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비애극의 원천(2)

March 20, 2018

앞선 세미나에서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뻔한 경구를 굳이 여러 차례 언급했었지요. 우리가 다루는 텍스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벤야민이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이 텍스트에서 벤야민이 어떤 질문과 씨름하면서 답을 찾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가 도달한, 그가 제시하는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 첫 장의 제목은 ‘인식비판적 서론'입니다. 제목처럼, 여기에서 벤야민은 인식에 대한, 앎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수행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앎의 대상과 방법입니다. 어떤 대상의 모양과 색채, 무게와 부피, 성분과 그것의 배합, 혹은 운동량이나 벡터 따위를 알았다면 그 대상을 알았다고, 그것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질 이외에 객관적인 실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아마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대상에 물리적 속성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또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배타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을 초과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경험적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닌 그 무언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벤야민은 묻습니다. 어떤 대상을 탐구하고자 할 때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무엇’이 아닌 그것의 다른 속성들을 알았을 때 그것을 인식했다고 선언할 수 없다면, 이 ‘무엇’이야말로 그 대상의 일부가 아닌 알아야 할 진정한 대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벤야민은 이념을 (철학적) 앎의 대상으로 제시합니다. 앎은 당연히 진리를 지향하겠지요. 진리라는 거창한 표현에 기죽거나 심오한 생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앎의 대상을 이념이라고 볼 때 앎으로서의 인식이 이념에 일치한다면 그것이 곧 진리일테고, 이념에 일치하지 않는 인식은 오류겠지요. 대상을 올바르게 파악하면 진리, 즉 참이고 대상을 그것과 다르게 파악하면 오류, 즉 거짓인 셈입니다. 단순하지요. 개를 개라고 하면 진리고, 개를 두고 고양이라고 하면 진리가 아닙니다. 비가 올 때 비가 온다고 하면 참이고, 비가 올 때 눈이 온다고 하면 거짓인 셈이고요. 단순한 예를 굳이 열거하는 까닭은 진리니 이념이니 하는 거창한 낱말들에 붙은 환상을 떨쳐내기 위해서입니다. 진리에 대해 자꾸 엉뚱한 상상에 빠지니까 진리를 찾겠답시고 점괘나 펼치고 기도 염불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벤야민은 앎의 대상을 이념으로 제시한 뒤, 앎의 방법으로 우회로를 제시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속성들이 아니라 그것의 이념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나름의 해답인 셈입니다. 우회로, 즉 직접 대상을 향해 내달리는 쭉 뻗은 곧은 길이 아닌 빙 둘러 멀리 돌아가는 길을 통해서만 대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벤야민에 따르면 불규칙한 조각들이 우회로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조각들을 통해 대상에 대한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오랜 관찰과 몰입이 필요하다고 벤야민은 말합니다.

 

우회로를 이루는 파편들은, 별자리와 별들의 관계에 빗댈 수 있습니다. 별 하나하나가 아니라 별들의 배열이 별자리를 이루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을 이루는 요소들, 즉 하나하나의 개념들과 사물적 요소들 역시 그것들 각각이 아니라 배열과 배치 속에서 이념을 드러냅니다. 벤야민은 이를 별자리, 성좌(Konstellation)라고 명명하지요.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제목이니까, 당연하게도) 독일 비애극의 이념을 밝혀내고자 합니다. 부당하게 평가절하된 독일 비애극을, 혹은 (다른 사람들은) 잘못된 방법을 통해 접근했기 때문에 밝혀낼 수 없었던 독일 비애극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텍스트가 우선 겨냥하고 있는 목표라고 볼 수 있지요. 우회로니, 성좌니 원천이니 하는 것들은 다 이를 위해 벤야민이 제시하는 방법들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의 의미와 가치는 단순히 독일 비애극을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살펴보겠지만 벤야민은 이 방법을 통해 자신의 시대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에까지 이르렀으니까요.

 

