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문제

January 17, 2018

“니체의 주석가는 어떤 구실을 가지고서도 니체의 사고를 <변증법화 시키는 것>을 특히 피해야만 한다.”

“Le commentateur de Nietzsche doit éviter principalement de «dialectiser» la pensée nietzschéenne sous un prétexte quelconque.”

 

 

   

앞서 들뢰즈는 변증법을 니체 사상의 가장 중요한 적으로 제시한 바 있지요? 일견 비슷하게도 보이는 변증법과 니체의 사유를 보다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 그리고 후자가 전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 들뢰즈는 비극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비극은 니체가 자신의 첫 공식 저술로 인정하는 <비극의 탄생>부터 최후의 원고들에 이르기까지 니체의 사상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데요, 들뢰즈는 니체 자신 역시 젊어서 집필했던 자신의 비극론에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여기에 보완을 시도한 점 등을 인용하면서 비극에 관한 니체의 사유를 새롭게 구성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세 단계에 빗댄 바 있습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의 의미도 모른 채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 어떠한 굴레도 거부하고 속박에 대해 분노하는 사자, 망각과 놀이, 언제나 새로운 놀이, 마치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와 같은 어린아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들뢰즈가 니체를 다룬 또 하나의 저서인 <니체>의 (세미나에서 함께 읽는 책보다 3년 뒤인 1965년 출판된 이 책은, 흔히 <들뢰즈의 니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두에는 이에 관한 들뢰즈의 흥미로운 언급이 등장합니다. ‘사자는 낙타 안에 현존해 있고, 어린아이는 사자 안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 안에는 비극적인 결말이 존재한다’는 구절입니다. ‘~ 안에(dans)’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대구를 이루는 이 문장을 곱씹어본다면 결국 들뢰즈는 비극을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지요.

 

니체의 비극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극이라는 말이 갖는 어쩐지 무겁고 불행한 듯한 어감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설령 들뢰즈가 종종 통속적인 관점에서 불행이라고 칭할 수 있을 법한 니체의 개인사를 환기하는 순간에조차 니체에게서도, 들뢰즈에게서도 비극은 불행이나 슬픔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행과 슬픔을 위로하는 척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변증법이야말로 불행과 슬픔의 주범이지요. 예컨대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상기해볼 수 있겠군요. 니체는 기독교가 구원을 말하면서 실상은 구원이 아닌 죄를 주입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구원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구원의 대상이 되는 죄가 먼저 있어야만 하니까요, 죄가 구원의 조건인 셈입니다.

 

비극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들뢰즈는 변증법이라는 혐의를 니체에게서 벗기기 위해, 비극에 대한 니체의 사유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합니다. 니체는 1888년 <이 사람을 보라>에서 <비극의 탄생>을 회고하며 1872년에 발표했던 이 저술이 지닌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 언급합니다. 예를 들면 ‘바그너류’에 대해 지나치게 희망을 부여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몇 가지 정식에서 ‘불쾌한 헤겔적 냄새’를 풍기는 것 등과 같은 문제들이지요. <비극의 탄생>의 발표 이후 니체는 곳곳에서 비극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밝혔습니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삶의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하는 것’,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도 제 구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를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명명하면서, 비극의 진정한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던 공포와 연민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파괴까지도 포함하는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그 자체’에 있다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누구도 비극의 이러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최초의 비극적 철학자로 선언하지요.

 

니체의 비극론을 변증법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니체가 말하는 삶의 고통이 마치 변증법이 말하는 ‘모순’에서 비롯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과, 이러한 모순이 서로 대립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의해 지양되어 최고의 예술 형식인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두 사태를 해명할 필요가 있겠군요. 지난 시간 변증법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을 늘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들뢰즈가 니체가 변증법에 대립시키는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종종 유사한 외관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변증법과 니체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니체만큼이나 변증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이러한 대립은 앞으로도 수동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 능동적인 힘과 반응적인 힘 등을 다룰 때 반복해서 등장할 겁니다.)

 

<비극의 탄생>에서 생의 고통은 일견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원초적 통일과 (아폴론적인) 개별화 사이의 모순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삶은 고통 받고, 다른 무언가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해야하는 요청에 직면합니다.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정당화의 과정, 대립하는 두 가치의 최고의 형태로 자신과 서로를 지양해 도달하는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되고요. 앞서 변증법을 다루며 변증법적 세계관의 중요한 속성으로, 궁극적으로 타자와 차이가 존재할 수 없는 단일하고 유일한 절대적 전체성의 세계라는 것과, 이것이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으로, 즉 모순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부정하는 과정에서 이를 극복하고 다시 통일성을 회복하는 지양 운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언급했지요? 들뢰즈는 니체의 초기 비극론에 대한 오해를 두고 ‘삶이 기독교적 변증법의 범주의 보호 아래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물론 이것은 니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다릅니다. 들뢰즈가 진단하는 것은 니체의 생각이 아니라 니체의 생각에 대한 오해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들뢰즈에 따르면 우선 니체가 말하는 생의 고통은 변증법이 말하는 모순과 다르고, 니체의 비극론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은 서로 직접 대립하지 않습니다. 변증법적인 모순도 아니고 변증법적인 대립도 아니다, 가 핵심입니다. 헤겔이 제시하는 것처럼 세계가 거대하고 동일한 단 하나의 전체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세계 속에는 당연히 나와 나 아닌 것이 있을 테고, 또 그렇게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하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사태, 즉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사태는 변증법적 모순의 상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서로 다르다는 사태에서 본원적으로 연유하는 갈등과 대립 또한 변증법적인 대립이라고 볼 수는 없고요.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것들, 조금 더 니체식으로 표현한다면 힘들의 다수성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은 변증법에서의 대립과는 다릅니다. 힘들은 서로를 대상으로 갖지만, 서로를 지양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생의 고통에 대한 아폴론적 해결은 디오니소스적 해결에 대한 부정이 아니고, 또 디오니소스적 해결이 아폴론적 해결에 대한 부정이 아닌 것처럼요. 설령 표면적 차원, 즉 경험적 현실적에서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순수한 존재의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서로 다른 것 각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에 존재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관점에서 비극을 변증법적 지양의 결과물이 아닌,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경탄할 만한 동맹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고요.

 

 

… (후략)

 

 

 

2017. 1. 17.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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