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비판을 위하여

May 6, 2017

현대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타자’라는 개념에 얼마간 익숙하실 겁니다. 뭐 꼭 철학에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학이든 사회학이든 현대(contemporary)의 사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주제를 건드리고 있으니까요.

 

타자는 말 그대로 나와 다른 무엇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자아의 상대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흔히 타자라고 하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꼭 타자의 개념을 사람에만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즉 나의 어떤 속성을 기준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할 것인가에 따라 사물이나 동물도 얼마든지 타자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내가 남성이라면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이 타자일 수 있고, 내가 인간이라면 인간의 입장에서 동물이 타자일 수도 있으며, 또 내가 성인이라면 미성년자가, 정규직이라면 비정규직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병자나 장애인을 타자라고 볼 수 있는 등 얼마든지 확장해서 적용 가능한 개념입니다. (물론 타자의 구분이 단순히 무의미한 나열과 분류에 그쳐서는 곤란하겠지요. 이런 기계적인 분류는 고작해야 말장난에 그치거나 더 심각하게는 타자의 문제를 단순한 입장의 차이 정도로 환원할 위험도 안고 있으니까요. 타자라는 개념을 놓고서 어떤 문제를 다룰 때에는 그 구분과 기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따져볼 노릇입니다.)

 

타자는 자아의 의식과 세계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는 현상학이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개념입니다만, 오늘날에는 비단 현상학이나 철학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초기 현상학이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의식과 대상의 관계라는 측면에 주로 초점을 맞췄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타자라는 개념에는 얽힌 다른 의미의 층위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를 테면 인간이 무엇을 (자신과) 같다고 여기고 무엇을 다르다고 여기는지 판단하는 방식이나 인간이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대상화하는 방식처럼.

 

타자라는 개념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이웃처럼 따라붙습니다. 우선 타자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차이를 함축합니다. 나와 다른 무엇을 타자라고 할 때 결국 이 다름을 규정하는 기준이자 내용이 될 수 있는 차이라는 개념이 곧바로 따라붙지요. 또 거꾸로 타자와 다른 나를 생각해본다면 나의 자기동일성, 즉 정체성이라는 개념 또한 타자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꼭 필요한 개념입니다.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 나의 정체성과 다른 것으로서의 차이, 그 차이를 가진 존재로서의 타자, 정도의 개념 축이 기본적으로 성립한다고 볼 수 있겠군요.

 

문제는 이런 ‘나’의 정체성이 기본적으로 보편성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반성하고 성찰해도 인간은 도대체가 자기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기 어려운 걸까요,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속성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와 다른 것은 이상하고 틀린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이상한 건 고치고 틀린 건 바로잡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곧장 판단과 개입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판단과 개입은 다시 자격과 정당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고, 이 모든 관계의 연결고리에는 권력과 폭력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지요.

 

 

… (중략) …

 

 

타자와 차이, 폭력 등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개념과 논의의 맥락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하고, 각각의 개념이 어떻게 등장했고 또 어떤 맥락 속에 놓이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이에 접근하는 관점에 따라 이들 개념이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하면 이령비령식의 두루뭉술한 논의가 되기 쉽다는 뜻입니다. 오늘 살펴본 것처럼 타자에 대한 관용, 환대, 책임, 인정 등을 주장하는 각각의 이론을 잘 들여다보면 타자의 문제라는 동일한 출발점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친다기보다는 타자를 어떻게 개념화하는지에서부터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이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폭력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도 마찬가지고요.

 

(어쩐지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많은) 지젝은 폭력의 근원을 ‘이웃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폭력적인 사람은 다름 아닌 가장 겁이 많은 사람, 즉 가장 약한 사람일 겁니다. 나와 다른 것에서 곧장 공포를 느끼고 그것을 외면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을 때, 그것만으로는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것을 밀어내거나 제거하려는 시도가 바로 폭력의 핵심이자 발현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문성훈은 갈퉁과 호네트를 절충해 정체성의 훼손을 폭력의 핵심으로 규정합니다. 지젝의 통찰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 타인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사람이 타인보다 더 약한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폭력의 주체는 대상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 즉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곧 자신이 부정 당하는 것으로 느끼면서, 동시에 그것을 외면하거나 피하지도 못한 채 폭력의 과정에서 정확하게 그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니까요.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단단할수록 차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폭력 비판의 관건은 차이를, 나와 다른 것을 견디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누군가 행사하는 폭력의 강도는 정확하게 그의 나약함에 반비례하니까요. 약한 것들이 서로를 경계할수록 폭력의 가능 공간 또한 확장하기 마련입니다. 강한 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요.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5. 6. / 곰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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