인식이 겨냥하는 것이 이념이라고 했을 때, 이념은 현실과는 분명 다릅니다. 벤야민은 이를 두고 ‘이념은 현상들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현상들의 세계에서, 즉 경험을 통해서 이념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가로막힙니다. 그렇다면 이념은 불가피하게 직관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을까요? 반복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우회로가 필요합니다. 경험을 통해 직접 이념에 닿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이, 이념만이 갖는 어떤 의미를 포착하고자 한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가능할까요? 벤야민은 말합니다. 대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 해석을 위한 의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탐구가 아니라, 신중하고 오랜 관찰과 대상을 향한 몰입 속에서 가능하다고요. 연역의 단순한 연쇄가 아닌 반대와 중단의 기법 속에서, 단편화가 초래하는 단순화가 아닌 논설의 지구력 속에서, 천박한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주제들의 반복 속에서, 부정하고 사상(捨象)하는 논쟁이 아닌 긍정의 풍부함 속에서 이념은 모습을 드러낸다고 벤야민은 주장합니다. 곱씹어 볼 만한 지점입니다.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벤야민의 접근을 살펴보면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방법(연쇄가 아닌 중단, 단순화가 아닌 지구력, 보편주의가 아닌 주제들의 반복...)이 갖는 의미를 조금은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벤야민은 바로크 비애극이 하나의 이념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른 장르, 다른 현상, 다른 사건들과 구별되는, 바로크 비애극만이 갖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의미가 있다는 뜻이지요. 앞서 ‘인식비판적’이라는 표현 아래에서 벤야민이 당대의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 즉 그 시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과 어떤 대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취했던 방법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엉뚱한 길을 따라간다면 계획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또 엉뚱한 공식을 사용한다면 문제가 풀리지 않거나 엉뚱한 답이 나오는 것처럼, 잘못된 방법을 통해 접근한다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겠지요. 벤야민이 보기에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꼭 이렇습니다. 잘못된 관점, 잘못된 방식으로 평가하니까, 온당하지 않은 평가가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어땠는가 하니, 동시대 스페인의 극작가 칼데론이 보여준 것처럼 우연하고 노련한 기법도 찾아볼 수 없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풍부하고 자유분방한 매력도 없으며 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상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고, 지식 관료층에 의해 만들어진 비민중적인 작품으로서 독일 문학의 형성 과정에 비추어 봐도 그 가치가 의심스럽고 작품이 별로라면 작가라도 흥미로워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텐데 심지어 창작자 개개인의 면면도 영 별 볼 일 없고 지나치게 과장된 장식과 뻣뻣한 형식으로 점철된, 그야 말로 별 볼 일 없는 장르라는 것에 이견이 없었지요. 벤야민만 빼고. 벤야민은 이러한 견해를 경시와 오해라고 단언합니다. 왜냐? 이러한 평가들은 바로크 비애극에서 진정으로 읽어내야 할 것을, 드러내야 할 것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제시하기에 앞서, 벤야민은 비애극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검토합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몇 가지 관점의 부당함을 주장합니다. 말 그대로 ‘인식(의 관점과 방법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지요. 벤야민이 먼저 살펴보는 것은 콘라트 부르다흐의 명목론(Nominalimus)입니다. 흔히 ‘유명론’이라고 불리는 이 관점은 보편자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개별자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달리 보편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입장을 실재론이라고 하는데, 벤야민은 ‘콘라트 부르다흐의 명목론'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이 구절에서 명목론을 비판하는 실재론자로서의 콘라트 부르다흐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콘라트 부르다흐는 명목론이 아니라 실재론의 입장에 서 있는 셈이지요. 벤야민이 활동했던 시기쯤 오면 명목론과 실재론 사이의 대립이 철학적 갈등의 최전선을 이룬다고 보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이 기준을 사용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소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나… 라는 의문이 들지만 이 의문은 비슷한 종류의 다른 의문들과 함께 시간이 남는다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콘라트 부르다흐의 관점은 대상에 일종의 ‘보조 이름표’를 붙여 놓고 만족하는 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특정한 대상에 ‘휴머니즘'이니, ‘르네상스인'이니, ‘고딕인'이니 하는 표지를 붙이고 그것을 통해 대상들을 구분하지만, 벤야민이 보기에 이러한 구분은 자의적일 뿐더러 거짓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외관에 주목할 뿐인 이러한 관점은 현상들의 거짓 통일성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접근한다면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바로크' 따위의 개념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로크 비애극’을 ‘그리스 비극’과 구분한다고 한들 바로크 비애극의 진정한 의미, 즉 그것의 이념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요.

 

부르다흐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벤야민은 이어서 극사실주의(Verismus)를 짧게 검토합니다. 극단적인 사실주의는 객관적인 진실의 존재 여부를, (이 경우에는) 즉 이념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인식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실만으로 진실을 구성하고자 하지만 벤야민이 보기에 이러한 접근은 결국 이런저런 잡다한 직관과 귀납적 사실들의 혼합주의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고유한 이념 그 자체가 아닌, 대상에 대한 판단자의 주관적 상태에 불과합니다. 극단적으로 사실만을 추구해봐야 결국 대상에 이입한 판단 주체의 감정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입장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지요.

 

자, 벤야민에 따르면 이렇게 어떤 대상을 보편적 표지를 통해 구분하려는 시도와, 경험적 사실을 추수해서 그것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모두 한계를 지닙니다. 무언가에 대한 보편적 표지를 먼저 설정하고 그것에 부여한 속성으로 실재 현상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연역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대상을 먼저 분류하고 이 과정에서 그것들의 상위 개념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일종의 귀납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벤야민은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평가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이러한 비판을 수행하지만, 비단 이 문제는 바로크 비애극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식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두 방법 모두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 어떤 대상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두 방법 외에 뾰족하고 신통한 인식 방법을 떠올리기 어려우니까요. 다시 반복한다면, 그래서 벤야민은 말합니다. 우회로가 필요하다고.

