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quid Modern World: Instant Privacy

July 21, 2017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벽보 한 장이 내걸립니다. 이후 유럽 대륙을 격변의 소용돌이로 몰고 갈, 그리고 세계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대사건의 서곡이었지요. 벽보는 95개의 조항으로 교황과 로마 교회법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특히 당시 성행하던,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강도 높게 비판했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이 벽보는 95개조 의견서, 혹은 95개 조의 반박문으로도 불리는 마르틴 루터의 게시문입니다. 로마 교회에 대한 루터의 이 비판은 이후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지요.

 

훗날 니체는 종교개혁이 왜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났는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16세기 교회의 타락이 가장 덜한 곳이 독일이었고, 바로 그렇기 독일에서 종교 비판이 가능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니체에 따르면 오직 부패와 타락의 초기에만 사람들이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느낄 뿐, 이미 그것이 만연해진 다음에는 그저 당연한 현실처럼, 일상의 조건처럼 느끼게 됩니다. 어떤 현실이 당연하다는 듯이 반복된다면 반복되는 현실에 직면한 사상은 결국 어느샌가 입을 다물기 마련이지요.

 

현대 사회를 둘러싼 비판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지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 사회’라는 것은 상당히 모호하고 덩어리가 큰 개념입니다. 뭐 누구나 어디서든 쉽게 쓸 수 있는 표현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경우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할 정도로, 일종의 대명사나 커다란 기호에 가까운 표현이지요. ‘현대’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어쨌거나 누군가 현대 사회를 비판할 때, 실은 대개 사회의 특정 부분이나 특정 현상을 겨냥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구분하고 이를 (의미의 수준에서든, 조작적인 수준에서든) 적절한 단위로 포착하는 것은 몹시 까다로운 일입니다. 하나의 현상이 실은 다른 현상의 부차적인 면에 불과할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다른 면에서는 긍정적인, 심지어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현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그것의 속사정이 전혀 다른 경우도 파다하지요. 게다가 각각의 현상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전적으로 독립해 있기보다는 선후와 인과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경우가 태반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회를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사회 전반의 특성을 포착해 종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특징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이를 테면 울리히 벡이 ‘위험 사회(risk society)’에 대한 경고를 보내거나,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는 것 등이 그렇지요. 사회라는 거대한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또 핵심적이고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보편적인 특징이 개별 현상에서는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바우만은 ‘유동성’을 중심으로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일상, 유동하는 시대, 등으로 탐구 영역을 세분화하지요.)

 

어쨌거나 근대성 전반에 대한 비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중반 정점을 이루는데, 이에 앞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실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주로 생산양식과 이를 둘러싼 각 계급의 이해관계와 같은 정치적 측면에서의 비판, 상품, 임금, 지대, 노동, 화폐, 가치 등 자본주의의 경제적 개념에 대한 분석, 인간 소외, 시장의 제국주의적 팽창 등 사회적, 윤리적 측면에서의 비판, 자본주의에서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의 관계 등 철학적 수준에서의 비판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을 이룬다면, 오늘날의 그것은 주로 사회적, 윤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경제적 불평등과 그로 인한 폐해에 대한 비판 같은 것들이지요.

 

어떤 현상이 처음 등장했을 때 대개 이에 대한 비판 역시 함께 따라 등장하지만, 그것이 비판과 무관하게 순탄하게든, 혹은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든 어쨌거나 이어진다면 결국 잠잠해지는 쪽은 비판일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이제까지의 역사가 보여준 바로는요. 근대에 대한 비판,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또 하나의 소비 문화로서 소비해버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소화력을 보여주지요.

 

 

… (중략) …

 

 

바우만의 편지를 따라 남은 밤 동안 다룰 몇 가지 주제 가운데 오늘은 ‘온라인 세계’와 관련한 부분을 다뤘습니다. 이제까지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의 모든 관계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졌지요. 하지만 이제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경계가 무의미하게 변한 지 오래입니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세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나뉘지만, 그 경계마저도 빠르게 뒤섞이며 변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 지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이미 변했고 여전히 변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때로 기술 발전에 동반하는 모든 폐해에도 불구하고 기술 변화의 효과와 파급력은 비가역적입니다. 많은 경우 그렇지요. 인터넷이 연결한 세상 역시 마찬가지겠고요.

 

연달아 등장하는 세 통의 편지, ‘프라이버시라는 기묘한 사건’의 원래 제목은 ‘프라이버시의 기묘한 모험(strange adventure of privacy)’입니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공간이 자리매김하면서 사적인 것이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물론 사적인 것은 물론 혼자 변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것의 모험에는 그것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공적인 것 또한 동참하기 마련이니까요. 바우만이 물음을 제기하는 것처럼 몇 가지 질문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앞서 ‘정치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의미 또한 함께 변했다고 생각한 아렌트의 주장을 기억하십니까? 아렌트는 이 과정에서 본래 사적 영역에 속하던 경제활동이 마치 공적인 것처럼 사회에서 다루어지게 되었고, 인간이 개체성을 획득하고 공동체를 구축하던 정치가 오히려 사적 영역으로 퇴행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지요. 최근 한국의 한 사회학자는 사회적인 것이 ‘소셜적인 것’으로 변화했다는 시각을 보인 바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공적인 것의 영역이 정치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소셜로 다시 이동한 셈이지요.

 

소셜적인 것의 특징은 무엇보다 친밀한 공동체의 사회적 확장과 과장된 사회성의 표현입니다. 소셜적인 관계는 하나의 사회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 양적 규모와 무관하게 어디까지나 친족 공동체나 취향 공동체 수준에 머물지요. 또 사회적인 것의 축소가 오히려 과장된 사회성의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소셜적인 관계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솔직함과 과격함은 좀처럼 사회성으로 이어지지 않지요.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반사회적 성격을 띄기까지 하지요. 이러한 논의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 세계가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포함하면서, 현실에서 사회와 사회적인 것의 의미 또한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라인 세계의 등장이 현실 세계의 경계를 새롭게 획책하는 방식으로 인간사의 영역을,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근본적으로 바꿨다면, 문화라는 거대한 차원에서는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어서 함께 생각해보시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7. 21.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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