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entation

March 6, 2018

어떤 대상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요? 글쎄요, 어쩌면 이 물음 앞에서 ‘완벽하게’라는 부사는 사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을 완벽하게 알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그 대상에 대해 어쩌면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이해했노라는 확신 또한 가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사족을 떼고 간결하게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하지 않다면 왜, 또 가능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본격적으로 이 물음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분해하면 크게 ‘어떤 대상’, ‘이해’, ‘가능 여부’의 세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어떤 대상’이야 ‘이해하고자 하는 무엇’으로 쉽게 정의할 수 있겠고 ‘가능 여부’는 ‘이해의 성사’를 의미한다고 생각해보면, 결국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은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되니까요.

 

한걸음만 더 가볼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이해’라는 것이 물방울이나 자갈돌처럼 직접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그것에 대해 숙고하기 위해서는 그것 주변에 있는, 그것과 비슷하거나 연관된 다른 어떤 것들을 참고하고 우회해서 그것에 접근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나 관념에 관련한 문제라면 더욱 그렇지요. 이해의 바로 옆에는 우선 ‘앎’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해는 무엇보다 앎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요.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어쩌면 실생활에서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했다고, 다 이해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건 성립하지 않는 주장일 겁니다. 예컨대 ‘오보에’라는 악기가 어떻게 생겼고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소리가 나고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면서 오보에를 잘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그 주장을 온당하게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세상은 알아도 이해했노라 확신하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한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했다고 장담하는 건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자, 우리는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로서는 이해란 앎과 관련된 어떤 것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우선 찾은 실마리부터 차근히 풀어봅시다. 집합론으로 표기한다면 이들의 관계는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실은 같은 것이거나(앎=이해), 알았으니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거나(앎⊂이해), 또는 알았지만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것(앎⊃이해)이라고 쉽게 정리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이 문제에 다가가도록 합시다. 도시를 예로 들어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 공간인 서울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서울을 이해하는 것과 서울을 아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요. 앞서 간단히 짚고 넘어간 것처럼 서울이 나라인지 도시인지 사람 이름인지 사탕 이름인지도 모르면서 서울을 이해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달리 말하면 서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울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럼 서울을 어떻게, 얼만큼 알아야 서울에 대해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18년 1월을 기준으로 했을 때 서울의 인구수는 9,851,767명입니다. 서울의 인구수를 알았으니 서울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17년 11월 기준 서울에는 간선, 지선, 순환, 심야 버스 등을 포함해 모두 413개 노선의 버스가 운행하고 있습니다. 서울 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자 도시 환경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내버스의 운행에 대해 알았으니 서울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번거롭게 일일이 예시할 것 없이 그냥 생각해봅시다, 시의 예산은 얼마고 작년에는 얼마였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어느 동네에 몇 개가 있고 남자는 몇 명이 살고 여자는 몇 명이 살고 있는지 어린이는 몇 명이고 노인은 또 몇 명인지 고향이 서울인 사람이 몇 명이고 다른 지역에서 이사온 사람은 몇 사람이 언제 이사를 와서 언제부터 살고 있는지 행정구가 어떻게 구획되어 있고 동마다 어떤 회사들이 몇 개가 있는지 그 회사들의 매출은 또 얼마인지 식당은 몇 개가 있는데 그 중에 백반집이 몇 개고 중식당이 몇 개며 날씨는 어떻고 100년 전 모습은 어땠고 500년 전 모습은 어땠는지 서울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서울에 있는 길들과 건물들 하나하나는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가로수는 누가 심었는지 서울에는 영국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까지 셀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모두 다 알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서울에 대해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마 많은 경우 이러한 접근을 직관적으로 거부할 겁니다. 따져볼 필요도 못 느낄 만큼 ‘어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혹은 ‘이렇게는 안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뭉그려 넘기지 말고, 이 직관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류한다면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앞서 제시한 것처럼 앎과 이해의 문제에 접근했을 때 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가, 왜 앎이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먼저 ‘서울’이라는 단위의 세분화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앎과 이해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의 설정이라는 비판이지요. 서울은 너무 크고 복합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단순한 정보 나열로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을 이를테면 ‘서울에 사는 미취학 아동의 수’와 같은 식으로 한정한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이해하고자 했던 대상에 대한 앎을 획득했으므로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개별 대상에 대한 앎과 이해는 확실히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불충분한 부분이 남습니다. ‘미취학 아동의 수’나 ‘서울시의회의 정당별 의석수’, ‘서울에서 하루에 쓰이는 자판기 종이컵의 수’처럼 서울을 구성하고 n개의 요소가 있다고 했을 때, 이를 모두 다 파악한다고 해도 서울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요컨대 부분과 전체의 문제가 남습니다. 전체는 단순히 부분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면 전체를 이루고 있는 n개의 요소를 모두 파악함으로써 전체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체가 단순히 각 부분의 기능 결합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면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고 필요하다면 그 부분을 또 더 작게 나눠 그것을 하나씩 파악해도 결국 전체에 대한 이해에는 도달할 수 없겠지요.

 

이런 불명확한 지점에서 두 번째 직관이 고개를 듭니다. 이런 식의 방법으로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지요. 물론 불가능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n개의 항목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부터 설령 그것을 파악한다고 한들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점까지 여러 생각이 있을 수 있지요. 이런 관점은 자연스레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허구나 환상으로 규정하고, 앎과 이해의 대상을 어떤 의도나 목적에 맞게 적절히 경험적 대상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이어집니다.

