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비애극의 원천 (1)

March 13, 2018

지난 화요일 이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물론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 들어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이미 우리 각자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 혹은 가능하지 않다는 저마다의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물음을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규정할수록 답은 점점 더 불가능에 가까워질 겁니다. 살면서 부딪혔던 수많은 오해와 실패의 장면들에 돌이켜 비춰본다면 더욱 그럴 테고요. 깊게 따져볼 것도 없이 완전한 이해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되었을 때,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앎과 이해에 관련한 물음은 질적으로 변전합니다. 가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는, 혹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어떤 문제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을 넘어, 실패가 예정된, 실은 무려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물음이 왜 중요한가, 왜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절실하게 이 문제에 매달리는가, 하는 차원의 문제로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이 과정이 곧 철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색하고 이야기한다면 기록된 모든 것의 역사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벤야민 역시, 이 문제를 움켜쥐었던, 이 문제에 사로잡혔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고요.

 

김애란의 단편 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는, 편의점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일상 공간 깊숙히 자리 잡은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간단한 생필품이나 간식거리를 간편하게 고를 수 있는 곳이자 택배 따위를 보내고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또 누군가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라고 느끼실 수도 있겠네요, 벤야민이 막 등장할 찰나에 편의점이라니. <독일 비애극의 원천>의 서두에서 벤야민은, 철학이 진리를 포착하고 제시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에 따르면 철학이 진리를 (자신의 관점에서) 전유하거나 탈취하지 않고 진리를 그 자체로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간명성이나 수학적 증명의 명료함이 아닌, 어떤 우회로를 통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벤야민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이후 자신의 시대를 답사하기 위해, 눈 어두운 사람들 사이에서 흩어져 매몰되어 있는 자신의 시대를 발굴하기 위해 파사주라는 도시의 우회로를, 또 19세기라는 시간의 긴 우회로를 선회하지요. 그러니 우리도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약간의 우회로를 만들어봅시다. 벤야민 역시 환영할 겁니다. 안 그래도 할 수 없고요.

 

김애란의 소설에서 대학가 주변의 주택가에 살고 있는 ‘나'는, 집에 화장지가 다 떨어질 수 있으니 화장지도 사야 하고 밥을 해먹어야 하므로 참치캔도 사야 하고 밥을 먹었으면 입가심을 하고 싶을 것이므로 요구르트도 사야 합니다. 그래서 편의점에 가지요. 여느 날처럼 이것저것 물건을 사들고 계산대에 선 ‘나'에게, 바코드 리더기로 물건값을 계산하던 편의점 사장이 말을 겁니다. “학생이세요?” 별 생각없이 ‘나'는 대답합니다. “네” 하고. 사장이 말을 받아 다시 묻습니다. “어느 학교 다녀요? 요 앞에 K대학?” ‘나'는 무례하게 굴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편의점 사장과 굳이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니 K대학은 아니고 뭐…” ‘나'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지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설마 전공이 뭐냐고 묻는 건 아니겠지?’ 편의점 사장이 다시 묻습니다. “전공이 뭐예요?” 짧은 시간,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사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나 문학관을 늘어놓을 것이고 미술을 전공한다고 하면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들먹일 것이며 이벤트학 따위를 전공한다고 하면 그건 무슨 과냐, 언제 생겼냐, 졸업하면 뭐하냐 등의 질문을 퍼부을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계산대 앞에서 몇 마디 더 나눈 뒤에 나중에 그는 ‘나'를 안다고 말할 거라고. ‘나'는 적당히 거짓말로 식품공학을 전공하노라 사장에게 대답하고는, 때마침 울린 전자레인지 알람 소리와 함께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밖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편의점에 가지 않겠노라 다짐하지요.

 

하지만 대학 주변 주택가에 살면서 편의점을 가지 않고 혼자 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행히 편의점은 한둘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이제 주변의 다른 편의점을 이용합니다만, 여기에서도 다시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 날 콘돔을 사는 ‘나'에게 계산대에서 편의점 사장으로 보이는 ‘주인 여자’가 몇 살이에요? 하고 물은 것이지요. 근래 한국에서 미성년자의 콘돔 구매를 두고 이래저래 설왕설래가 진행 중인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계산대에 선 사람이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을 법한 질문입니다. 술이나 담배 따위를 구매할 때처럼요. ‘내'가 주민등록증을 찾기 위해 지갑을 뒤지는 동안, 계산이 지체되는 이유가 궁금해 줄 뒤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뒤통수로 의식하며 ‘나'는 진땀을 뺍니다. 콘돔 한 갑을 사기 위해 열 번도 더 고민하고 예정에 없던 과자까지 덩달아 집은 다음에야 계산대를 찾은 여자 손님의 민망함을 순식간에 짓밟은 ‘주인 여자’를 원망하면서요. 어쨌거나 그 뒤로 ‘나'는 두 번째 편의점에도 가지 않습니다. 약간의 복수심과 함께, 어쩐지 ‘주인 여자'가 자신을 보면 ‘콘돔 샀던 여자'라고 생각할 것만 같아서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학 주변 주택가에 살면서 편의점을 가지 않고 혼자 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분히 돌발적인 몇몇 사건 끝에 ‘나'는 마침내 세 번째 편의점에 단골로 정착하지요.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고 늘 매장 내에서 잔잔한 클래식이 들려오는, 그리고 말수가 적고 호감 가는 인상의 젊은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근무하고 있는 곳입니다. 다행인지 이곳에서는 ‘나’에게 학생인지 묻지 않고 콘돔을 살 때 주민등록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서 오세요'와 ‘감사합니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끼지요. 하지만 그러다 문득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모든 정보가 편의점 계산대 위에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여섯 종류의 생수 가운데 내가 어떤 물을 가장 좋아하는지, 흑미밥과 백미밥 가운데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자주 사가는 요구르트가 딸기맛인지 사과맛인지 심지어 생리 주기까지 모든 정보가 계산대 위에 올려집니다.

