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lime

May 8, 2017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페렉은 생각하는 것은 곧 분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류에는 반드시 기준이 필요하지요. 따라서 생각이 곧 분류라면 사고의 정교함은 분류를 위한 기준의 정교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기준이 투박하면 그만큼 생각 또한 투박하다는 뜻이겠지요. 흔히 세상을 선과 악, 혹은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것을 흑백논리라고 합니다. 흑색 아니면 백색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세상을 분류하는 것이지요. 이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당연히 세상은 극도로 단순화된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세상에 대한 이해 역시 형편없는 수준일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고요.

 

철학자는 생각하는 것을 그의 장기라고 할 만한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 뛰어난 생각을 가진 사람, 사고의 대가로 불릴 만한 철학자들은 모두 빼어난 분류의 대가라고도 볼 수 있지요. 결국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했던 것을 식별해서 구분한다거나, 그들이 이쪽으로 분류한 것을 더 적절한 자리로 다시 분류한다거나, 모두가 이런 기준을 사용할 때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더 세상을 잘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이러한 작업은 모두 분류에 관련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철학이 오랫동안 명석하고(clear) 판명한(distinct) 인식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칸트 역시 분류에 대해서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할 만큼 분류 깨나 하는 사람입니다. 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류의 거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지엽적으로 세계와 사물을 분류하기보다도 선험적 범주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모든 판단이 기본적으로 이런 범주의 적용을 통한 분류와 종합이라는 것을 밝혔으니까요. 범주는 분류를 위한 특정한 부류나 범위를 가리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공간의 형식 속에서 인간이 세계를 경험할 때 양, 질, 관계, 양상이라는 네 가지 범주에 따라 대상에 대한 인식이 만들어진다고 보았지요.

 

칸트는 이러한 판단의 범주를 인간이 가진 보편적 능력, 즉 순수이성의 능력으로 보고 인간이 내리는 모든 종류의 판단에 이 범주가 관여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관여하는 방식은 판단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지요. 이를 테면 경험을 개념 아래 포섭하는 합리적인 인식의 경우에는 범주가 규제적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지만, 미감적 판단의 경우에는 반성적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반성적이라고 옳긴 이 표현의 원뜻을 잘 곱씹어보시기 바랍니다. ‘reflective’는 단순히 숙고나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영하고 반사하는, 그러니까 어떤 것에 뒤이어 따라온다는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오성의 기준은 범주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계기로서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 <판단력 비판>에서 드러나는 칸트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앞서 취미판단의 네 가지 특징을 다루면서 범주와 계기의 문제는 함께 살펴봤었지요, 판단 종류의 차이에 따른 계기와 범주의 미묘한 차이 또한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범주의 의미를 분류의 기준에서 찾는다면, 그것의 가치는 결국 그것이 기준으로서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 즉 그것을 기준으로 적용했을 때 대상들을 잘 구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잘 포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세상을 선과 악, 내 편 아니면 네 편으로 구분하는 흑백논리를 언급했지요, 만약 그것이 나쁘다면, 즉 분류의 기준으로서 적절하지 않다면 이분법이기 때문에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기준으로는 세상을 적절하게 구분하거나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0명쯤의 학생을 포함하는 한 학급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준만으로 분류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구분에서 성별 이외의 다른 차이들은 뭉뚱그려지고 말 겁니다. 예컨대 남성이라는 범주로 묶인 대상 가운데에는 키가 큰 아이와 작은 아이, 성적이 좋은 아이와 운동을 잘하는 아이, 음악 수업을 좋아하는 아이와 싫어하는 아이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고, (물론 어떤 목적으로 분류의 기준을 선택했는가에 따른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순한 범주는 서로 다른 대상들을 적절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혹은 ‘어머니가 내일 학부모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학생을 분류한다면 어머니가 없는 학생들을 범주의 적용에 앞서 배제한다는 차원에서 보았을 때 아예 일부 대상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거칠게 판단한다면 이들 또한 어머니가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학생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범주의 적용에 앞서 그 기준에서 아예 벗어난 대상들, 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대상이 있다면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겠지요.)

