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llenges

May 15, 2017

취미판단에 대한 칸트의 주장을 살펴본 뒤 벤첼은 마지막으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뭐 하나씩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두 가지밖에 없을 리가 없겠습니다만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한 논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바탕으로 칸트 미학 전체를 한번 되짚어 보자는 의도라고 볼 수 있겠지요.

 

첫 번째는 추(ugliness)의 문제입니다. 칸트는 판단력의 네 계기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의 요건을 무관심성, 보편성, 합목적성, 필연성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름다움만 존재할 리가 없지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것, 아름다움에 반대되는 것도 있을 겁니다. 따라서 칸트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해도 추함을 단순히 아름다움의 결핍으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꽤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전부 다 추한 것이라는 주장 또한 함께 수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선 추를 아름다움의 결핍으로 보는 것은 상당수의 직관적인 반대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특별히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울 까닭도 없는 아무런 사물, 이를 테면 종이컵 하나를 떠올려본다면, 아무도 종이컵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는(느끼는) 사람 또한 없을 테니까요. 이렇듯 추를 미의 결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면 결국 추에 대한 별도의 해명이 필요합니다. 또 이 경우 미와 추의 관계에 대한 해명도 함께 필요하겠지요.

 

벤첼이 제기하는 두 번째 문제는 천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앞서 칸트는 천재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연의 재능으로 정의하면서, 개념을 통한 매개 없이 작품에서 필연성을 드러내는 역량을 천재라고 제시한 바 있습니다. 다른 한편 예술과 천재를 과도한 후광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신비와 경탄의 대상으로 삼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지요. 동시에 칸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천재는 수학이나 다른 어떤 학문에서도 불가능한, 오로지 예술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자 재능이라고 주장합니다. 천재가 단순히 좋은 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논란이 따를 수 있는 주장이지요.

 

 

... (중략) ...

 

 

미학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도, 또 그 이름을 따라서 모종의 탐구가 이루어진 것도 그리 긴 시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움가르텐의 <미학>이 등장한 게 1750년이니까 고작 해야 300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요, 물론 긴 시간입니다만 다른 학문 분과들의 역사나 개념들의 역사에 비한다면 거의 신생아나 다름없는 셈입니다.

 

미학의 탄생에 축복과 환대가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바움가르텐에 바로 뒤이어 칸트는 미에 대한 학문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미학의 가능성을 부정했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인 것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오로지 이에 대한 ‘비판’만 가능할 뿐 이를 학문으로 정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헤겔 역시 미학을 강의하면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을 자신도 따라서 사용할 따름이지, 사실 자신은 미학이라는 이름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지요.

 

미학의 담론은 기본적으로 미적인 것과 예술에 대한 논의 위에 성립합니다. 하지만 미적인 것과 예술 사이의 관계는 아직 한참 더 해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미적인 것을 다루는 방편 내지는 양식이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거꾸로 모든 예술은 반드시 다 미적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조금 복잡해질 테니까요. 미적인 것과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의심하지 않지만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야말로 미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미적인 것을 ‘아름다움’으로 한정한다면 논의는 한층 더 까다롭게 변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예술이 아름다움을 독점하지 않는 시대, 또는 예술이 아름다움으로부터 달아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바움가르텐 이후 헤르더나 일부 낭만주의적 관심에 의해 미적인 것 그 자체를 직접 해명하려는 시도가 일부 있었지만, 대체로 미학의 논의는 예술의 주변에서 이루어집니다. (미학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마차가지였고요.) 미학의 논의는 언제나 작품이나 작가, 혹은 창작 행위나 감상 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 논의들의 역사가 미학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오늘날의 미학은 더 이상 작가와 작품만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상자와 감상 행위에 더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칸트의 논의는 몇 가지 지점에서 현대 미학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몇 가지 언급하는 것으로 이번 세미나를 마무리하지요. 자세한 논의를 위한 또 다른 밤들이 있겠지요, 아마도.

 

우선 칸트는 무관심성이라고 하는 현대 미학의 매우 중요한 특징을 개념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예술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 완전하게 독립된 고유한 영역을 지닌 활동이라기보다는 다른 영역의 부수적 활동 내지는 창작과 기술의 한 영역이었습니다. 당연히 이에 대한 가치 인정도, 또 탐구도 상대적으로 미흡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요. 칸트는 미적 판단과 취미의 문제를 특정한 이해관계나 관심사와 전적으로 무관한 영역으로 제시함으로써 예술의 독자적 가능 근거를 확보합니다. 

 

칸트는 작품이나 작가 중심의 논의 구도를 판단 주체라고 하는 미적 경험자의 차원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가 취미판단이라고 명명한 특정한 유형의 판단을 통해, 미적 경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 셈이지요. 이 과정에서 논의의 중심은 ‘미’에서 ‘미적인 것’으로 이행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요, 이것을 해명하는 것은 이번 세미나의 목표를 초과하는 일이겠지만 미, 즉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개념화하는 것은 그것을 인간 외부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 실체로서 다루는 입장으로 이어지는 반면 미적인 것이라는 방식으로 개념화할 경우에는 그것의 구현과 지각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는 것 정도로만 언급해둡시다.

 

칸트는 미적인 것의 근거를 미적 판단에서 찾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즉 무엇이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이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해 아름답다고 판정하는가, 즉 인간은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로 전환하지요. 이러한 전환은 미의 문제에 있어 대상과 경험의 차원을 분리시켜 훨씬 더 상세하고 촘촘한 논의의 공간을 허용합니다. 나아가 이렇게 판단의 문제를 미학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감각과 사유에 관련한 논의까지 미학이 다룰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지요.

 

미학이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무엇, 미적인 것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미적인 것을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인간 외부에 있는) 어떤 힘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역량 아래 놓이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함의를 갖는 논의들이 가능하지요. 후자는 미적인 것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그것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일련의 논의들로, 전자는 흔히 작품이 갖는 모종의 효력을 해명하는 비평들로 이어집니다. 칸트에게서 이것은 각각 취미판단과 숭고에 해당하고요. 이렇게 본다면 (물론 미묘한 차이는 존재하겠습니다만) 현대 미학의 가장 큰, 가장 중요한 두 관점을 칸트가 선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5. 15.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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