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December 6, 2017

“만약 우리가 사물을 소유하는 힘, 그것을 이용하는 힘, 그것을 독점하는 힘, 혹은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 - 인간적인 현상, 생물학적 현상, 또는 물리적 현상조차도 - 의 의미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Nous ne trouverons jamais le sens de quelque chose(phénomène humain, biologique ou même physique), si nous ne savons pas quelle est la force qui s’approprie la chose, qui l’exploite, qui s’en empare ou s’exprime en elle.”

   

 

 

계보학이라는 니체의 방법을 통해 가치에 대한 문제를 먼저 제기한 뒤, 들뢰즈는 의미의 문제를 이어서 제기합니다. 앞서 들뢰즈는 가치와 의미의 문제를 철학에 도입하는 것이 니체의 기획이었다고 진단한 바 있지요. 가치의 문제를 먼저 살펴봤으니 뒤이어 의미의 문제를 짚어보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일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짧은 검토만으로 니체의 기획과, 철학에서 가치와 의미라는 문제가 전부 파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치와 의미라는 문제는 니체 사상의 핵심이자 들뢰즈 자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데요, 뿐만 아니라 현대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교착점을 이루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들뢰즈를 따라 이 문제를 책 전체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되풀이해서 살펴보게 될 겁니다.

 

‘의미’라는 표현은 일상에서도 종종 쓰입니다. 어떤 행동에 대해 특정한 효과나 행동에 따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때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말이나 글, 행동 등에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때 ‘의미심장’ 하다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일반적으로 현대 철학은 언어를 포함해 넓은 뜻에서 기호가 갖는 기능과 내용을 의미라고 정의합니다. 기호의 진위와 수행적 의미를 탐구하는 기호학부터 그것의 토대로서 기호와 지시대상의 관계, 기호라는 체계의 작동 원리를 다루는 분석철학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지요.

 

한편 현대 유럽 철학은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의미의 문제에 접근합니다. (특히 들뢰즈가 그렇지요.) ‘비가 내린다'는 문장을 예로 들어 봅시다. 진위의 관점에서 이 문장은 실제 현실에서의 사태, 즉 지금 비가 내리는지 아닌지에 따라 옳고 그름이 결정됩니다. 정말로 비가 오고 있을 때 그 사태를 진술하기 위해 ‘비가 내린다'고 표현한다면 참인 문장, 즉 기호가 사태를 올바르게 진술하는 문장이 되고 반대의 경우 거짓인 문장, 즉 기호가 사태를 올바르게 포착하지 못한 문장이 되겠지요. 수행적 차원에서 이 문장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비가 오니까 창문을 닫으라는 의미나 옥상에 널어 둔 빨래를 걷으라는 의미를 지닐 수도, 혹은 나들이 계획을 취소해야 겠다는 의미를 지닐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인간의 삶이 이렇게 진위와 수행의 차원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혹은 지시관계와 수행관계만으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누군가 어떤 대상을 ‘의미 있게’ 여긴다고 했을  때, 여기에서의 의미는 (그가 그 의미를 합당하게 부여했는지와 무관하게) 분명 지시관계나 수행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차원에 존재합니다. 즉 ‘의미’를 그 자체로 다루기 위한 별개의 차원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쉽게 생각한다면 가장 흔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일상에서 ‘의미가 있다'고 표현하는 상황을 떠올리면 거의 비슷합니다. 예컨대 누군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무엇이,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되는 모종의 사태를 생각해볼까요? 여기에서 이름을 부르는 행위와, 몸짓이 꽃으로 바뀌는 사건은 단순히 지금 밖에 비가 내린다는 사실이나 어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는 일입니다.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사태의 의미는 그 사태를 표현하는 기호의 진위나 수행성만으로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세계 속 다른 현상들과 구분되는 유일한 현상, 단독적인 의미를 갖는 독특한 분절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들뢰즈가 니체를 통해 의미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바로 이 사건의 공간, 의미의 차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건을 개념화하기 위한 접근은 비단 들뢰즈만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사건을 사유하기 위한 접근은 들뢰즈에 앞서  현대의 문턱에서 이루어진 바 있지요. 크게 보아 분석철학, 언어철학으로 이어지는 신실증주의와 현상학, 역사철학 등 세 가지 관점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푸코는 이들 세 접근이 모두 사건의 고유한 차원을 포착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신실증주의는 사건을 마치 세계 속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함으로써 사건을 물질적 차원에 한정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의미는 별도의 차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어떤 사건에 귀속하는 속성으로 변형되지요.

 

이에 앞서 현상학 역시 의미의 문제를 다룹니다. 현상학은 현대 유럽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커다란 줄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유에 영향을 미쳤는데요, 푸코는 현상학 역시 의미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고 진단합니다. 그에 따르면 현상학은 의미를 사건의 차원에서 직접 다루는 대신 자아나 의식 같이 의미를 위한 별도의 차원을 상정한 뒤 그 곳에 의미의 자리를 할당합니다. 때문에 의미는 객관적인 세계 속에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주관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지요.

역사철학 역시 의미의 문제를 온전히 다루는 것에 실패합니다. 가깝게는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 멀게는 헤겔적 전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접근은 사건을 시간의 배열 속에 가둠으로써, 즉 현재를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한정함으로써 사건을 동시대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만듭니다. 이것은 사건과 그것의 의미가 시간 속에 거의 무한히 유예되는 결과로 이어지지요.

 

자, 그렇다면 이렇게 사건의 의미를 포착하는 데 실패하는 세 가지 접근이 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세계 그 자체에 대해서 외에는 무엇도 사유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세계의 의미를 지시관계 속으로 완강하게 욱여넣는 관점과, 의미작용은 오직 의식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을 항상 자아에 결부시키는 관점, 사건의 의미는 오직 시간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간을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를 편성하고 도래하지 않은 시간 속으로 사건의 의미를 유예하는 관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연하게도 들뢰즈는 이러한 관점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니체 역시 마찬가지고요.

 

 

… (후략)

 

 

 

2017. 12. 6.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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