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August 31, 2017

오늘 밤의 기본 규칙입니다. 우선 굳이 자기소개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물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름이든 나이든 직업이든 취미든 뭐든 밝히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당연히 말릴 까닭은 없겠습니다만,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 하루 밤 거니는 사이에 일부러 돌아가며 이름을 주고받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읽는 것과 함께 걷는 것, 오직 이것 뿐입니다.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는 것은 마치 한 도시를 함께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도시라고 해도 여행 중 서로 다른 골목과 다른 풍경을 지날 수도 있고, 같은 길을 지날 때에도 각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를 수 있지요. 누군가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새를 볼 때 누군가는 저들의 표정을 살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사람이 아닌 건물들이나 도로의 신호 체계를, 좌판 상인의 매대를 유심히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모종의 사정이 있는 상황이라면 화장실이나 음식점을 다급히 찾느라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수도 있겠군요. 우리는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는 첫 문장과,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는 마지막 문장 사이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함께 읽었지만, 그 사이에 각자의 눈길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모두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칼비노는 도시는 공간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골목 가로등의 높이와 그 가로등에 목매달아 죽은 이의 대롱거리는 다리의 관계, 그 가로등 앞쪽 난간에 묶여 있는 줄과 여왕의 결혼식 행렬을 장식했던 꽃 줄의 관계, 난간의 높이와 새벽녘 간통을 저지르다 난간을 뛰어넘는 남자의 추락 사이의 관계, 난간 옆 창문 홈통의 기울기와 바로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당당한 걸음걸이 사이의 관계가 바로 그 도시를 보여준다고 말하면서요. 우리 이야기도 비슷할 겁니다. 하나의 소설이지만 그 속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교차하기 마련이고, (쿤데라처럼 매력적인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대체로 이건 틀림없습니다.) 그 속에서 각자 발견한 것들 또한 분명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자 그러니 서로가 누군지는, 일부러 자신에 대해 말하지는 맙시다, 적어도 오늘 밤은요. 대신 각자가 보고 온 것을 말하면 됩니다. 당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당신을 사로잡았던 것이 무엇인지 꺼내어 놓는 것이 어쩌면 ‘나는 누구입니다’라고 직접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서로에게 알게 해줄 테니까요.

 

자 여기에서 두 번째 규칙입니다. 각자가 보고 온 것을 말하기, 두 번째 규칙은 이것입니다. 말하는 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너와 나 사이의 순서도, 이야기의 순서도 상관 없습니다. 물론 소설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만 이야기도 꼭 그래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체계에 따라 논리적으로 펼쳐지는 어떤 사상이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모인 것도,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서사를 쫓아가며 사건의 선후를 따지기 위해 모인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방식들 또한 이야기를 즐기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겠지요, 굳이 따진다면 꽤나 중요한 방법들일 겁니다. 하지만 앞서 첫 번째 규칙을 소개하며 언급했던 것처럼, 소설의 밤에는 읽는 것과 대화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제한도 만들지 않고자 합니다.

 

오늘 밤 우리는 농장에서 트럭을 운전하는 토마시의 모습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고, 캄보디아 국경을 행진하는 무리 속에서 프란츠를 불러내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사비나의 몸 위에서 눈을 감는 프란츠의 속내를 짐작해볼 수도 있고, 의외로 소설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토마시의 외모를 상상해볼 수도 있겠지요. 테레자의 사진기나 사비나의 모자, 둡체크의 연설이나 카레닌의 크루아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인 프라하라는 도시나 그 시기 유럽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볼 수도 있겠군요. 소설 속 이야기에 앞서 영원회귀에 대한 니체의 사유나 키치에 대한 쿤데라의 통찰을 먼저 곱씹어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쿤데라 자신은 탐탁치 않게 여길 것 같습니다만) 밀란 쿤데라라는 소설가에 대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 밤 우리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겠지요. 요컨대 무엇이든, 어디서든 이야기는 가능합니다.

 

일본의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어느 대담에서 소설은 아무렇게나,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더 중요한 발언을 이어서 말합니다. 소설의 시작은 어떤 모습이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이지요. 소설은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끝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요.) 소설 뿐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떠올려 봅시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종로나 을지로 어느 골목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목멱산이나 북악산 어느 봉우리에서 출발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천변이나 옛 나루터에서 시작하는 건 어떻습니까. 압구정이나 잠실도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장소일 텐데요. 로데오거리와 롯데월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큼 한명회의 별장이나 뽕밭의 누에에 대한 이야기도 가능하겠지요.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 하리란 법도 없습니다.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이나 LA의 한식당 서울곰탕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해볼까요? 당연하게도 공간에 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대학생 K나 버스 기사 Y, 배관공 J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요즘 많이 출몰한다는 야생화된 유기견 무리나 지난 여름 (네, 어느새 ‘지난’ 여름입니다 벌써.) 대발생했던 하늘소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읽은 소설을 말할 때 꼭 이야기의 꽁무니를 쫓아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야기의 배열을 정직하게 쫓아가는 것은 혼자 읽을 때 끝내는 걸로 하지요. 이제 소설 속에서 각자가 발견한 길들을 소개할 차례입니다.

 

서론이 길었군요. 중요한 것은 읽는 것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짚으면서 규칙 소개를 마치지요. 이제 시작입니다, 소설의 밤.

 

 

… (후략)

 

 

 

2017. 8. 31.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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