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들: <일방통행로>, <파사젠베르크>

March 27, 2018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벤야민이 (그 모든 혹평에도 불구하고) 비애극에 주목한 까닭은, 무엇보다 비애극이 예술의지(Kunstwollen)의 줄기찬 실험이라는 그 시대의 이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의 이러한 시각은 철학적 발견과 탐구의 대상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시대에 속하는 무엇, 그 시대의 고유한 무엇이라는 관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벤야민 자신의 이러한 관점 역시 다분히 그가 속한 시대에, 그가 살았고 경험했던 시대의 특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요. 전통적 의미에서의 실재론자,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자들이 오랫동안 영원불변의 확고한 실체를 발견, 탐구하고자 했다면, 헤겔이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일격을 가한 이후부터는 시대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상합니다. 역사와 시대가 곧 발견과 탐구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지요. 헤겔 이후 헤겔에게 가해진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그 모진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역사는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즉 역사는 보편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정도로 간단히 넘길 수 있는 주제가 결코 아닙니다. 벤야민이 활동한 시대는 헤겔이 남긴 충격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대였고요. 헤겔을 비스듬히 계승한 마르크스의 전망이 빗나간 (것처럼 보이는) 당대의 정세 가운데 오히려 더 신중하게, 더 열성적으로 자신의 시대와 역사를 탐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의 짝꿍으로 유명한 엥겔스는 1882년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달>이라는 저서에서 ‘사회적 힘은 일단 그것의 본성이 파악되면 협동한 생산자들 수중에서 악마적인 지배자의 태도를 버리고 순종적인 하인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벤야민 역시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벤야민이 남긴 텍스트 곳곳에서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흔적을 엿볼 수 있고, 특히 방금 인용한 엥겔스의 문구는 벤야민의 노트에서 발견된 문구이기도 하니까요. 시대에 대한 탐구가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탐구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선일지도 모릅니다) ‘구원’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벤야민의 경우라면 역시 위와 같은 맥락을 경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온갖 폐해가 극성을 부리며 사람들을 유혹하던 시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 하루하루 성장하는 파시즘이 온 유럽을 집어삼키려던 바로 그 시대에, 벤야민은 누구보다 절박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의 시대를 이해하고자 매진했습니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실마리인 것처럼.

 

<일방통행로>는 벤야민이 생전에 직접 출간한 저작 가운데 맨 처음으로 ‘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저술입니다. 1927년 중반부터 1929년 가을까지 벤야민은 ‘파리의 파사주: 변증법의 몽환극(요정극)'라는 에세이를 집필할 계획을 세우는데, 절친한 지기였던 숄렘에게 보낸 1928년 1월 30일 자 편지에서 벤야민은 이와 같은 계획을 최초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이 편지에서 자신의 계획이 <일방통행로>의 연장선 상에 있노라는 생각을 함께 밝히는데, 그렇다면 <일방통행로>에서 <파사주>로의 이행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미완의 작업이자 벤야민이 자신의 ‘필생의 작업(chef-œuvre)’으로 간주한 <파사주>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후 벤야민이 차례로 작업에 착수하는 보들레르나 19세기 파리에 대한 단편들, 1900년 경 베를린의 기억을 다루는 단편들을 이해하는 것에도 적절한 참고가 될 수 있을 테고요.

 

