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July 17, 2017

서정은 대상과 주체의 겹쳐짐에서 출발하고, 이 겹쳐짐의 경험이 발화라는 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서정의 기본적인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정은 근본적으로 고백의 성격을 갖지요. 서정의 핵심은 고백과 마찬가지로 감춰진 것을 숨김없이 꺼내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과의 겹쳐짐이라는 내밀하고 고유한 경험을 숨김없이 꺼내는 발화를 서정의 핵심이라고 볼 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밀함’과 ‘숨김없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않는 것, 어쩌면 나만 그 자리에서 몰래 본 것,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지 있지 않고 나만 알고 있는 대상의 어떤 ‘내밀한’ 모습을 시적 주체가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낼 때,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의 모습은 마치 원래 그것이 그랬던 것처럼, 객관적인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이렇게 성공한 서정은 은밀한 것과 그것의 숨김없는 모습이라는 긴장 사이에 드리운 의미의 팽팽한 외줄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아가 수행하는 역할을 대상 스스로가 자신을 내보이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낭만주의에서 하이데거로 이르는 길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서정이 갖는 힘은 고백이 힘을 발휘하는 방식과 흡사합니다. 고백이 갖는 호소력은 고백의 진정성에 기인합니다. 발화 주체의 내밀한, 사적 진실이 고백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감없이 드러날 때, 가장 사적인 나의 의미가 타인에게 전달되고 이해와 공감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반면 고백의 정형화는 고백이 갖는 호소력을 제거합니다. 고백의 호소력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이는 것에서 성립하지만, 정형화된 고백의 표현은 고백의 주체가 실은 그 고백의 주인이 아니라거나, 그의 고백이 있는 그대로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몇몇 비평이 지적하는 ‘한국적 서정’의 한계와 위기는 정형화된 고백이 상실한 효력이라는 문제와 비슷한 맥락에 있습니다. 형식과 전범, 선례와 상식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서정은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것들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서정이 기왕의 문법에서 탈출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무력함은 결국 시와 서정, 언어와 서정의 관계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기 마련이지요.

 

… (중략) ...

 

 

많은 사람들이 요즘 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합니다. 물론 여전히 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은 익숙한 문법의 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시들을 좋아하는 사람 역시 많고요. 또 그런 시들과 그런 시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진부하거나 뒤쳐졌다고 치부하기도 어렵습니다. 서정을 통해 드러나는 시적인 것을 시의 본질이라고 본다면, 시적인 것은 그것이 담긴 시의 형식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가뜩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산문들보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던 시에 대해 이제는 전문 독자인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어렵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한 비평가는 이러한 경향을 ‘모든 소통을 외면한 채 오로지 새로움에 자족하는 극단적 현상’이라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황병승은 한국 시단의 이러한 변화에 직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시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의 대표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지요.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권혁웅이 ‘미래파’를 명명했을 때 맨 앞 자리에서 호명된 이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자 현상으로서 미래파에 대한 상찬과 비판이 팽팽하게 맞설 때면 종종 불려 나오는 이름이지요.

미래파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9년 2월입니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가 ‘미래주의(Le Futurisme)’라는 제목으로 피가로지에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약속하는 미래의 모습을 예찬하며 전통적인 미학과 단절을 선포하는 선언문을 게재했지요. 마리네티의 선언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예술과 혁명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팽배했던 러시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요.

 

물론 오늘날 한국 시단의 어떤 경향을 가리키는 미래파라는 현상과20세기 초 유럽의 미래파 예술을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전자와 비교한다면 후자가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훨씬 더 큰 파급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후자가 문학은 물론 예술 전반과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전위 운동이라면 전자는 어느 날 갑자기 타의에 의해 계파로 호명 당한 뒤 잠깐 동안 ‘뉴웨이브’니 ‘새로운 서정’이니 서로 다른 몇몇 이름으로 불리다가 시간이 지나며 비슷한 혐의의 시/시인들이 하나씩 추가되어 종래에는 정확히 이 계파의 경계가 어딘지도 불분명한 가운데 얼떨결에 찬사와 비난을, 기대와 의심을 동시에 받고 있는 형국이랄까요.

