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란 무엇인가: '번역자의 과제'

April 24, 2018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은 언어를 단순한 기호나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닌, 어떤 것의 정신적 본질에 해당하는 무엇으로 규정합니다. 벤야민에게 언어는 그 속에서 어떤 것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매체이며, 따라서 그 본질에 대한 참된 인식과 분리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벤야민은 존재하는 것, 그것의 언어, 그것에 대한 인식을 분리하지 않고 생각합니다.

자,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벤야민이 규정하는) 언어 일반의 성격입니다. 즉 벤야민 역시 현실 언어의 실제 사용이 이와 같은 양상을 이룬다고 보고 있지는 않은 것이지요. 벤야민은 창세기의 창조 신화에서 나타나는 야훼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창세기가 그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인간의 원죄와 함께 언어의 타락을 읽어냅니다. 벤야민에게 인간의 원죄는 무엇보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발화될 때 언어의 신적 성격이 본래적으로 상실된다는 사태를 의미합니다. ‘이름언어’로서의 언어 일반의 갖는 말의 힘은 인간의 원죄로 인해 훼손되었고, 때문에 어떤 대상의 정신적 본질이 그것의 이름 속에서 고스란히, 온전하게 드러나는 언어와 사물의 평화로운 공동체 또한 훼손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인간의 발화 속에서 어떤 것의 이름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자기 자신 이외의 무엇인가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 속에 처하고 맙니다. 이러한 원죄, 즉 언어의 타락에 따라 인간의 언어는 어떤 것의 본질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과 간접적인 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언어 일반에서 세계는 본래 언어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었으나, 이제 세계는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이때의 언어에는 항상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덧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언어의 이러한 변질로 인해 자연은 언어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으며, 이러한 사태는 곧 자연과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슬픔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벤야민은 파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어떤 것을 향한) 이름의 부여는 늘 슬픔의 예감을 남긴다고 덧붙이지요.

그래서 벤야민에게 번역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 예컨대 한국어를 영어로, 프랑스어를 일본어로, 히브리어를 에스토니아어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벤야민은 언어가 처한 한계 상황 속에서, 원문에 담긴 의미를 보다 더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을 진정한 번역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번역자의 과제로 제시합니다. 이에 따르면 번역은 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며, 이름 없는 것을 이름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번역은 옮기고자 하는 대상들 사이에 어떤 추상적인 동일성이나 유사성을 설정하는 일이 아니라 한 언어를 변형의 연속체를 통해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연속체들을 횡단하는 작업입니다. 앞서 <파사주>를 통해 도시의 조각난 파편을 엮어서 (그것의 본질을 담고 있는) 시대의 온전한 이미지를 구성하려는 벤야민의 기획을 살펴본 바 있지요? 번역에 대한 벤야민의 기본적인 생각도 이와 유사합니다. 원작이라는 온전한 이미지를, 그것과 같은 수 없는 이질적인 언어를 통해서 어떻게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하니까요. 그래서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의 번역을 예로 들며 번역자 또한 시를 지어 원작에 담긴, 원작이 표현하는 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냐고 묻기도 하지요.

번역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 즉 번역이 또 하나의 창작일 수 있다는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 낯선 생각은 아닙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창작이 원작과 전혀 엉뚱한 별개의 창작이라면 그건 이미 번역이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생기겠지만요.) 벤야민에 따르면 이러한 원작과 번역의 관계는 단순히 번역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벤야민에게 번역이라는 모종의 활동이 하나의 독자적인 고유성과 중요성을 지닌 활동으로 성립하는 근거는 언어들 사이의 원초적인 근친성(Verwandtschaft)에 있습니다. 언어 일반에서 벤야민이 개진했던 생각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번역은 하나의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작품을 이루는 최초의 언어 또한 그 언어가 드러내는 사물이나 사태와의 관계에 비춰 본다면 이미 불완전한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대상의 정신적 본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언어 일반의 성격은 이미 훼손되었으니까요.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제한적인 의미 전달의 가능성이 아닙니다. 흔히 출발어와 도착어로 표현하는 최초의 언어와 번역의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 일반 차원의 원초적 근친성에서 번역의 가능성은 성립합니다. 성공한 번역은 원작에 담긴 의미가 아니라 원작이 지향하는 순수언어(die reine Sprache)를 자신의 언어로 포착하고 제시합니다. 엄밀히 말해 이것에 실패한다면 번역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벤야민에게 ‘성공한 번역’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번역은 결국 순수언어로서 원작의 언어에 담긴 것을 읽어내느냐, 새로운 언어로 그것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벤야민은 어떤 작품의 번역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작품의 역사를 통틀어 언젠가는 독자들 가운데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가, 라는 의미와, 둘째로 작품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번역을 허용하는가, 라는 의미의 차원이지요. 피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두 물음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에서 성립한 낱말이 있다면 그러한 배경을 공유하지 않는 다른 사람이 그 낱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또 그렇다면 그러한 낱말은 맥락에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번역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을 수 있겠지요. 물론 벤야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삶은 저마다의 상이한 맥락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러한 맥락에 선행하는 순수언어의 차원에서 언어의 근친성이 성립하기 때문이지요.