벤야민의 시선을 쫓아 본격적으로 그가 걷는 거리를 살피기 전에, 먼저 그의 걸음걸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발터 벤야민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경우 가장 먼저 그의 이름과 함께 ‘도시 산책자’라는 개념을 떠올릴 겁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의 고유한 비극론을 전개하면서,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만들고 감상하고 즐기고 또 분석해왔지만 아무도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까닭으로 자신이야말로 비극의 진정한 발명자라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벤야민은 가히 산책의 발명자라고 부를 만합니다. 철학자의 산책이라고 하면 역시 칸트나 루소 같은 이름들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산책만큼은 벤야민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지요.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벤야민은 새로운 인식의 방법을 제시하며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을 큰 심호흡으로, 천천히 우회하고 오래 머물면서, 깊게 관찰하고 더 집요하게 추적할 것을 제안하는데, 산책이 바로 이 걸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급하게 대상을 움켜쥐려 하지 않고, 눈에 얼른 띄는 부분만 휙 보고 지나치며 눈대중으로 짐작하고 넘어가지 않고, 그게 뭐냐고 냉큼 달려가서 묻고 한 마디 대답과 함께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며 오래 관찰하는 것. 어떤 것이든 그래야만 비로소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루소의 산책이 고독 속으로, 칸트의 산책이 사유 속으로 침잠하는 산책이었다면 벤야민을 통해 산책은 비로소 길과 풍경을 만납니다. (자연경관에 대한 단순한 감탄은 물론 아닙니다.) 루소의 발걸음이 인적이 드문 숲길을 향하고 칸트가 늘 같은 자리를 맴돌 때 벤야민의 걸음은 거리를 따라, 시대 속으로 어우러지는 것이지요. 정한 시간도 경로도 목적도 없이,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 바로 벤야민이 거리 산책자, 만보객의 모습으로 제시하는 산책자의 모습입니다.

 

자, 산책자는 이제 ‘일방통행로’에 들어섭니다. 벤야민은 ‘파사주’에 관련한 저술을 구상하기 시작한 이듬해인 1928년 <일방통행로>를 출간합니다. <일방통행로>는 1924년 이후 벤야민이 몇몇 일간지의 문예란에 발표했던 60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벤야민은 호프만스탈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일방통행로>를 소개하며 자신의 책이 이질적인 것, 양극적인 것을 서술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이 길에서 벤야민이 발견한 것은 우선 이질적인 것, 양극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왜 이질적인 것, 양극적인 것일까요? 지난 시간에 이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그것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 그리고 ‘온전히 이해하는 것'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해봅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왜 멈춰야 하는가, 왜 우회해야 하는가, 왜 깊게 관찰하고 집요하게 추적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질문과 해답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들어간다면 ‘우회할 것’이라는 해답으로 이어지고, 거꾸로 ‘왜 우회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해답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알아야 할 것이 드러나 있지 않다, 감춰져 있다는 생각은 서양 철학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생각이자, 또 유서 깊은 전통을 이루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벤야민 역시 일정 부분 이러한 시각을 공유합니다. 헤겔과 마르크스를 경유하며 철학은 역사를, 시대를 탐구의 대상으로 포착했지만 아직 정확하게 시대의 실상을 포획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헤겔은 눈에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 현상들 가운데에서 보이지 않는 정신의 운동을 밝히고자 했고 마르크스는 정신의 운동이 아닌 그것을 산출하는 생산관계와 물질의 운동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현실을 이루는,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질적인 것들, 혹은 양극단을 이루는 상반된 것들은 이들에게 공히 탐구해야 할, 알아야 할 진정한 대상이 아닙니다. 현실은 어디까지나 정신이든 물질이든 생산관계든 진짜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알아야 하는 것의 파생물이나 효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변증법적 유물론자로서 벤야민 또한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한다는 관점 자체는 동일하지만, 접근 방식에 있어서는 자신의 선배들과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합니다. <일방통행로> ‘주유소’라는 이름의 단편으로 시작합니다. 이 단편에서 벤야민은 포괄적 지식을 다루는 책들보다 전단, 팸플릿, 잡지, 포스터 따위의 형식들이 어떤 대상을 포착하는 데 있어 더 유능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문구점, 멕시코 대사관, 시계, 식당, 회계사 등의 제목으로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도시의, 시대의 단편적인 인상들을 제시하지요. 벤야민은 숄렘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일방통행로>를 소개하며 ‘독특한 구성의 아포리즘’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깊은 층위의 광경을 보여주는 거리’가 되었다고 밝힙니다. 이 깊은 층위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것들을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벤야민은 이러한 현실의 이질성 이면에 어떤 보편적인 원리나 절대적인 원인을 상정하고 이를 통해 현실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을 최대한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경험적이고 가시적인 현실 이면의 무엇을 밝혀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 이면의 무엇이란 바로 진정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자, 소용돌이 속의 원천 그 자체, 바로 그 시대의 이념이겠지요. 벤야민이 서로 무관하게 보이는 단편들로 저작을 구성하는 것, 거리의 소동이나 시대상의 작은 일부를 아포리즘 형식으로 엮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법을 통해 시대의 이념을 비로소 포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소란들이 곧 당대의 이념을 이루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벤야민의 산책은 소용돌이 속에서 우회로를 따라 돌면서 파편들을 수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중략) ...

