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June 19, 2017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 시를 시로 만드는 것을 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 시적인 것을 어떻게,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지난 시간 함께 살펴봤던 이시영은 ‘때로 한 줄의 기사가 그 어떤 시보다 더 시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그가 말하는 ‘시적이다’라는 술어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학창시절 국어 수업에서 시를 다루던 시간이 기억나십니까? 교과서는 시의 3요소를 운율, 심상, 주제라고 소개합니다. 다른 말로 음악적 요소, 회화적 요소, 의미적 요소라고도 하지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시는 다른 산문과 구별되는 율격을 지녀야 하고, 그 가운데 어떠한 형상을 그리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주제를 지녀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아주 기초적인 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의 운율은 때로 음악성의 통념에 반하는 방식으로 음악적일 수 있으며, 시가 그리는 형상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구체와 추상 사이에서 선명하지만 모호할 수 있고, 시의 주제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쉽게 파악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 시의 3요소(라고 볼 수 있을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 다 시인가, 라는 질문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시의 3요소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시가 아닌가, 라는 질문도 생각해볼 수 있고요. 가령 김춘수가 주장하는 ‘무의미시’나 오규원의 ‘날이미지’의 경우를 떠올려볼 수 있겠지요. 이들 시는 대체로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를 그리는 데 몰두하는데, 그래서 이들 시에서는 뚜렷한 주제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애당초 어떤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 시가 겨냥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시의 의미는 시의 바깥에서, 즉 시론이자 시의 가능성으로서, 시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적, 외적인 구조, 즉 시의 형태나 의미의 형식으로 시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이렇게 까다롭습니다. 시적인 것을 직접 정의하기 어렵다면 시가 아닌 것을 가려내는 것으로 방법을 바꿔본다면 어떨까요? 기왕에 매체를 달리 하는 회화나 음악을 제외하고 언어라는, 문자라는 기호를 공유하는 글에 국한해서 생각해보시지요. (물론 시를 반드시 문자에, 언어에 묶어 맬 수 있는가는 또 따져볼 문제입니다.)

 

우선 시의 소리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산문과, 시적 형상, 심상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서사를 떠올려볼 수 있겠군요, 일단은. 운문으로서의 시에 대립하는 산문은 그것이 포함하는 의미의 전달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갖습니다. 그래서 시에 비해 산문에서의 소리나 리듬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고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산문이라고 꼭 음악성을 갖추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플로베르는 소설을 쓰면서 날마다,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자신이 쓴 문장을 읽으면서 그것의 음악성을 고민했다고 하지요. ‘산문시’를 지향하지 않는 모든 산문은 죄다 시시하다고 말한 문학 평론가가 있을 만큼 산문 또한 시적일 수 있습니다.

 

서사는 어떻습니까, 서사는 시와 대립한다, 혹은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흔히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방법, 혹은 그러한 방법으로 묘사된 기록을 서사라고 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서사는 어떤 형상을 가공해서 주제나 의미를 드러내는 시와는 다르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있는 그대로’와 ‘가공’ 사이의 간격을 정확히 한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영화 ‘시’ 속 김용탁 시인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서술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도 않거니와, 이시영의 말처럼 때로 어떤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 가능하다면 때로 한 줄의 기사가 무수한 시구들보다 더 시적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자, 이런 맥락에서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 서사적 구조를 지닌 이야기라고 본다면 시 또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까요? 혹은 이야기도 시가 될 수 있을까요? 벤야민은 이야기의 유형을 뱃사람의 이야기와 농사꾼의 이야기로 구분합니다. 뱃사람은 마을을 떠나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섭니다. 항해를 마치고 다시 마을로 돌아올 때 그는 바다 건너의 기기묘묘한 이야기들과 함께 돌아오지요. 항해에서 돌아온 그는 사람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이를 테면 외눈박이 거인의 이야기나 사람을 홀리는 세이렌의 이야기, 하늘을 나는 양탄자나 황금사과에 얽힌 이야기들을요.