루돌프 판비츠를 인용하며 벤야민은 번역이 기대고 있는 오류를 비판합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과 조건으로 인한 번역의 한계를 주장하는 이들을 겨냥하는 비판이지요. 벤야민은 실제로 가장 좋은, 그러니까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서 의미 전달을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낸 번역이라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원칙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바로 이들 번역이 다른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바꾸려는 시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자의 기본적 오류는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를 통해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하는 대신 자신의 언어가 처해 있는 우연적 상태를 고수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번역자가 자신의 언어와는 멀리 떨어진 언어에서 번역할 때에는, 언어 그 자체의 궁극적 요소들, 즉 말과 형상과 어조가 하나로 합쳐지는 점에까지 소급해야만 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외국어가 가진 그만의 고유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확대하고 심화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번역자는 단순히 원작에 담긴 특정한 의미만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원래 드러내고자 했던 바를, 심지어 원작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어떤 지점에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원작을 원작 이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번역자의 과제입니다. 번역은 불완전한 이름을 더 완전한 이름으로 옮기는 일이고, 이름에 인식을 덧붙이는 일이라고 벤야민은 말합니다. 이러한 번역은 의미의 완전한 구원이라는 하나의 상징적인 지점으로서의 ‘신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일이기도 하고요.

 

벤야민은 원작과 번역의 관계를 사기 그릇과 파편들의 이미지에 비유합니다. 어떤 사기 그릇의 파편들이 하나의 그릇을 다시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미세한 부분들까지 어긋남 없이 하나하나 이어져야 하지만, 꼭 파편들끼리 서로 닮아야 하거나, 파편들의 결합이 유일한 한 가지 방법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라면 당연히 파편의 모양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번역은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을 세심하게 따라가며 동일한 사기 그릇에 도달해야 하니까요.

... (중략) ...

 

 

벤야민은 원작이 품고 있는,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대상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완하는 것을 번역자의 과제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번역의 가능성은 순수언어에 기반한 언어들 사이의 근원적인 근친성으로 인해 성립하고요. 그런데 번역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한다면 이때의 번역은 무엇보다 비평에 가까운 활동이 됩니다. 어떤 작품에 담긴 의미를 그것과 다른 언어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보다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비평이 하는 일, 비평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번역의 문제를 다루며 벤야민은 원작에서 ‘의도된 것’으로서의 언어 표현을 단순히 그것에 일치하는 번역어로 대체하는 것을 비판하는데,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이 그대로 옮겨야 할 것은 원작의 개별 표현이 아닌 원작이 제한적으로나마 담고 있는 순수언어입니다. 원작이 자신의 한계 속에서 제한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순수한 이념을 드러내는 것, 바로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벤야민의 번역론은 번역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 또한 품고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같은 한국어, 같은 일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낱말이나 개념, 언어 표현은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의 특정한 규범은 물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특수한 맥락에서도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단순한 의사 표현의 세계에서라면 이러한 ‘특수한 맥락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보다 깊은 수준에서 서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이러한 개인의 특수한 맥락들에 가로막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가로막힐까요? 각자가 특수한 자신의 맥락에서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기 때문에? 글쎄요, 분명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벤야민을 통해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서로의 언어를 서로의 언어인 채로, 서로의 언어로서 듣고 있을까요? 앞서 수많은 번역이 빠져 있는 근본적인 오류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을 살펴보았지요. 다른 언어를 그 언어의 고유한 맥락이 아닌 (따져보면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규칙들로 이루어진) 번역자 자신의 언어로 환원하려 드는 번역자의 태도를 비판하며, 벤야민은 오히려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외국어의 강력한 영향 아래 노출시켜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언어가 가진 우연적 상태를 극복하고 자신의 언어를 확대하고 심화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번역이 반드시 서로 다른 언어의 동일성에 기반한 수평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언어를 섬세하게 이어붙여 온전한 ‘사기 그릇’으로 다시 만드는 것, 즉 타자의 언어를 그의 맥락에서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 또한 하나의 번역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많은 경우 인간은 다른 인간의 언어와 접촉할 때 그것을 자신의 맥락으로, 자신의 경험 속으로 끝없이 환원하는 것을 이해로 착각합니다. 이 착각 속에서 경험의 확장, 즉 벤야민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신의 우연적 상태를 극복하고 이해의 역량을 확대하고 심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충실한 번역자라면 자신의 관점에서 원작을 재단하고 난도질한 뒤 자의적으로 이어붙인 것을 번역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이 원작에서 보지 못한 것이 있는지, 채우지 못한 파편이 있는지 고심하며 원작의 가능성과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겠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벤야민의 번역론은 다른 사람의 말, 자신의 말과 다른 말을 대하는 인간의 윤리적 태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번역자의 과제는 비평과 만난다고 했었지요? 그렇다면 돌아오는 밤에는 벤야민이 생각하는 비평에 대해 다룰 차례입니다. 비평의 과제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2018. 4. 24.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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