 

보편주의와 사실주의가 갖는 한계를 차례로 언급한 뒤, 벤야민은 크로체의 관점에 대한 검토로 넘어갑니다. 크로체 역시 벤야민처럼 기존의 접근법들이 갖는 한계를 인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술에서 장르 개념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지요.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을 임의로 구분하는 이론은 모두 근거가 없습니다. 비극이니, 비애극이니 하는 것도, 심지어 회화나 조각, 음악 같은 구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크로체는 주장합니다. 장르나 매체를 나누는 구분들은 모두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서요. 오직 예술 그 자체만 존재할 뿐이고, 개별 작품들은  수없이 많을 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다른 것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모두 독창적이고, 고유하고, 단독적입니다. 얼핏 얼토당토않은 주장처럼 들리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같고 다름을 판가름할 것인가, 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부정하기 만만치 않은 주장입니다. 특히나 현대의 언어이론에 비춰 본다면 더 그렇고요. 벤야민 역시 이러한 주장이 갖는 중요성에 동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역시 여전히 충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특정한 작품 유형의 역사나 양식들의 예시를 모으는 것, 혹은 그것들 사이의 어떤 공통점을 찾기 위해 예술작품들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비극적인 것(의 이념)’과 ‘희극적인 것(의 이념)'처럼 어느 한쪽으로 환원할 수 없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갖는 대상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념은 자신의 표지 ‘아래에’ 다른 개별 대상을 포괄하는 요구를 내세우지 않고, 설령 자신의 구체적 사례를 갖지 않을 때에도 존재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지점입니다. 어떤 이념이 현상과 무관하게 존속할 수 있다, 어떤 이념이 현상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중요한 함의를 지니니까요. 도래하지 않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이 생각, 이 문제는 벤야민의 다른 텍스트를 다루면서 다시 경유하겠습니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자 할 때 취할 수 있는 기존의 방법들을 검토한 뒤에, 벤야민은 심호흡을 제안합니다. 어떤 대상의 형식들을 연역적으로 파악하고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험적으로 형식의 규칙들을 파악한 뒤 이를 판단의 근간으로 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리거나 아무런 규준도 없이 모든 대상을 낱개의 것으로 방치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벤야민이 먼저 제시하는 것은 심호흡, 큰 심호흡입니다. 갑자기 엉뚱한 제안 같나요? 벤야민이 보기에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 앎에의 의지가 실패하는 까닭은 언제나 그것이 너무 성급하게, 단숨에 그것을 거머쥐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급함 속에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은 사라집니다. 설령 내가 그것에 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한들 소용 없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천편일률적인 성급함은 무지한 속물들의 순박함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으니까요.

 

이러한 심호흡과 숙고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은 원천입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원천은 단순한 기원이나 생성과 다른데, 원천은 생성의 흐름 속에 소용돌이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소용돌이라면 회전의 힘과 리듬이 있겠지요. 원천으로서의 소용돌이는 자신의 힘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 한, 자신의 형상을 완성할 때까지 역사 속에서 부침과 갈등을 거듭합니다. 현상으로서의 사실들이 소용돌이를 이룬다고도, 소용돌이 속에 뒤엉켜 휘몰아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해석자의 과제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사실들의 소용돌이를 하나의 이념으로, 그 이념의 본질로서 확증하는 것!

 

 

… (중략) …

 

 

벤야민이 바로크 비애극을 다루면서, 예술작품의 차원에서 제기한 문제를 우리는 지금 대상 일반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벤야민이 여기에서 제시하는 관점은 비단 예술작품의 감상에 국한되지 않고 앎이란 무엇인가, 이해란 무엇인가의 문제에 직결되니까요.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가능한가?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의 답은 어쩌면 구체적인 방편이 아니라 어떤 태도나 자세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벤야민은 말합니다. 큰 심호흡으로, 천천히 우회하고 관찰하면서, 신중하게, 오래 머물면서, 더 깊이, 더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사랑하면서, 내가 아는 것들로 대상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 그 자체로 보존하면서, 라고. 너를 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가 되는 것.

 

무얼 먹든 아무리 크게 떠도 첫 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겠지요. 한 술에 배가 부를 만큼 크게 떴다가는 쏟아지거나 흘리거나 씹고 삼킬 수 없거나 탈이 나기 십상입니다. 일단 벤야민 한 술 떴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군요. 일종의 출발점으로서 우선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의 첫 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벤야민의 생각에 초점을 맞췄는데, 기록을 예민하게 따라 읽으면 이념, 인식, 진리의 관계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또 조금은 더 흥미롭게 벤야민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일단은 벤야민의 질문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도 좋겠습니다. 같은 질문에서, 같은 방향으로 바라볼 때 벤야민의 행보를 보다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굳이 까다로운 텍스트를 맨 처음에 끼워 넣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다음 세미나에서는 벤야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 산책을 (드디어!) 함께 나서게 되겠군요. 성마름과 조바심을 꾹 눌러 놓고, 벤야민을 따라 얼마간의 만보(漫步)를 즐겨도 좋겠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3. 20.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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