 

세 번째는 알 수 있는 것,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앎과 이해를 등치시킬 수 없다는 관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지 판가름하기 위해, 앎과 이해의 관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앎이 이해와 같지 않다면 이 문제에서 앎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뭐 나름의 의미야 저마다 나름대로 부여할 수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생각해봄직한 까닭이라면 역시 앎이 이해와 똑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해의 실마리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서울시 미취학 아동의 규모가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 숫자가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내는, 그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서울의 어떤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이때 여기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파악해야 하는 어떤 무엇이야말로 이해가 겨냥하는 진짜 목표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개별적인 앎이 드러내는, 지시하거나 암시하는 그 무엇이 바로 이해의 대상이라고요. 이렇게 본다면 앎은 이해의 가능성을 은밀하게, 그러나 직접적으로 제시합니다. 이해는 곧 앎을 통해 그 목표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관점은 사실 경험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개별적인 앎과는 다른 모종의 차원을, 이해의 고유한 차원을 전제합니다. 예컨대 서울을 이루고 있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과 다른, 그 경험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서울’이라는 고유한 실체를요. 경험 이면에 있는 그 무엇, ‘서울’이라는 대상의 실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실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 역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그런 실체 따위는 없다고 단적으로 잘라 말할 수 있겠지요.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경험 그 자체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실체, 혹은 고유한 차원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냥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전통을 가진 관점이기도 하고요.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철학의 지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찬찬히 살펴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중략) ...

 

 

오늘날에 이런 시도들은 대체로 불신의 눈초리나 냉소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실체에 대한 믿음이 거의 사라진 당대의 풍토에서 기껏해야 철 지난 기담 정도의 취급을 받기 일쑤지요. 벤야민은 소용돌이, 원천, 성좌 따위의 이상한 개념들을 통해 실체를 포착할 수 있다고, 그것도 어떤 개별적인 사태나 개별 사물 일반이 아니라 그것들을 아우르는 시대라는 총체를 포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시도했고요. 탁월한 성취를 이룬 작업들을 보면, 이면에 저마다의 방법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 역시 마찬가지고요. (벤야민의 성취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천천히 판가름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벤야민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면서 소용돌이와 원천, 성좌 따위의 개념, 베를린과 파리, 파사주와 같은 도시 공간, 언어와 번역의 문제, 예술과 비평에 대한 그의 사유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만들었던, 사용했던 방법도 함께 발견할 수 있겠지요. 잠깐이나마 텍스트에 몸을 담그고, (벤야민이 줄곧 강조하듯이) 지금 여기에서의 각자에게 어떤 영감이나 즐거운 자극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고요.

 

아마 읽는 곳곳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벤야민의 지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는 유대교의 전통이나 세계관, 독일 낭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 어느 하나 사실 한국인에게는 친숙한 것이 없습니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념의 재현에 사용되는 일군의 개념은 이념을 그 개념들의 성좌로서 현현한다”고 벤야민이 말할 때, ‘이념’이나 ‘개념’, ‘재현’, ‘성좌, ‘현현’ 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벤야민이 사용하는 맥락에서 가려서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또 <괴테의 친화력>에서 “모든 예술비평에 대하여 이 비평이 작품에 너무 가까이 가고 있다는 구실 아래 자신이 스스로 애호하는 친숙한 모조품을 그 비평 속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자들이 가하는 공격은 그만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때 어쩐지 익숙한 표현들이긴 하지만 하도 돌려서 말하는 까닭에 도대체 무슨 뜻인지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지점들도 있을 테고요. 문장 하나하나, 낱말 하나하나가 어떤 뜻인지는 해당 주제를 다루면서 함께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텍스트에 몸을 담그고 그 속에 머무르면서 함께 고민해보시지요. 그냥 뭉뚱그려 어렵다,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여기를 모르겠다, 어떻게 모르겠다를 아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모르겠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분명히, 무려 앎이니까요! 모른다는 것을 정확히 깨닫는 순간 모르는 것을 앎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반짝이는 것이지요. 남이 쓴 문자만 덩그러니, 그것도 몇 줄과 몇 장이 겹겹이 덮인 채 쌓여 있으니 읽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텍스트는 자신 안에서 끝없이 자신을 생산하며,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가 찍힌 그 순간에도 실은 끝난 것이 아니기까지 합니다.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문장이 둘 이상 이어지는 순간 행과 행 사이, 행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장은 쓰이는 순간 동시에 쓰이지 않은 무언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창문 좀 열어 줄래요?’라는 문장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자, 이 문장에 한 문장이 더해집니다. ‘피터가 모엔에게 말했다: 창문 좀 열어 줄래요?’ 이제 두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 둘은 어떤 사이일까요? 아침 식사 후에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일까요? 실내가 덥다는 느낌의 간접적 표현일까요? 한 문장을 또 붙여봅시다. ‘피터가 모엔에게 말했다: 창문 좀 열어 줄래요? 그것은 피터가 모엔에게 처음올 건넨 말이었다.’ 이런 간단한 상황, 간단한 문장에서조차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즉 텍스트로 변하는 순간 텍스트의 의미는 무한하게 확장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텍스트 자신이 쓰는 것을 한정함과 동시에 쓰지 않는 것들의, 쓰이지 않은 것들의 의미를 동시에 열어젖히니까요. 뭐 이런 창문 따위 간단한 문장조차 사정이 이런데, 저 두껍게 덥혀 있는 책들의 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텍스트에 몸을 담근다, 정도의 마음으로 즐겁게 문을 열 수 있다면 좋겠군요. 우선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입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3. 6.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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