 

‘나’는 상상합니다: 어느 날 세 개의 편의점 중간쯤의 어느 골목에서 어떤 여자가 차에 치여 죽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세 편의점의 주인, 즉 증인 내지 참고인들은 저마다 그녀를 ‘안다'고 증언하고 나섰으나, 그 여자에 대한 저마다의 진술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기억과는 상이한 다른 사람들의 진술을 들으며, 그들은 이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며 이번에는 다시 그녀를 모른다고 부정하고 나섭니다. 세 번의 긍정과 세 번의 부정 속에서, 여자는 그때그때 어떻게 달라지는 걸까. 여자를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연하게도, 또 뻔하게도 셋 다 그렇고, 셋 다 아닙니다. 그녀에 대한 어떤 정보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셋 모두 그녀를 알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또 한편 그 정보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면서 정작 본질적이지는 않다는 점에서 셋 모두 그녀를 모른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다른 우회로를 한 번 더 경유합시다. 이번에는 레이먼드 카버입니다. 카버의 단편 ‘대성당'에는 아내 때문에 웬 맹인과 대화하며 밤을 보낸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아내에게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맹인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그가 곧 찾아오리라고 남자에게 통보하지요. 남자는 모든 게 귀찮고 불편하기만 합니다. 기본적으로 낯선 사람인데다, 뭘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아내가 기다렸던 맹인 친구, 로버트가 그들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아내의 환대 속에 그들은 어찌어찌 함께 식사를 마쳤지만, 남자는 여전히 영 어색하기만 합니다. 식사 후 디저트를 먹으며 몇 마디 더 나눴지만 사정을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피곤하다며 옷을 갈아입겠다고 방에 올라간 아내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깜빡 잠이 든 걸까요? 별 수 없군요, 술이나 한잔 더 마시고 담배나 나눠 피는 수밖에. TV를 틀어도 지극히 평범하고 따분한 방송들 뿐입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봤지만 역시 다를 건 없습니다. 하릴없이 맨 처음 채널로 돌아옵니다. 남자는 어쩐지 미안하다고 로버트에게 사과합니다. 로버트는 괜찮다고, 당신이 뭘 보든 상관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긴, 친구 집에 놀러왔는데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 남편이 TV 프로그램을 뭘 틀든 그게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하물며 내 눈에는 TV가 보이지도 않는데요 뭘.

 

한동안 이들은 말없이 TV 앞에 앉아 있습니다. TV를 보던 남자는 문득 로버트가 자신을 향해 돌아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당황했다가, 이내 그가 귀를 TV 쪽으로 향하게 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TV에 집중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이런 걸 틀어서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할 만큼 지루한 프로그램인데요. 프로그램은 세계 각국의 대성당(cathedral)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로버트에게 TV의 장면을 설명하려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습니다. 카메라가 성당을 소개하며 성당의 이런저런 장식의 모습을 비칠 때 남자도 그걸 따라서 이야기합니다. 가고일이나 황소 등등이… 가만히 듣고 있던 로버트가 남자에게 묻습니다. “프레스코 벽화인가요?” 남자는 술을 한 잔 더 마시려 하지만, 잔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대답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자가 대답합니다. “좋은 질문인데요? 모르겠군요.”

 

카메라는 계속 대성당을 소개합니다.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리스본으로 옮겨 가며 성당을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남자가 로버트에게 묻습니다. 대성당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느냐고, 또 누군가 대성당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한다면 알아차릴 수 있는지, 침례교 회당과 대성당의 차이점을 알고 있는지 묻습니다. 담배를 한 차례 들이키고 입에 연기를 머금은 채 로버트가 대답합니다. 대성당을 짓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일을 해도 오십 년, 혹은 백 년쯤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때로 아버지와 아들이 세대에 걸쳐 대성당을 짓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을, 그 가운데 누구는 평생을 대성당을 지으면서 보냈음에도 대성당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가 전부입니다. 말한 그대로죠. 어쩌면 당신이 알고 있는 대성당의 모습에 대해 나한테 더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요?”

 

남자는 고개를 돌려 TV를 봅니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대성당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이걸 무슨 수로 알려줄 수 있을까? 대성당은 고사하고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건물도 장식도 어떤 것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성당의 모습을 알려줄 수 있을까?

