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July 3, 2017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전위(avant garde)’라고 정의합니다. 시대의 가장 맨 앞, 가장 끝의 경계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예비하거나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위는 언제나 당대와 첨예한 긴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의 한계에 직면해 그것을 시험하는 일이 곧 전위일 테니까요.

 

지난 2013년 서울에서 열린 ‘멈춰라, 생각하라!’ 행사는 바디우와 지젝의 참가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이 행사에서 ‘시인들과의 대화’ 프로그램에 바디우의 대담자로 나섰던 두 시인이 지난 시간에 함께 읽은 진은영과 오늘 우리가 다룰 심보선입니다. (실제 대담에는 송경동 시인까지 포함해 세 사람의 한국 시인이 참가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 사회자는 진은영을 시인/철학자로, 심보선을 시인/사회학자로 소개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심보선은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부르디외의 관점을 따라 문학 공간을 하나의 사회적 장(field)이라고 볼 때 개별 작품이나 담론의 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또 그것들이 장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형성하고 유통되는지에 대해서 탐구하기도 하고, 기업형 갤러리와 문화 소비의 문제를 다루기도 합니다. 또 시인으로서 국가적 폭력과 말의 문제나 문화와 사회의 관계,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지요. 2008년 출간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심보선의 첫 번째 시집입니다. 그가 처음 시를 발표한 게 1994년이니까 첫 시집까지 시간이 꽤 걸린 셈이지요.

 

앞서 보들레르를 언급한 까닭은 현대성에 대한 그의 통찰이 오늘날 일군의 한국 시들에 나타나는 특정한 유형의 서정성, 혹은 그것을 이루는 어떤 근본 정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시단에는 70년대 초반에 태어나 30대 후반에 이른 일군의 시인들이, 생소한 발성의 문제적인 작품들을 동시에 발표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전까지 한국 시들이 공유했던 주류 어법과 상당히 다른 어법과 감수성, 태도, 시학 등 거의 모든 면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는 시들이었지요.

평론가 권혁웅은  이들을 ‘미래파’라고 일컬었습니다. 권혁웅에 따르면 이들 시들은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형식으로 삼고 음악을 위해 전언을 포기하지 않으며 풍부한 이미지와 여러 화자를 시의 무대로 올립니다. 때문에 이들 시들은 사실성보다는 환상성에, 통합보다는 분열에, 은유보다 환유에, 동질성보다 이질성에, 미보다 추나 잔혹, 모호성에 더 가깝지요.

 

권혁웅의 진단 이후 여기에 대한 다양한 비평이 등장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평가는 때로 이들 시를 직접 겨누기도, 때로 다른 주제를 다루는 지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요. 논의의 폭도 큽니다. 일차적으로 이들 시들의 특정한 경향을 다루는 비평적 입장에서부터 그것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평가하는 입장, 그것들의 전망을 제시하는 입장, 이러한 입장들을 비판하는 입장까지 과연 입으로 먹고 사는 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만할 만큼 떠들썩했지요.

 

이들 시를 비판하는 입장은 대체로 지나치게 자폐적인 시 세계, 난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비현실성과 공허를 위장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들 시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새로움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합니다. 반면 이들 시를 옹호하는 입장은 (어쩌면 시적인 것과 상극이라고 볼 수 있는) 정형화된 시의 문법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태도를 벗어나 언어와 시에 대한 새로운 성취와 전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 주목하고요. ‘미래파’라는 명칭에 관해서도 이들 시나 경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새로운 서정’, ‘진화하는 서정’, ‘환상적인 서정’, ‘뉴웨이브(new wave)’ 등의 개념이 여러 평론가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몇 가지 개념들이 경합한 끝에 오늘날에는 대체로 ‘미래파’라는 명칭이 가장 일반적인 호칭으로서 광범위한 함의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미래파 시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적 특징은 먼저 ‘탈(脫) 서정’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래파 시들은 90년대의 장정일, 유하, 이원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의 이장욱, 김행숙, 진은영이 보여준 아방가르드적인 미학을 전면화한 새로운 정서적 충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전통적 서정성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서정의 체험을 제공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통적 서정성의 본질은 ‘세계의 자아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적 자아가 확장되어 세계와 합일되는 정서적, 정신적, 언어적 고양을 체험하는 순간을 서정적 순간이라고 한다면, 자아의 기준에서 이 순간은 탈아적 상태로 대상과 혼융하는 디오니소스적 체험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자아와 대상의 거리가 사라졌을 때 그의 비탄은 곧 우주의 파괴이며 그의 감탄은 곧 세상의 환희와 같습니다. 자아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혼융의 체험 가운데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이때 시인은 모순적 입장에 처합니다. 경험 주체로 그는 대상과 같은 곳에서 세계를 체험하지만, 행위 주체로서 그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와 그것을 언어로 발화해야 하니까요. 행위 주체로서 그가 발화하는 언술의 타당성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서정성입니다.