 

 

<파사주>의 한 구절에서 벤야민은 자신의 기획을 ‘문학적 몽타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제시하지요. 가치 있는 것만을 따로 모아 발췌하거나 재기발랄한 표현 따위도 일체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밝힙니다. 누더기와 쓰레기들을 목록별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이 정당한 권리를 찾도록 해주겠다는 생각도요. 어떻게? 바로 재인용을 통해서요. 여기에서 벤야민이 ‘누더기’와 ‘쓰레기’라고 부른, 또 종종 폐허의 이미지로 제시하는 역사와 시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천천히 더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은 벤야민이 그 쓰레기 더미에 눈을 돌린 까닭에 먼저 초점을 맞춰 봅시다. 대부분의 철학이 쓰레기 더미로 취급했던 것,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고 여겼던 것에 벤야민은 주목합니다. 숄렘에게 보낸 1929년 3월 15일 자 편지에서 벤야민은 <파사주>를 아이들의 놀이나 어떤 건물의 모습, 삶에서 마주치는 특정한 상황들을 통해 나타나는 어떤 구체성의 형태를 한 시대 전체에 적용하려는 시도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파사주>의 작업 노트에서 ‘이제까지 광기만이 횡행했던 영역을 경작할 수 있는 지대로 만들 것'을 다짐하지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놀이나 건물의 특정한 형태처럼 사회학의 좁은 영역, 또는 특정 양식이나 그것의 역사에 있어 작은 의미를 가질 뿐인 이 사소한 것들에서 벤야민은 의미를 읽어내고자 합니다. 그것도 시대 전체의 의미를요.

 

<파사주>의 다른 노트에서 이러한 전환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노트에서 벤야민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진리'와 같은 개념과 단호하게 결별할 것을 선언하면서, 어떤 대상에 대한 진리는 그것이 속한 시대와 분리할 수 없을 뿐더러 인식하는 행위와도, 인식이 경유하는 구체적 대상과도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영원한 것은 어쨌든 (순수한) 이념 그 자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옷 주름이라고요. 주목할 만한 전환입니다. ‘작은 것이 중요성’ 내지는 ‘사소한 것의 소중함’ 따위의 격언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옷 주름’ 하나에, ‘신발끈'이나 ‘애들 공놀이’ 하나에 시대의 이념 전체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말로는 쉽지만 절대 가볍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작고 사소한 것들에서 시대 전체를 읽어내려면 도대체 얼마나 깊게 들여다봐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이 말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당장 하루 동안 자신의 손을 거쳐 갔던 수많은 사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세요, 우리는 그 작은 ‘주름들’에서 무엇을, 어디까지 읽을 수 있을까요?