어쨌거나 미래파 선언을 수용한 러시아 문학, 그 중에서도 특히 시가 겪었던 변화는 주목할 만합니다. 새로움을 그 자체만으로 지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았던 20세기 초 러시아 미래파의 시는, 언어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형태나 의미, 소리의 효과에 따라 신조어 개발에 몰두하거나 종래에는 문법을 파괴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니까요. 한국의 한 비평가는 최근 미래파라는 경향의 시들이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보면 누가 썼는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만큼 유사한 아류의 재생산에 이르렀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새로움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할 경우 봉착할 수 있는 한계라고 볼 수 있겠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러시아의 미래파 시가 결국에는 파격만을 위한 파격만을 지향하다 결국 평면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시도에 그치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성립합니다. 미래파라는 최근의 경향이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날지, 한국 시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로 펼쳐질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비슷한 방향을 겨누었던 다른 시도들의 과정과 결말은 의미심장하게 참고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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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향한 사랑과 합일의 추구가 시적 서정의 전반부를 이룬다면 그것의 숨김없는 발화는 시적 서정의 후반부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에는 반드시 서정의 주체, 시적 주체의 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시적 주체가 자신의 내면을 노래하든, 세계의 풍경을 노래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한 서정은 독자를 이 시적 주체의 자리로 불러들이고, 그래서 시를 읽는 사람도 시적 주체가 경험한 대상과의 합일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성공한 서정의 구도에서 대상의 자리와 시적 주체의 자리, 읽는 주체의 자리는 모두 나란하게 포개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상과의 합일이라는 낭만적 환상이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 시적 주체의 몽상이 깨지는 순간 서정은 필연적으로 실패로 돌아가지요.

 

시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같은 시에서 전혀 다른 감상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전혀 다른 독법에서 비슷한 감상이 나올 수도, 같은 독법을 따라가고도 완전히 다른 감상이 나올 수도 있지요. 황병승의 시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서정의 실패 이후 시적 주체의 자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시적 주체의 의미는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는 것일 겁니다. 내 시선을 초과하는 세계, 내 의미작용으로부터 벗어나는 세계, 내 의미작용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계, 나로부터 달아나는 세계. 그래서 시로 환원할 수 없는 세계, 시가 불가능한 이 세계에서 시적 주체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요.

 

우선 이 주체는 자신이 귓속말의 세계와 부드러운 입맞춤의 세계에서 제외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매일 저녁 입이 돌아가고 코가 돌아가도 아무것도 발음할 수 없지요(‘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말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고 싶고, 만지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악수하고 싶고 만지고 싶지만 손을 숲 속에 두고 왔다는 고백을 쓰고 찢기를 거듭할 수밖에(‘여장남자 시코쿠’) 없고요.

‘나’라는, 자아라는 가장 원초적인 최소한의 자의식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사계절을 거듭해도 여전히 오늘 밤인 세계에서 나는 사방에서 자꾸만 태어나고(‘사성장군협주곡’), 여섯 시에 병들고 아홉 시에 죽어도 열두 시면 다시 태어나는 굴레(‘원 볼 낫싱’)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는(‘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se’) 세계라면 쉽게 말하든 어렵게 말하든 모두 진실이므로 고백은 모두 아름답습니다(‘시코쿠’).

세계가 요지경인지 시적 주체가 요지경인지 분간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지요. 중요한 것은 애당초 서정이 몽상이자 낭만으로서 그 실패 또한 예정된 일이라면 오히려 이 실패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그려왔던 모든 것이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혹은 더 이상의 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하게 드러났을 때 무엇을 꿈꿀 것인가를 그려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7. 17.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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