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본질

February 7, 2018

“디오니소스는 나타나는 모든 것, <가장 모진 고통조차> 긍정하고, 긍정된 모든 것 속에 나타난다.”

“Dionysos affirme tout ce qui apparaît, «même la plus âpre souffrance» , et apparaît dans tout ce qui est affirmé.”

 

 

   

자 이렇게 해서 비극 드러내는, 비극을 통해 진정으로 드러나는 적대 관계가 밝혀졌습니다. 쌍방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만 물론 주인공은 디오니소스입니다. 대적하고 있는 상대가 강력할수록, 승리에 이르는 과정이 험난할수록 결국 더 빛나는 것은 주인공인 것처럼, 비극은 가장 강력한 적대자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적대자와 그 극복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변증법으로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다시 또 주의합시다.)

 

아폴론과 소크라테스, 예수라는 적대자를 거치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비극의 본질은 무엇보다 긍정하고 또 긍정하는 궁극의 긍정, 고통과 적대자를 포함해 모든 것을 긍정하는 복수(plural)의 긍정입니다. 니체가 제시하는 비극의 본질은 무엇보다 경쾌함입니다. 앞서 누차 강조한 바 있는 것처럼 한국어로 ‘비극’이라고 말할 때 ‘悲’라는 낱말에서 풍기는 슬프고 서럽고 애통한 느낌에 빠져서는 곤란합니다. 실제 비극에서 인물들이 마주치는 구체적인 역경과 고난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은 잠시 잊어도 좋습니다. 아니, 아예 그냥 완전히 잊어도 좋습니다. 비극이 제시하는 상황에서 연민이나 공포 같은 인간적인 해석을 떠올리는 것은 오직 우둔한 관객, 의학적 효과나 교화를 기다리는 병적인 청자들일 뿐이니까요. 비극이 열광적인 춤과 노래를 포함하는 축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니체는 무엇보다 비극의 긍정을 기쁨을 산출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순수한 기쁨 그 자체라고까지 말하지요. 여기에서의 기쁨은 고통의 승화나 정화, 승리나 노력의 보상, 불가능에 대한 체념의 대가(代價), 갈등의 극복이나 화해의 결과가 아닙니다. 니체는 예수가 상징하는 그리스도교의 이데올로기와 디오니소스가 제시하는 비극 사이에 놓인 유일한 문제를 간파합니다. 바로 현존(existence)의 문제입니다. 거창하게 들리는 철학 용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있다는 것, 무언가가 있다는 것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관한 문제니까요.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습니다. 책도 있고 신발도 있고 길도 있고 산도 바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있고 저들이 있고 그들이 있습니다. 많은 것이, 모든 것이 있지요.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그저 있는 것들이 있다는 말의 동어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니체는 철학의 가장 고귀한 질문으로 이 ‘있음이, 있다는 것이 과연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꼽습니다. 그리고 옛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 있다는 것,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을 그릇되거나 불완전한 것처럼, 유죄인 것처럼, 정당화되어야 하는 부정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 자신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무엇인가로부터 의미를 획득해야 하고 다른 무언가로부터 의미를 보장받아야만 하는 무엇으로 모든 것을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신이 필요하고, 목적이 필요하고, 속죄가 필요하고, 정당화가 필요하고,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공허하고 허무한 무엇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니체가 보기에는 정반대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에 굳이 존재하는 이유나 구원이 필요한 까닭은 전혀 없습니다. 존재가 있고, 힘의 역사가 있을 뿐이지요.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 혹은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나 힘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지요, 이 문제는 들뢰즈의 경로를 따라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비극의 본질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 상태 그대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설령 누군가의 관점에서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해명되어야 하고 정당화되어야 하고 속죄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세계 속에서, 세계는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다시 말해 존재하는 것들이 자신 안에서 고유하게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운동한다면, 그것들 각각을, 혹은 그러한 사태 일반을 기쁨이라고 명명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사자와 염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염소의 일방적인 고통이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편협한 시각일 뿐입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니체를 심각하게 오해할 수 있는 (예컨대 먹이사슬의 일차원적 생존경쟁으로 오인된 다윈주의와의 연관성을 즉각 떠올리는) 먹음직스러운 빌미를 제공합니다만, 현존의 기본 속성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돌려놓음으로써 니체는 자신이 철학의 가장 고귀한 물음이라고 판단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합니다.

 

… (후략)

 

 

 

2018. 2. 7.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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