 

자, 이렇게 범주의 적절성을 그것이 얼마나 남김없이 대상을 포착할 수 있는가, 그리고 대상을 적절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서 찾는다면, 칸트가 처음 제시한 범주와 그것의 적용은 (물론 오늘날에는 칸트가 제시한 범주를 그대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겠습니다만) 그럭저럭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미감적 판단의 경우, 특히 오늘 다룰 숭고(das Erhabene, the sublime)입니다. 칸트는 ‘크기와 위력에 있어서 판단의 대상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을 숭고라는 개념을 통해 다루는데, 이건 기껏 이성의 범주와, 그것이 미감적 판단에서 적용되는 방식에 대해 상세한 논의를 진이 빠지도록 꼼꼼하게 진행한 뒤에 ‘근데 이 기준만으로는 다룰 수 없는 대상이 또 있다’고 뒤통수치는 격이랄까요, 애당초 범주가 포착하지 못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범주 설정이 틀렸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은 반론부터 판단력과 판단 대상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의심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는 지점이지요. 물론 여기에서도 칸트는 그렇게 단순히 부정하기에는 꽤나 흥미로운 주장을 펼쳐놓습니다. 예컨대 직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압도적인 느낌’에서부터 숭고에 대한 논의를 출발하는 지점이나, 자연에 존재하는 거대한 위력과 인간 내면의 총체성에 대한 순수 이념을 연결하는 부분들이 그렇지요.

 

 

… (중략) …

 

 

대부분의 다른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숭고에 대한 칸트의 생각 역시 앞뒤로 참조선을 그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로 유명한 에드먼드 버크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앞서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라는 저서를 통해 숭고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감각적, 생리적 특징에 기반한 관점에서 숭고를 다룹니다. 이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 야기하는 공포는 그것으로부터 안전한 위치에 있을 때에는 역설적으로 환희와 같은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버크는 공포에 억눌렸던 생명력이 다시 강하게 분출하는 것을 숭고의 핵심으로 제시합니다.

 

칸트 역시 비슷한 구도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는데, 칸트는 버크의 주장처럼 공포와 환희라는 숭고의 심리적 특성보다는 무한한 이념의 발견에 더 중점을 둡니다. 칸트는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를 구분하며 크기와 위력을 숭고의 핵심으로 제시하는데, 판단의 대상이 너무 크거나 너무 위력적이기 때문에 취미판단에서처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포착할 수 없지만, (즉 특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한하지만) 이때 인간의 내면에서 크기와 위력을 한정할 수 없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대응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숭고라고 주장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숭고는 일종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력으로서의 대상이 주는 압도적인 어떤 느낌과 그에 상응하는 무한한 감정이라는.

 

칸트는 숭고의 대상을 주로 압도적인 자연, 예컨대 폭풍우가 몰아치는 대양이나 깎아지른 절벽, 별이 촘촘히 빛나는 밤하늘 등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환기하는 정서가 인간 내면의 총체성과 도덕성 등 무한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고 보지요. 칸트는 미와 숭고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판단의 대상도, 판단의 성격이나 방식 등 모든 면에서요.

 

반면 리오타르는 숭고라는 개념을 전혀 다르게 제시합니다. 버크나 칸트 이후 낭만주의자들이 굳이 숭고라는 개념에 기대지 않고서 모종의 느낌이나 감각, 힘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면, 리오타르는 숭고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미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숭고가 꼭 크기나 위력의 차원에서 칸트가 제시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물리적 특성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리오타르는 기존의 개념이나 사고의 틀로는 규정할 수 없는 것, 원본과 작품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재현 논리로 표상할 수 없는 것, 의미화 할 수 없는 어떤 것, 현시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갖는 속성과 그것이 환기하는 효과를 숭고라는 개념으로 다룹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가 (어쨌거나) 주체가 가진 능력에 의해 발생하는, 주체에 속하는 숭고라면 리오타르의 숭고는 어떤 존재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사건에 초점 맞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는 숭고를 미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했지만 리오타르의 해석에 기댄다면 오히려 미적 판단의 영역, 즉 감각의 영역을 더 확장하거나 기존의 관점이 해명하지 못하는 지점을 다룰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요. 때문에 취미에 대한 칸트의 생각보다 숭고에 대한 논의가 미에 관련한 현대적인 문제들을 탐구할 때 오히려 더 유의미한 사유 지평을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돌아오는 마지막 밤에는 판단력에 대한 칸트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칸트의 관점이 갖는 몇 가지 난제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017. 5. 8.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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