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June 12, 2017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열린 시인 초청 교양 강좌에서 김용탁 시인이 수강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장면이지요. (작중 김용탁으로 등장하는 연기자는 김용택 시인입니다.) 수강생들의 면면은 뻔합니다. 주민센터의 여느 강좌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주부, 퇴직자, 젊은 노인 등이 대부분이지요.

 

66세의 할머니 양미자 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인 기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꽃도 좋아하고 이상한 소리도 곧잘 하는, 예쁜 걸 좋아해서 (다른 노인들과는 달리) 언제나 우아한 모자와 머플러를 두르고 찰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니까요. 딸 대신 손자를 맡아 기르면서도 ‘우리 모녀는 친구처럼 지낸다’며 관계를 포장하기도 합니다. 정작 딸에게도, 손자에게도 아쉬운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요.

 

강좌에서 김용탁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은 잘 보는 것’이라고 수강생들에게 말합니다. 사과를 예시로 들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과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요. 사람들이 사과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아직 사과를 존재의 깊이에서, 즉 있는 그대로의 사과 그 자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과를 도구적 대상으로, 예컨대 먹는 과일로만 바라보고 판단하지요. 현대인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은 죄다 이렇습니다. 효용가치를 기준으로 대상을 판단하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과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시 쓰기가 어려운 까닭도 여기에 있고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 사과의 존재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때 시인은 시상을 얻고 그것에 대한 시를 쓸 수 있다고 한다고 김용탁 시인은 말합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는 마음을 갖는 것이 어렵다고 덧붙이면서요.

 

 

... (중략) ...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시가 있습니다. 정말 많지요. 그 가운데에는 언뜻 비슷한 것도 또 일견 이렇게나 판이하게 다른데 시라는 같은 이름을 갖는 것이 타당할까, 싶을 만큼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시의 주제나 대상, 형식은 물론이고 내용과 말투, 지향점까지 모두 다른 다양한 시들이 있지요. 당장 비슷한 시기, 비슷한 지역에서 등장했던 이상의 시와 백석의 시, 소월의 시, 박두진과 최남선의 시를 떠올려 보셔요, 시라는 이름 아래 이들 각각이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다른 것들을 얼마나 다르게 다루었는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요. (아마 오늘날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자 이렇게 상이한, 때로 이질적으로까지 보이는 기록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것들을 모두 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렇게나 이질적인 기록들을 모두 시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시를 시로 만드는 무엇, 주제나 대상, 형식, 시인, 시가 놓인 시공간, 어법과 말투를 다 떠나서 모든 시를 관통하는 무엇, 혹은 모든 시가 지니고 있는 무엇이 있어야겠지요. 이 무엇의 이름은 일단 ‘시적인 것’이라고만 해둡시다. 아마도 이 시적인 것은 시에서 가장 선명하면서도 가장 모호한 무엇으로 끝까지 남아 있을 텐데, 앞으로 다룰 몇몇 시들을 통해 이 시적인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시지요.

 

시적인 것에 대한 물음은 곧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시의 언어가, 시라는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기호나 화자와 청자 사이의 수행성을 유도하는 언어가 아니라면 당연히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것의 기호적, 수행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겠지요. 이때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시가 담고 있는 의미가 바로 시적인 것이 될 겁니다. 그래서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무엇이 시를 만드는가?’, 혹은 ‘어떤 것을 시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을 꼬리에 달고요.

 

훌륭한 시인은 이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고유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시적인 것의 형상은 모두 동일할까요? 모든 시에서 시적인 것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는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봄직 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이시영의 시는 흔히 사람들이 시, 하면 떠올리는 독특한 묘사나 미사여구와는 거리가 멉니다. 신문기사를 거의 그대로 옮긴 듯한 표현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오히려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지요.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중국의 한 감옥에서 풀려난 티베트 승려를 친견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는 물음에 승려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그려!” 그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승려의 두 손이 가만히 떨렸다. (‘친견’ 전문)

 

김종삼은 살아가노라면 어디선가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되건 안되건 무엇인가 그적거리고 싶었으며 그게 바로 시도 못되는 자신의 시라고 했다. 마치 이 세상에 잘못 놀러나온 사람처럼 부재(不在)로서 자신의 고독과 대면하며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비로소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 전문)

 

이시영은 때로 한 줄의 기사가 숱한 가공된 진실보다 더 시다웠다고 말합니다. 아마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시란 시적인 것을 담고 있는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겠지요. 이시영이 제시하는 시적인 것은 ‘가만히 떨리는 승려의 손’에 담긴 무엇, ‘어디선가 맛본 굴욕에 되건 안되건 그적거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무엇을 가리킬 겁니다. 추상과 관념의 기호가 포착하지 못하는 떨리는 무엇을요. 고독과 오래 대면한 사람, 시적인 것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예민한 눈에만 보이는 무엇이겠지요.

 

시적인 것을 어떻게 언어로 포착할 것인가(바꿀 것인가, 표현할 것인가, 드러낼 것인가...)는 모든 시인이 안고 있는 절체절명의 화두일 겁니다. 오늘 살펴본 것들은 이시영이 발견한 시적인 것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모든 시적인 것들이 다 같은 모습이라고 장담하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씩 살펴보시지요, 시적인 것은 하나인데 그것을 포착하고 그리는 시선이 다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시적인 것 자체가 여럿이어서 서로 다른 시들이 모두 시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6. 12.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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