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quid Modern World: Orientation

July 7, 2017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해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참전했고, 소련군이 동부전선에서 나치를 밀어내면서 다시 폴란드로 돌아왔지요. 종전 후 바우만은 대학에 진학해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마르스크주의 이론가로 활동합니다. 공산당 주도의 반유대주의 기조가 소비에트 내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1968년, 바우만은 교수직과 국적을 박탈당한 채 폴란드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냉전 시기 소비에트에서의 입장, 또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정반대 진영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유대인으로서의 귀환이랄까요? 하지만 그곳도 바우만이 기대했던 ‘시온’은 아니었습니다. 텔아비브 대학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와 과격한 시오니즘에 환멸을 느낀 그는 1971년 영국 리즈대학교에 교직을 얻은 뒤 영국에 정착했지요.

 

바우만은 2017년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쭉 영국에서 활동했습니다. 1990년 대학에서 정년을 맞기까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영국의 노동 문제를 다루는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했고, 연구 전반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유럽의 지적 전통을 폭넓게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번 세미나에서 함께 다룰 내용 가운데에도 바우만이 기대고 있는 지적 전통으로서 그람시나 벤야민의 사유 등을 확인할 수 있지요.) 바우만은 생애 동안 그가 수행한 방대한 연구에 비해 다소 늦게 주목을 받은 편입니다. 대학 퇴임 직전인 1989년 발표한 <근대성과 홀로코스트>를 통해 비로소 세간의 관심을 얻었으니까요.

 

바우만은 무엇보다 근대 세계와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합니다. 1990년대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 ‘유동성(liqiuid)’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학계는 물론 대중적인 수준에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요. (액화된 근대, 혹은 액체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근대란 기존에 사회를 이루던, 견고한 원리로 작동했던 구조나 제도, 풍속, 도덕 등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확실성을 가질 수 없는 시대를 가리킵니다. 바우만은 확실하고 단단한 세계, 믿을 수 있고 안정적인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었던 세계가 어떻게 유동하고 요동치고 부유하고 흔들리는 세계로 변했는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 유동성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하지요.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을 근대(modernity)는 물론 사랑(love), 삶(life), 공포(fear), 시대(times) 등의 주제로 연결시켜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흔들리고 가변적인 오늘의 세계에 대해 고찰합니다. <리퀴드 타임즈>에서 바우만은 견고성(solid)과 유동성(liquid)을 대비시키며, 유동성을 핵심으로 하는 최근의 시대가 인간에게 다른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류의 도전을 제시한다고 주장합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인간이 평생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생의 전 과정에서 작게 나뉜 채 끝없이 이어지는 도전이지요. 예를 들면 대학의 기능과 대학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등이 견고한 시대에는, 대학생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학업 성취도라는 비교적 단순한 목표로 주어집니다. 하지만 대학의 사회적 위치 자체가 ‘유동하는’ 시대에 학생들은 대학에서의 학업 성취도가 아니라 대학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부터 시작해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자격증을 준비할 것인지, 휴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졸업을 언제 할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매순간을 관리하고 매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아마 졸업 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관리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은 갈수록 늘어날 테니까요. 대학 밖으로 나오면 더 많은 상황들이 관리와 대처를 요구하겠지요. (오늘날 많은 성인들이 차라리 어릴 때가 행복했다, 학생 시절이 더 낫다고 종종 푸념하는 까닭이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우스갯소리처럼 백수는 직장인을, 직장인은 대학생을, 대학생은 고등학생을, 고등학생은 어린이들을 부러워한다지요.) 이렇게 끊임없이 유동하는 오늘날의 세계는 인간에게 생의 전 과정에 대한 관리와 대처를 요구합니다.