 

남은 밤 동안엔 베를린 골목과 파리의 풍경을 따라 걷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벤야민의 산책이 왜 굳이 일방통행로에서 시작하는가,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밤의 머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산책자가 거리를 걷는 까닭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합니다. 거리는 시대와 만날 수 있는 장소이자 곧 시대이기도 하니까요. 또 조각마다 시대를 품고 있는 작고 사소한 것들이 넘쳐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왜 걸음이 ‘파사주’를 향하는가 역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파사주야말로 시대가 만든 양식 그 자체이자, 시대의 모든 욕망이 집결하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또 산책자를 위협하며 급변하는 거리의 풍경 가운데 상품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갖는 사물들과 이를 둘러싼 욕망이 정지된 성좌를 이루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굳이 ‘일방통행로'를 산책로로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교차로나 갈림길, 혹은 번화가나 오솔길처럼 많은 길들이 있을 텐데요.

 

영원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에서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벤야민은 ‘영원한 것은 옷 주름’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흔히 영원하다고 하면 시간을 초월해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것을,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떠올리지요. 특히 철학과 영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 변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철학사를 추동하는 숨은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 변하고 만다는 것은 이 사태가 풍기는 막연한 인상보다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의 눈도 시절을 쫓아 변하기 때문에, 또 본래 사람 자신 역시 자연의 일부이므로 변화라는 자연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다 함께 행복한 맹목을 이루는 것뿐입니다. 당장에 변화라는 이 사태는 세계의 모든 준거를 박탈합니다. 모든, 준거가 사라집니다. 남김없이. 어제는 이것이었던 것이 오늘은 저것인데 모레는 다른 무엇이 된다면, 사실 그것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이름 붙이는 순간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해버리는 도깨비 장난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을 비교하거나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올바른 판단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판가름할 수 있는 틀이나 기준 자체도 사라집니다. 약속도 언어도 공통의 인식도 무엇 하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수라장입니다. 다만 다들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지옥 같은 풍경에서 지옥을 연상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옥이 아닌 게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지옥의 악취를 눈치 채기 마렵입니다. (이 행복한 지옥도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겁니다.)

 

자, 그래서 철학은 최초의 준거를 찾아 묻습니다. 항상 가변적인 개별 사건이나 경험적인 사태가 아닌, 보이지 않는 원리나 이념, 어떤 형식이나 체계를 추구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영원과 보편의 가능성을 집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철학의 본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철학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그것을 물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것을 물으면서 철학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었던 탈레스의 후손들은 만물의 근원으로서 변하지 않는, 즉 영원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맸습니다. 거듭하는 이 좌충우돌의 과정은 가히 오디세우스의 여정에 빗댈 만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세계의 준거, 최초의 기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여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은 아마 오늘 우리의 시간을 초과하는 일이 될 것이므로, 골목 어귀로 다시 돌아와 벤야민의 생각만 들어보도록 하지요. 영원이 시간을 초월해 변하지 않고 고정된 어떤 속성을 가리킨다고 본다면, 벤야민은 초월의 의미를 바꿔 생각합니다. 시간의 초월, 즉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두 방향으로 가능합니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것, 혹은 모든 시대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한 채 홀로,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 벤야민은 후자의 방식으로 영원을 이해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유일한 것, 다른 시간들로 오염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충일한 시간이야말로 영원한 것이라고요. (물론 그냥 단순하게 발생하는 모든 일이 무조건 다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매순간은 영원이 될 수 있는, 영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그 자체로 매순간이 하나하나 단독적으로 영원의 단편을 이루는 것은 결단코 아니니까요. 오히려 각자가 단독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의 면면은 다른 시간들을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경우가 거의 전부입니다.)

 

벤야민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영원성이 아니라 다시 없을 유일한 것로서의 영원성에 주목합니다. 산책자가 발견하는 것 역시 그러한 영원성의 파편들이고요. 일방통행로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길, 찾고 있던 것을 지나치면서 뒤늦게 발견했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의 이름입니다. 이제 슬슬 역사와 시대, 시간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 어귀에 다다른 것 같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산책자의 발걸음은 이제 베를린을 향합니다.

 

 

 

2018. 3. 27.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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