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발전

January 24, 2018

“따라서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은 전체적인 방식으로 원초적 모순, 그것의 디오니소스적 해결과 이 해결에서의 극적 표현으로 정의된다.”

“Voici donc comment le tragique dans son ensemble est défini dans l’Origine de la tragédie: la contradiction originelle, sa solution dionysiaque et l’expression dramatique de cette solution.”

 

 

   

앞선 내용에 이어서 들뢰즈는 니체가 제시하는 비극의 진정한 의미에 주목합니다. 삶의 해결이나 정당화가 아닌 절대적 긍정의 가치를 주장하면서요. 니체가 말하듯 절대적 긍정의 가치로서 비극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극에 대한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필수입니다. 예컨대 ‘그는 마치 비극의 주인공 같았다’라고 할 때 이 말에 따라붙는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 혹은 ‘그녀는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라는 말 뒤에 따라붙는 고통과 불행의 관념, ‘그들은 비극과 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는 표현에 끈질기게 따라붙는 갈등과 대립의 표상, ‘이어지는 비극 속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상황에서 연상되는 위대하고 영웅적인 이미지 따위에요.

 

니체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허구이거나 어떤 현상에 대한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니체가 비극을 통해 제시하고 했던 의미를 다시 구원하기 위해 우선 비극과 비극적 문화를 구분합니다. 이에 따르면 비극은 무엇보다 ‘모순을 재생산하고 해소하는 것’, ‘모순을 재생산하면서 해소하는 것’, ‘원초적 기원으로 회귀해서 그 속에서 모순을 해소하는 것’과 구분됩니다. 들뢰즈는 이들 각각을 칸트, 쇼펜하우어, 바그너가 상징하는 근대의 대표자들이 가진 특징이라고 진단합니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모순의 해소를 지향하는 것은 비극적 문화의 계승자인 근대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비극에서는 애당초 모순이라는 관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순이니, 운명이니, 고통이니 하는 잘못된 관념 아래에서 진정으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은 변증법적 의미에서, 헤겔적인 맥락에서 부정과 지양(aufheben)에 의존하고 있는 모순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세계에, 생에 존재하는 ‘힘의 다수성’으로서의 ‘차이’라는 속성이니까요. 비극을 통해 니체가 제기하는 비판은 궁극적으로 생이 왜 모순으로, 해소되거나 극복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마치 이 과정을 통해 의미를 부여받고 정당화 되어야만 하는 무엇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니체는 여전히 비극의 완성이 개별화의 종결로 여겨지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 아래에서 비극적 고통이 개별자를 능가하는 쾌락을 통해 해소된다는 측면에서만 이해된다는 사실에 통탄합니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비극(적 상황)에서 ‘개별자는 인격보다 우월한 비인격적 존재로 변화되어야만 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진정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개별 인격체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장엄한 운명을 완수하는 것이나 몰아적 열락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니체가 제시하는 변화의 종착점은 오히려 모든 것을 긍정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인 어떤 상태 존재자를 가리키는 것에 가깝지요. 단순히 아폴론적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대립이라는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는 인물, 혹은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낭만적 열정 속에 분투하는 인물은 니체가 제시하는 비극의 개념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정주하지 않는 삶과 선행하는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서 ‘유목주의(nomadism)’를 주장할 때, 단순히 히피 시위대가 자신을 마치 ‘구루(guru)’처럼 지지하는 것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려 볼 수 있겠지요. 비극와 변증법이 때로 유사한 외관을 갖는 것처럼, 전혀 다른 심층은 때로 유사한 표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흔히 기성의 질서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이는 히피가 실은 누구보다 특정한 ‘코드’에 사로잡혀 고집스레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이 옳다, 이것이 새로운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습일 수 있는 것처럼요. 니체에게 있어 비극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현상의 외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힘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지요.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자신이 처음 <비극의 탄생>을 쓸 당시에 발견했던 ‘완전히 벌어져야 하는 어떤 대립’에 대해 입을 엽니다. 비극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대립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요. 이에 따르면 비극 속에서 진정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입니다. 앞서 니체는 비극이 궁극적으로는 디오니소스에 의해 지배되는 경탄할 만한, 그리고 일시적인 (아폴론적인 것과의) 화해라고, 또 비극의 유일한 인물은 디오니소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적이지도, 아폴론적이지도 않은 무엇이며, 비극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적대자입니다. 비극을 죽이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지요. 니체가 비극의 적대자로서 제기하는 소크라테스의 상이 실제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과, 혹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얼마나 부합하는가, 니체가 소크라테스를 비극의 적대자로 정립할 때 실증적으로 소크라테스라는 고증했는가라는 문제는 적어도 니체의 비극론에 있어서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것보다는 니체가 소크라테스라는 개념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또 어떤 사태를 파악하고자 했고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더 좋은 방법이겠지요.  니체에 따르면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야말로 삶을 관념에 대립시키고 관념에 의해서 삶을 판단하며 삶을 관념에 의해 판단되고 정당화되고 대속되는 무엇으로 바꾼 장본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따르면 삶은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긍정할 만한, 욕구할 만한 무엇이 아니라 관념에 의해 재단되고 부정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오로지 그 과정을 통해서만 용인될 수 있고 가치를 획득하는 무엇으로 전락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야를 최초의 퇴폐적 인물이며 퇴락의 천재(génie du Decadance)이자 ‘비극적 인간’의 유일하고 참된 적대자인 ‘이론적 인간’으로 호명하지요.

 

 

… (후략)

 

 

 

2018. 1. 24.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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