 

 

… (중략) …

 

 

‘대성당'의 마지막 구절, 한국어 번역본에서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라는 말로 표현된 문장의 원문은 “It’s really something”입니다. 남자는 로버트에게 대성당에 대해 말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맹인과의 소통은 그에게 힘겹기만 한 일이지요. 로버트는 그에게 대성당을 함께 그림으로 그려보자고 제안하고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어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남자는 커다란 건물의 본관을, 창문을, 첨탑을 그립니다. 펜을 쥔 그의 손에는 로버트의 손이 얹혀 있고요. 그림을 배웠거나 평소에 그림을 그려 버릇 했던 사람도 아닌, 게다가 밤 중에 술이나 마시며 TV나 보다가 그리는 그림이 사실 오죽하겠습니까만, 그래도 이들은 꾹꾹 눌러가며 대성당을 그립니다. 로버트가 다시 제안합니다. 이번에는 눈을 감은 채 계속 그림을 그려보라고요. 남자는 눈을 감은  채 계속 대성당을 그립니다. 낯설고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타인의 세계,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의 세계입니다. 아는 것이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철저한 불가능의 시공간입니다.

 

로버트가 이만하면 된 것 같다고, 이제 한번 보라고, 남자에게 묻습니다. 남자는 눈을 뜨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자신의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이 일부러 눈을 감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고,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착각이나 환영일까요?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로버트가 묻습니다. “보고 있어요?” 남자는 대답하지요. “It’s really something.” 번역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표현입니다만, 우리는 이것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는 암시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일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강한 신호를요. 아마 벤야민에게 그것은 시대와 구원에 대한 사유가 아니었을까요.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에 대해 남김 없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조건이자 세계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정작 경계해야 할 것, 더 크게 조심해야 하는 함정은 거꾸로 반대쪽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해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이 넘쳐나는 세계 쪽에요.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호도하는 세계, 혹은 자명한 불가능을 방패 삼아 자아의 모든 독단을 정당화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살면서 이 세계의 폐해 또한 경험하고 있고, 경험한다고 선언하기에 앞서 실은 우리 역시 이 세계의 속성을 공유한 채로, 이 세계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지요.

 

자, 어쨌거나 지금의 세계는 하나의 조건 위에 서 있습니다. 온전한 앎과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선언이 바로 그 조건입니다. 만년에 푸코는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그리고 익히 알려진 그의 죽음)이 철학의 모든 문제를 일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사로잡힙니다. 벤야민의 언급처럼 철학은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설정할 때마다 새롭게 자신을 정립할 것을 과제로 갖습니다. 즉 철학이 자신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일 것인지 설정할 때마다 철학은 자신이 무엇인지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모든 철학은 자신을 정립할 것을 과제로 가졌었고, 또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들이 바로 철학사를 이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질문과 그가 제시한 답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너 자신을 알라’는 답이지요. 푸코는 이것이 철학사의 모든 해답들을 아우르는 근본적인 하나의 기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다른 방식의 통제와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 앎으로써 자유에 기초해 행동할 수 있는 지평을 확보하는 것이 곧 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앎과 이해라는 문제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진리는, 진리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한 어떤 것은 불규칙한 조각들로 구성됩니다. 이 조각들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오랜 관찰과 대상을 향한 몰입이 필요하다고 벤야민은 이어서 말합니다. 관찰과 몰입, 서성이는 것, 천천히 지나가는 것, 기다리는 것, 돌아보는 것의 의미는 벤야민을 통해 앞으로 얼마간 우리가 계속 살펴볼 문제입니다. 흔히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때로는 범속한 세간의 말에도 웅숭깊은 지혜와 통찰이 담긴 법이지요. 벤야민의 방법을 엿보려고 하는 우리의 상황에도 적용해볼 수 있겠군요. 질문만 제대로 이해했다면 답은 이미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벤야민을 이해하는 것은 그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죽은 벤야민은 더 이상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기록을 추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남긴 기록은 그가 평생 씨름했던 질문들에 대한 벤야민 나름의 해답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다시 물어야 합니다. 벤야민의 질문은 무엇이었나? 벤야민은 어떤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인가? 그 질문의 자리에 그와 나란하게 설 수 있다면 그가 남긴 기록 또한 훨씬 친절하게 자신을 내보이겠지요.


벤야민은 읽는 사람을 관찰의 단계에서 멈추도록 강제하는 것이 우회로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핵심은 멈춰 ‘세워서’ ‘관찰’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철학의 목적, 인식의 목적은 열광시키거나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학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이는 곧 진리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대상을 강탈하듯 선취하고 그것을 이해라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한 번 슥 보고서는 그렇구나, 하고 휙 지나가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늘 보던 대로 보고 항상 가던 대로 가지 않기 위해서 벤야민은 관찰을 강제하는 것을 철학의 방법으로 요구합니다. 우리가 길게 우회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요. 열광과 감동, 소란과 성마름 앞에서 대상은 모습을 감춥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침묵과 은폐 속으로 멀어집니다. 이렇게 멈춰 서서, 벤야민이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 우선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왜 멈춰야 하는지는 벤야민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봅시다.

 

 

 

2018. 3. 13.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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