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quid Modern World: Inequality

August 4, 2017

예란 테르보른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스웨덴 출신의 사회학자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폭넓게 연구하고 있지요. 국내에는 2013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주최한 ‘삶과 인류의 후기근대적 대전환’이라는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뭐 사실 널리 알려졌다고 하기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서로 조금 민망한 수준일 텐데요. 요즘 세상에 누가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이데올로기 따위를 연구한다는 유럽의 학자에게.

 

어쨌거나 그가 속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사회학과 홈페이지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친절하게도 그가 최근에 하고 있는 작업 분야에 대한 안내를 제공합니다. ‘그는 최근 이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he is currently working on)’ 항목 아래에서 몇 가지 주제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최근 그는 불평등의 지구적 확산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는군요. 사실 그는 꽤 오래 전부터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2013년 학술대회에서 그는 ‘가로막힌 삶과 요절: 삶의 새로운 불평등’이라는 주제를 발표했는데, 이에 앞서 테르보른은 불평등을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의 ‘대량 학살(killing field)’에 빗대어 강도 높게 비판한 <불평등의 킬링필드>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2014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요절'이라고 하면 어쩐지 낭만적인 느낌이 들지만 테르보른이 생각한 요절의 의미는 말 그대로 '때 이른 죽음(early death)', 죽지 않아도 될 죽음을 가리키지요.

 

흔히 불평등이라고 하면 경제적인 소득 격차나 부의 분배의 문제를 떠올리기 쉽지만, 테르보른에 따르면 불평등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근대 이후 비교적 최근까지도 인간의 건강 상태나 수명이 다양하다는 사실, 즉 아픈 사람도 있고 건강한 사람도 있고 남들보다 일찍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은 대체로 인간의 타고난 운이나 개인적인 특성(예컨대 유전이나 생활 습관 따위의)에 따른 차이로 여겨졌지만, 테르보른은 기대 수명이나 건강차는 인간이 만든 불평등이라는 경험적 증거가 쌓여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학과 사회학의 연구에 따르면 한 국가 내에서도 소득이나 재산 수준의 차이에 따라 건강과 기대 수명이 뚜렷하게 달라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국가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위 ‘잘사는’ 나라의 국민들과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 사이에 건강과 기대 수명이 크게 다르니까요.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까요? 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아무도 기울이지 않는 동안, 마치 캄보디아에서 특정 집단을 몰살시켰던 대량 학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때 이른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지요.

 

오늘 함께 읽은 편지에서 바우만이 테르보른을 인용해 지적하는 것처럼, 오늘날 불평등의 문제는 비단 물질적인 불평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방금 언급한 것처럼 실질적인 생명 유지라는 차원에서도 불평등(vital inequality)의 문제는 존재하고, 나아가 테르보른이 실존적인 불평등(existential inequality)이라고 명명한 불평등도 있습니다. 테르보른은 실존적 불평등을 ‘인간성의 불평등한 배치(unequal allocation of personhood)’라고 정의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불평등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특정한 부류에 속하는 개인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고 이들의 자유를 방해합니다. 예컨대 ‘나이도 어린 녀석이 버릇없이 어른에게 말대꾸한다’는 말 이면에는 ‘나이 어린 사람’이라는 특정한 인격(personhood)을 분류 기준으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개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없는 자리를 할당(allocation)하는 실존적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불평등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렇게 확장했을 때, 부의 분배라는 문제를 넘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지평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위계라는 불평등, 젠더라는 불평등, 가족 내에서의 불평등 따위의 문제들을요. 이렇게 본다면 단순히 불평등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 즉 무엇이, 어떤 것이 불평등한가를 느끼고 판별하는 감각과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테르보른의 주장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건강과 수명은 운이나 개인적 특성에 달린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그것을 불평등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처럼요.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불평등은 공식적으로 범주화되지 않은 개념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이전 시대에도 불평등이 존재했고 (어쩌면 더 심한 불평등이 있었겠지요.) 이에 대한 많은 개선도 있었습니다만 특정 현상을 불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날의 기준에서 돌아본다면 불평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문제들이 불평등 그 자체에 대한 접근이 아닌, (18세기 이래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자유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다뤄졌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겁니다. 예컨대 참정권의 점진적 확장은 ‘선거권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아닌 ‘투표할 수 있는 자유의 확산’이라는 과정 속에 이루어졌고, (아직 갈 길이 먼) 여성의 권리 신장 또한 ‘성차에 따른 불평등’이 아닌 사회 제반 영역에서 모든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보편적 인권의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한 접근이라는 것이지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별 차이가 없는 게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 범주화, 혹은 사태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사태를 자세히 들여다 볼 때 종종 중요한 차이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불평등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현대적인 범주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불평등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역사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거의 지각되지 않았으며, 불가피한 사회적 현상이나 노력이나 자격에 따른 정당한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의외로? (불평등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노예제는 기원을 정확히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인류 문명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비교적 가까운 과거까지도 성행했지요. 그나마 노예제의 폐지도 평등이나 인권이라는 범주가 아닌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시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시장 논리라는 범주에서 추동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겁니다. 또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실상을 다루면서 위고는 절대 다수 인민의 절망적인 생활상을 ‘비참(miséables)’이라는 범주로 바라볼 뿐, 계급이나 집단 간, 혹은 인간 개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이라는 관점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아요.

