 실험은 서로 ‘친화적인’ 두 물질의 결합체 AB에다가, A에 더 친화력이 강한 제3의 물질 C를 첨가하면 A는 B에서 분리되어 C와 '친화적'으로 결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소설에서 일어나는 상황도 이와 같습니다. 에두아르트와 샬로테는 서로 친화력을 지닌 관계인 것처럼 보였으나,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와 샬로테의 질녀 오틸리에가 둘 사이에 나타나자 이들의 관계는 급전하니까요. 에두아르트와 샬로테는 갈등에 빠집니다. 이들 부부는 한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지만,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떠올리고 샬로테는 대위의 품에 안긴 것으로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관습과 도덕을 좇아 결혼 생활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 찾아온 사랑을 좇을 것인가.

 

… (중략) ...  

벤야민은 <친화력>을 분석하면서 비평에 있어 그야말로 새로운 전범이라고 할 만한 탁월한 관점을 제시하는데, 바로 사실내용(Sachgehalt)과 진리내용(Wahrheitsgehalt)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즉 작품에서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의 관계와, 그 이면에서 그 사실들의 관계가 드러내는 작품의 본질로서의 진리를 구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은 작품이 아닌 세계 일반의 진리를 탐구할 때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습니다. 즉 경험적 사태 일반이 세계의 전부인가, 아니면 그러한 사태 일반이 드러내는, 경험적 사실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그것들의 본질적 차원이 있는가의 구분입니다. 철학사에서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경험적 사태와 본질, 의미, 혹은 진리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벤야민을 따라 우선 비평의 영역에서 이 문제를 다뤄봅시다. 작품에서 사실내용과 진리내용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내용의 고유한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작품의 모든 의미나 그것의 본질, 어떤 작품의 내용에 관한 진위 또한 작품이 말하는 사실들의 관계 속에서 결정될 겁니다.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작품의 구체적인 진술 속에서 확인할 수 있고, 여기에 따라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판가름할 수 있겠지요. 반면 벤야민이 제시하듯이 사실내용과 별개의 진리내용의 차원이 존재한다면, 작품의 의미나 가치는 단순히 작품 속에 나타나는 사실 관계들만으로 판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가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건 단순히 소설 속에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안 하고, 감춰진 특정 정보가 노출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차원입니다.

 

예컨대 A가 B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어느 소설 속 장면이라고 해두지요. 이제까지 읽은 서술에 따르면 독자는 A가 B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장면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정확히 어떤 이야기인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자, 이러한 상황이 이 소설에서 일종의 사실내용을 이룬다면, 진리내용은 사실내용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독자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혹은 책을 더 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겠고요. 아마 친절한 독자라면 이 두 선택을 병행하겠지요? 작품의 구체적 진술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확정할 수 있다는 관점은, 소설 속 곳곳의 다른 실마리들이나 뒤에서 밝혀질 이야기를 통해 A가 하는 이야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렵다면 소설 바깥에서, 이를 테면 소설가의 개인사나 소설이 쓰인 사회적 배경 등을 참고해서 그 이야기를 짐작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A가 하는 이야기는 사실 이것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식의 판단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생각일 수 있지만 어쩌면 벤야민이 생각하는 비평과는 가장 거리가 먼 접근일 수도 있습니다. 벤야민은 작품의 본질은 추론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데, 달리 말하면 추론이 필요한 작품이라면 불완전한 작품이거나 혹은 독자가 본질에 이르는 길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벤야민은 진리내용이 더 중요한 것일수록, 더 많은 의미를 포함할수록 사실내용으로부터 더 눈에 띄지 않게, 또 더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드러내야 할 본질이 있다는 생각, 즉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본질과 진리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비평에 있어서 이 물음은 사실내용과 진리내용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혹은 사실내용으로부터 진리내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사실내용을 추수하는 주해와 진리내용을 포착하는 비평을 구분하면서, 이 질문 앞으로 주해자와 비평가를 불러 세우지요. 널리 알려진 은유인데, 벤야민은 하나의 작품을 불타는 장작더미에 비유합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주해자는 이 장작더미 앞에 화학자처럼 서 있고, 비평가는 연금술사처럼 서 있습니다. 주해자는 타고 있는 나무와 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반면 비평가는 타오르는 불꽃에 관심을 갖는다고 벤야민은 말합니다. 나무 장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나무 장작 그 자체는 아닌 어떤 것이 불꽃인 것처럼, 작품 역시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로부터 만들어지지만 그 요소들 자체라고는 볼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하나의 작품은 무언가를 드러내는 동시에 어떤 것을 감추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불꽃을 직접 움켜쥘 수 없는 것처럼 작품 또한 자신을 곧장 움켜쥐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니까요. 움켜쥘 수 없을 뿐더러, 움켜쥐면 이내 사라지겠지요, 불꽃은 나무 장작 속에서, 나무 장작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벤야민의 예술 작품의 이러한 성격을 일종의 가상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작품의 구체적 내용을 이루는 요소들이 사실내용에 해당한다면, 그것들의 예술성은 일종의 가상과 같은 아름다움에 해당하고, 작품 속에서 사실내용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진리내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가상은 거짓이나 기만과는 무관합니다. 벤야민은 사실내용과 아름다움의 관계야말로 예술작품의 본질이라고 보고 있으니까요. 아름다움은 작품의 진리를 감싸고 있는 껍질과 같다고 벤야민은 주장합니다. 비평은 이 껍질을 드러내는 것인데, 껍질로부터 작품의 진리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껍질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아름다움과 대상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그리고 진정한 인식으로 상승하는 것을 과제로 갖습니다.

 

벤야민이 제시하는 이러한 껍질과 진리의 관계는 흥미로운 시사점을 남깁니다. 작품이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것은 사실 감추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감추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작품이 감추고 있는 것과 작품이 드러내는 것이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평은 이 감춤과 드러냄의 관계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작품이 감추고 있는 어떤 것을 단순하게 꺼내는 일이 아니라요. 작품은 이미 그 자신이 드러내면서 감추고, 그렇게 해서 드러내는 이 과정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것은 다른 것을 감추는 것이고, 이때 드러낼 것과 드러내지 않을 것을 이미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즉 어떤 것을 감추고 어떤 것을 드러내는지가 여기에서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아주 특정한 방식을 통해 다른 것을 감추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역시 알쏭달쏭 하지요? 이렇게 감춤과 드러냄 사이에서 의미의 온전한 보존을 벤야민은 구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유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시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5. 1.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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