 

하나만 더 살펴볼까요? <리퀴드 러브>에서 바우만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서 인간관계나 사회적 관계의 본질도 따라서 변한다고 통찰합니다. 흔들리는 사회, 모든 것이 변화하는 시대는 인간을 개체화하는 경향을 갖습니다. 보편적인 전망과 기대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전망이나 기대를 공유하는 집단이 형성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간들 이 결합하는 방식 또한 친밀성이나 결속을 중심으로 한 ‘관계(relationship)’가 아닌, 상황이나 조건,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이어붙일 수 있는, 또 단절할 수 있는 ‘연결(connection)’이라는 방식으로 변화합니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인간이 서로와 맺는 관계 또한 유동적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자, 이번 세미나에서 우리가 함께 읽을 책도 비슷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 책의 본래 제목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온 44통의 편지(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입니다. 바우만이 이탈리아의 한 주간지에 약 2년 동안 편지 형식으로 연재했던 기고문을 모은 책이지요.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면 어쩐지 낯선 나라 같지만 어떤가요, 잠깐 살펴본 내용으로만 해도 어쩐지 친숙하지 않습니까? 바우만이 활동했던 20세기 영국도, 이 책에 실린 원고를 연재했던 2000년대 이탈리아도, 또 그로부터 10년쯤 지나 바우만을 읽고 있는 이곳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 (중략) ...

 

 

철학적 책 읽기의 어려움, 도대체 왜 철학 책은 읽기 어려운가에 대한 언급으로 지난 세미나를 시작했는데, (사실 철학적 책 읽기의 어려움과 철학책 읽기의 어려움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여기에 대해서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지요.) 이번 책은 읽기 쉽습니다. 쉬워요. 아마 읽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을까 싶을 만큼 쉽습니다. 이 책에서 바우만은 적당히 이론이나 사상에 기대면서도 일상에서 누구나 접할 수 있을 법한 사례와 예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복잡하고 정교한 논증보다는 문자 그대로 짧은 호흡의 편지처럼 문제들을 다루니까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하면 어쩐지 혼자 읽어야 할 것 같은 제목이군요. 이 제목은 함께 읽는 책에 등장하는 두 번째 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해당 편지의 원래 제목은 ‘crowded solitude’인데, 그대로 옮긴다면 군중 속의 고독, 북적이는 고독 정도가 될까요? (아무래도 출판사가 선택한 표현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군요.) ‘고독(solitude)’은 ‘외로움(lonely)’와는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고독에는 부정적인 결핍의 감정보다 오히려 능동적인 ‘홀로 있음’의 의미가 강하게 들어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독을 예찬하는 표현들도 종종 마주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볼테르는 분주한 고독을 최상의 행복으로 꼽은 바 있고. <월든>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소로는 고독만큼 좋은 친구는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요.

 

돌이켜보면 요즘 세상은 시선을 빼앗고 생각을 훔쳐가는 것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온갖 매체를 통해 자신을 봐달라고 손짓하고 소리치는 것들로 가득하지요. 몇 년 전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하루 평균 193.1개의 광고에 노출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런 횟수나 통계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더 늘어갈 것이라고 전망했지요. 모든 사람을 소비자로 환원하는 작금의 사태나 이로 인한 피로 등은 굳이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보다 중요한 지점은 결국 이러한 소란이 인간의 고독을 박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박탈의 대상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얼마든지 혼자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혼자 있는 그 순간에도 TV를 통해,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끝없이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간은 결국 멈추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많은 경우 거의 반강제적으로 주어지는 정보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거나 수동적으로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고작이 아닐까요.

 

어쨌거나 그런 소란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뭐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도 금방 효과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고요. 동전의 앞뒷면 같은 문명의 결과들은 어느 한쪽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 정신없는 소동 가운데에서도 잠깐 멈추는 것 정도는, 소란의 작은 공백이나 틈새를 만드는 것 정도는 조심스럽게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이제는 그곳에 뭐가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고독입니다만 기왕에 ‘여기에 당신이 잃어버린 무엇이 있다’고 외치는 편지를 받았으니 분실물을 찾으러 한 번쯤 가봐야겠지요. 각자의 고독 속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하군요. 잠시 동안 찾아본 뒤에 다시 만나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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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7.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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