 

요컨대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지각하는 감수성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평등하지 않다,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평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곧장 정의와 기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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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불평등이라는 범주가 현대 사회를 다루는 중요한 틀로 등장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불평등을 빈곤의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의 부조리와 모순을 밝히고 극복하는 것을 학문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마르크스가 공식적으로 선언했을 때, 그의 시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즉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문제를 향하고 있었으니까요. 마르크스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의 노동 착취로 인한 분배 불평등을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갈등으로 규정했으며, 냉전 체제를 지나면서도 분배 정의 문제는 사회적 정의를 다루는 핵심 범주로 기능해 왔습니다. 그래서 롤즈나 드워킨 등과 같은 대표적인 영미의 정치철학자들 역시 사회적 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주로 분배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요.

하지만 바우만의 표현처럼 유동하는 근대, 출렁이는 파도나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경제 영역과 같은) 사회의 특정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다양한 문제를 인식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요. 경제라는 특정한 영역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그렇고 문화, 정치 등 경제와 다른 영역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사회적 정의를 다루는 접근 방식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서구 국가들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복지가 국가의 기능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과거에 비해 일정 부분 완화되었고, 다양한 문화들의 혼종과 이주 노동자, 난민, 젠더 문제, 각종 소수자의 문제 등 사회 각 구성원의 인정투쟁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불평등의 문제를 경제 영역에 국한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악셀 호네트나 낸시 프레이저 같은 학자들은 사회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에 선행하는 인정(anerkennung, recognition)의 질서에 주목합니다. 경제적 자원과 달리 문화적 자원, 예컨대 성차나 학력에 따른 사회적 지위의 분배와 같은 문제는 경제 영역에서의 불평등과 같이 재분배나 조정의 방식으로 파악하거나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이나 저학력자가 경험하는 부정의의 내용이 무엇이고 왜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는지, 이로 인한 구체적인 고통이 무엇인지 해명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기준만으로는 다룰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해 사회적 정의라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특정한 정체성과 사회가 이들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이저가 경제적 불평등을 다루는 분배라는 기준과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인정이라는 기준을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면, 호네트의 경우는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호네트는 경제적인 불평등이나 사회적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 등의 문제는 결국 정체성들 간의 위계에서 파생한 부수적 문제에 지나지 않거나 이에 따른 결과라고 보고 있지요. 다른 한편 랑시에르 같은 학자는 훨씬 더 근본적인, 감각적 차원에서의 구분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는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서로 다른 인정의 수준이 작동하는 차원보다 더 근본적인, 예컨대 감각적인 차원에서 미추와 선악을 직관적으로 구분하는 기준에 주목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불평등의 문제가 정의의 문제로, 정의의 문제는 다시 기준의 문제로 이어지면서 흥미로운 시사점과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다, 정도로 일단 매듭을 짓는 게 좋겠군요.

 

어쨌거나 그럼에도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소홀히 여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우만이 말하는 것처럼 국내총생산이라는 기준으로 측정하는 국가의 개략적인, 또는 평균적인 부의 규모는 사회적인 해악으로 거론되는 여러 항목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반면, 부가 분배되는 방식, 다시 말해 사회적인 불평등의 정도는 그러한 사회적 폐해들을 만연하게 하거나 더 강력하게 만들 정도로 아주 깊은 영향을 미치니까요. 불평등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래 평등이라는 기준이 점점 더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문제에 통용되는 것은 일단 환영할 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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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4.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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