한편 이런 맥락에서 서정성은 본질적으로 세계를 1인칭에 가두는, 시적 자아라는 소실점을 기준으로 한 일점원근법으로 세계를 묘사합니다. 탁월한 서정 속에서 자아는 소실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비우거나 숨기고 대상을 드러내지요.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시단에 등장한 경향을 새로운 서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대상을 다루는 시의 화법이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 (중략) …

 

이번 세미나에서 반복해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 무엇이 시를 시로 만드는가, 시와 시 아닌 것을 나누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일단 그것을 ‘시적인 것’이라고 칭하기로 했었지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이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고전 예술의 소멸을 지적한 헤겔의 생각과, 헤겔이 생각한, 혹은 근대 이후의 예술도 더 이상 예술로서 지속할 수 있는 근거를 상실했다는 이중적 부정에 기인합니다. 헤겔은 매개가 필요 없는 즐거움, 진리, 생동성을 고전 예술의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그런 예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요. 이제 예술은 그것에 대한 철학이나 지식, 담론 없이 그 자체만으로 존속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서 떠올리는 ‘해석과 담론이 필요하지 않은 예술, 그것들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는 개념은 예술이 해석과 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 시대의 담론에 기대고 있을 뿐입니다. 이 담론 위에서 즉각적인 쾌나 어떤 강렬한 느낌을 산출하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느껴지는 것 같은’ 작품들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지요.

예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담론에 기대고 있다는 특징이 가장 도드라진 시기가 바로 20세기입니다. 혁명과 아방가르드의 시대, 혁명과 아방가르드라는 동일한 전망을 정치와 예술이 공유했던 시대이지요. 바디우는 20세기를 추상과 실험의 시대이자, 형식 파괴와 선언문의 시대로 정의합니다. 이에 따르면 정치와 예술, 혁명과 시학은 지난 세기에 하나의 동일한 열정에 의해서 추동되었는데, 이 열정은 바로 19세기가 상상했거나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이상과 예술적 가능성들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은 자신의 대중을 창조해야 한다는 언명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열정은 실재(réel)를 탐구하기 위해서 현실(realité)을 넘어서려는 욕망과 의지의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첫 시간에 언급한 <시>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떠올려봅시다. 영화에 등장하는 문화 강좌에서 김용탁 시인은 수강생들에게 ‘우리는 한 번도 진짜 사과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과라는 사물 앞에서 빨갛게 잘 익은 과일, 혹은 과수원 어떤 풍경을 떠올린다고 해도 이것은 사과에 대한 도구화된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과에 대한 일종의 허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진짜 사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허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실재를 향한 열정이라는 20세기의 정신은 현실이 감싸고 은폐하고 있는 상징계의 구조를 파괴하거나 삭감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폭력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요. 정치적인 차원에서 실재의 열정은 테러리즘, 혁명, 폭동, 전쟁 등의 직접적 폭력을 사용해서 이미 고정화된 정치적 제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20세기 특유의 정치활동의 원천이었으며, 예술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방법과 대상에 있어서 다양한 폭력성과 결합한 형식 실험으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문학의 경우에서도, 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실재를 향한 열정은 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온갖 담론들의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나 그것들이 이미 해체되었다는 믿음 속에서 이 열정은 기껏해야 재현의 성공 여부나 의도의 달성, 느낌의 연출에 관여하는 수준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재를 향한 열정 속에서 서정성은 상상과 상징적 질서를 넘어 대상의 실재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매개이자 장치로, 과정이자 결과로서 기능합니다. 서정 속에서 시인은 대상과 결합하고 결합의 체험은 추상과 변형을 통해 대상을 다시 드러냅니다. 이 과정에서 대상에 묻은 익숙한 관념은 산화하고 사람들이 그것에서 보았던 상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대상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때로 그것은 추상과 변형의 과정을 통해서만, 혹은 그 결과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익숙한 하니까요.

시에서 드러나는 대상의 실재를 바로 시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한편으로 대상의 실재는 반드시 시가 아니라 회화를 통해서도, 음악이나 율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매체는 저마다의 고유한 경로로 대상의 실재에 도달해서 각각의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다른 한편 시를 통해, 시만이 도달할 수 있고 시만이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다른 매체와는 질적으로 상이한 방법을 통해 이 실재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 곧 시이고, 이 때 시가 성취한 대상의 실재를 ‘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가 당면한 과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시가 어렵다거나 대중의 외면을 받는다거나 하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실재를 향한 열정 자체가 더 이상 가능성과 가능 근거를 확보하지 못할 때 시는 여전히 가능할 수 있는가, 시는 무엇을 지향할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들이지요.

심보선은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를 소개하는 어떤 글에서, 소설의 주인공 페초린의 발언을 빌려옵니다: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 시선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 그 의도를 알아맞히는 것, 음모를 와해시키는 것, 속은 척하는 것, 그러다가 갑자기 그들이 간계와 계략을 써서 힘들게 만든 거대한 건물을 일격에 무너뜨리는 것, 바로 이것을 나는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삶은 곧 환영과 벌이는 말들의 전투라고 덧붙이지요.

일단 오늘은 전장의 지형과 전후 사정을 짚어보는 정도로 하고, 이 전투의 향방은 어디를 향하는지, 이 싸움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조금 더 고민을 이어가 보시지요. 실재를 향한 열정이 근본적으로 회의에 직면한 시대, 지난 시대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던 시대의 근본 정서가 효력을 다한 시대, 유효기간이 지난 열정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7. 3.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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