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quid Modern World: Interregnum

August 11, 2017

바우만이 유동하는 세계라는 개념으로 당대를 설명할 때, 어쨌거나 그가 생각하는 세상은 아직은 근대인 것으로 보입니다. 유동하는 근대는 흔들리긴 하지만 어쨌든 아직은 근대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대에 대한 질문 또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멀쩡하던 근대가 왜 요동치는 걸까요?

 

인간의 합리성과 이에 대한 믿음을 근간으로 인류를 계몽하고 세계의 신비를 투명하게 밝히고자 했던, 그리고 이러한 기획에 있어 꽤나 성공을 거두던 근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고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고 기댈 수도 없는 흔들리는 물결처럼 변한 걸까요? 혁명과 전쟁이라는 실패 때문일까요? 물론 크나큰 희생과 나름 통렬한 반성이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당대의 세계를 이루는 근본 규칙들이 근대의 그것과 그리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심지어 일각에서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근대성의 과잉이 아닌 결핍에 기인한다고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근대성이 문제라면 ‘너무 합리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고, 따라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과제는 보다 이러한 문제들을 더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지요.

 

오늘 함께 읽은 편지에서 바우만이 인용하는 이탈리아의 사상가 그람시의 생각을 빌리면 근대 세계가 왜 요동치는가에 대한 해법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람시는 그야말로 격변기를 살았던 사상가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반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공공연히 유럽을 배회하던 시기이자 유럽에서 사회 개혁을 위한 노동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이며, 소비에트 혁명의 여파가 유럽을 강타한 시기이자 전례 없는 규모의 세계 대전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 또 곳곳에서 파시즘이 창궐하던 시기이기도 하지요. 그람시는 1926년 정당 활동 도중 무솔리니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2년 후 열린 재판에서 그람시의 담당 검사가 ‘우리는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 놓아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유명한 일화지요. (판사는 실제로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합니다.)

 

그람시는 30대 중반 체포된 이후 남은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1926년 체포 및 정식 재판 후 수감 된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복역했고, 감형으로 석방된 지 사흘 뒤에 건강 악화로 바로 사망했으니까요. 그람시는 무엇보다 그가 수감 중 작성한, 그의 사후 세상에 공개된 원고로 유명합니다. 수감 중 그람시와 가깝게 교류했던 그의 처형은 그람시가 옥중에서 작성한 글을 그람시 사후에 출간합니다. 흔히 <옥중수고(Quaderni del Carcere)>라고 불리는 그람시의 저작이지요. (한국에도 일부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저작에서 그람시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한 흥미로운 사상을 전개합니다. 예컨대 헤게모니와 국가 장치,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등의 문제에 있어서요.

 

어쨌거나 그람시의 독특한 상황은 (그 개인에게는 지독한 불행이었겠지만) 당시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소비에트의 레닌이나,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헝가리의 루카치 등과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수감이라는 개인적인 상황이나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는 이탈리아의 정세 속에서, 그람시는 당시의 사상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과는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람시는 왜 혁명이 필연적인가가 아니라 왜 혁명이 실패하는가,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지요. 자본주의라는 당대의 사회를 문제화하는 관점 또한 독특합니다. 그람시는 당시 대부분의 사상가들과는 달리 무엇이 이 사회의 한계이자 문제점인가, 즉 무엇이 자본주의의 약점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런저런 한계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현행하는 체제와 질서가 지속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즉 무엇이 자본주의의 강점인가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지요. 그람시는 <옥중수고>를 통해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합니다. 여기에는 투옥 이전 그가 겪은 정치적인 경험과 코민테른의 주류 사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람시의 이러한 접근은 추후 마르크스주의에 사상적 전회를 가져온 경제주의 비판으로 정식화되고요.

 

그람시의 시선을 따라 그람시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오늘 밤 우리의 시간을 초과하는 일이겠지요, 우선 우리는 길잡이 바우만을 따라 유동하는 근대라는 우리의 세계로 다시 눈을 돌립시다. 그람시가 남긴 원고에는 당대의 위기를 진단하는 (그러고 보면 철학이니 사상이니 죄다 자기 시대의 위기에 대해 주구장창 떠들 뿐, 뭔가 긍정적으로 세상 참 좋구나, 하는 관점은 극히 드문 것 같군요.) 그람시의 흥미로운 통찰이 담긴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공위시대(interregnum)’에 관한 구절이지요.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위기는 정확히 말해 낡은 것은 소멸해 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공위시대에는 매우 다양한 병리적인 증상들이 출현한다’고 적습니다. 본래 법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인 공위시대에 그람시는 보다 포괄적인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람시에 앞서 레닌은 ‘지배자들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고 피지배자들이 더 이상 지배 받으려고 하지 않는’ 상황을 혁명적 상황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그람시는 이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합니다. 즉 기존의 사회 질서를 조형하는 법적, 제도적 틀이 더 이상 자신의 효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것을 대체해야 할 새로운 틀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 또는 여전히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는 상태를 공위시대라고 규정하고, 당대의 위기의 원인을 바로 이러한 시대적 특성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근대라는 세계를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바로 근대의 질서는 힘을 다했지만 아직 새로운 시대의 질서는 도래하지 않은 시대라고요. 근대를 대체할 새로운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세상은 여전히 근대적이지만, 한편으로 근대는 더 이상 세계의 작동 원리이자 규칙으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은 표류하듯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 (중략) …

바우만 만큼이나 유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와 울리히 벡은 오늘날 우리 세계를 ‘위험사회(risk society)’로 정의합니다. 바우만이 ‘유동성(liquidity)’을 현대 사회의 근간으로 포착했던 것처럼 이들은 ‘위험’을 현대 사회의 근간으로 제시하지요. 기든스가 주로 현대 사회가 점점 더 미래의 변화에 민감해지면서 안전의 확보를 중요시하는 만큼 위험에 대한 관념 또한 예민하게 변화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면, 벡은 한 사회가 자신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위험 요소나 불안정성을 위험이라는 개념 아래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경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벡에 다르면 세계의 우연성과 무작위성에 대한 의식과 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의식이라는 일종의 모순적인 이중성이 근대를 이루고 있으며, 위험이라는 개념은 이 모순을 매개하는 핵심입니다. 세계의 우연성과 무작위성을 위험으로 환산해서 예측 가능하고 다룰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나, 어디에나 도사리는 위험은 결코 확정적으로 상수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확정할 수 없는 위험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세계, 어디에서도 확실한 안전을 확보할 수 없는 세계는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방법과 경로는 상이한 사상들이 현실 어딘가에서 조우하는 장면은 퍽 흥미롭습니다.

그람시가 미래를 전망하는 방법으로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유동하는 세계라는 현상의 단서를 공위시대에서 찾을 때, 결국 시대의 전망은 새로운 시대를 향할 수밖에 없겠지요. (역사라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면 섣불리 기대하며 조급할 것도, 또 마냥 유예하며 방기할 일도 아닐 겁니다. 늘 깨어 있으라는 어느 종교의 격언을 떠올려 봄 직 합니다.) 새로운 시대, 즉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현재 어떤 노래들을 부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 미래는 더 많은 사람이 그리는 꿈의 모습일 테니까요. 꼭 그 꿈과 같은 모습이 아닐 수도, 또 꿈의 실상이 꿈에 그리던 모습과 크게 다를 수도 있겠지만 미래는 함께 꾼 꿈의 언저리 어디쯤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그람시의 전언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그람시는 미래를 예측하는 강력하고 유일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또한 미래가 바람직하지 않은 경로로 흐르지 않도록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는 것이라고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8. 11.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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