 

뱃사람이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들려주는 신비한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 만점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바다 건너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모험이라도 되는 양 숨죽여 듣곤 하지요. 그가 펼치는 놀라운 장면들 앞에서 웃고 울고 놀라고 떨면서 매번 새로운 모험담을 기다립니다.

 

반면 농사꾼은 자신의 경작지를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얼핏 보기에 그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이 흥미롭게 들을 만한 이야기와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재미나 신비와는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지요. 그가 매일 걷는 거리는 마을 사람들 또한 그와 함께 매일같이 오가는 곳입니다. 그가 파종을 위한 씨앗이나 농기구를 보관해놓은 창고 역시 마을 사람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며, 그가 자주 드나드는 방앗간이나 장터에 대해서라면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대체로 농사꾼의 삶은 계절에 따라 반복되는 것들, 익숙한 일상의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복과 다가섬을 통해서요. 예컨대 낮이면 사람들로 붐비는 그 거리가 이른 새벽에는 어떤 모습인지, 마을 곳간 가장 낮은 선반 아래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지, 해마다 여름의 풍경이 어떻게 조금씩 달라지는지 따위에 대해서라면 마을에 농사꾼보다 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지요.

 

이야기의 본질을 듣지 못한 것과 듣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한 보고라고 한다면, 이는 곧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주는 매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꼭 바다 건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매혹 또한 모험과 일상의 피상적 구분 위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간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험과는 담 쌓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농사꾼의 삶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에 주목하지요.

 

 

… (중략) …

 

 

<마징가 계보학>에서 권혁웅이 그리는 풍경은 ‘여차저차 해서 이만저만 했다더라’라는 식의 편년체 서술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80년대 약전(略傳)’이라는 부제처럼 평이한 보고에 간략한 논평을 더한 정도가 주를 이루지요. 하지만 시라는 수정체를 통과하는 순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풍경들, 여느 동네에서나 마주칠 수 있었던 회색 풍경이라 생각했던 장면들이 형형색색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에 등장하는 마징가 Z와 짱가, 투명인간과 가위손, 스파이더맨, 드라큘라, 슈퍼맨과 배트맨과 엑스맨과 원더우먼, 외팔이와 요괴인간, 황금박쥐와 미키마우스는 가상의 존재들이지만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어쩐지 친숙한 존재들입니다. 권혁웅의 시에서 이들은 팔이 하나 없는 붕어빵 장수나 밥상을 뒤엎는 천하장사처럼 기운 센 사내, 단칸방 나란히 누워 잠드는 일가족 등의 형상으로 모습을 나타내지요.

 

시의 서사는 오직 어떻게 살았는가를 잊어버리기 위해서만 살아남은 삶, 그래서 어떤 형식이나 구조를 갖추기 어려웠던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화 속 악당이나 영웅, 괴물들과 같은 기괴하지만 친숙한 옷을 입히고, 그 시절 어떤 풍경을 환기하는 방식으로요.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한 존재들이 공포나 동경이나 소문의 대상으로서 현실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가 문득 어디론가 사라진 기록이랄까요.

 

이 사라짐의 형식은 다양합니다. 더러는 불새가 되어서 하늘로(‘독수리 오형제’) 가기도하고 누구는 ‘4대 명산 너머로(마징가 계보학)’ 떠나기도 했습니다. 누구는 어느 골목 끝 여인숙으로(‘밤으로의 긴 여로’), 또 누구는 아빠를 무등 타고 어딘가로(‘드라큘라’), 한꺼번에 짐을 이고지고서(‘방광에 고인 그리움’) 다들 어딘가로 떠났지요. 그래서 이제 이들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현실과 가상 사이 어딘가에, 기억과 기록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시만이 기억하는, 시라는 수정체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지도 모르지요.

 

권혁웅은 겹으로 된 삶에 대해, 사람들의 동선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삶의 모든 현실성은 기록과 기억으로 환원되지요. 매순간이 갖는 구체성 또한 모종의 변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현실과 기억 사이에서 시와 서사는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6. 19.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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